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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광복절에 되찾은 할아버지의 명예-연합뉴스(07.08.14)

2007년 8월 14일 484

<사람들> 광복절에 되찾은 할아버지의 명예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14일 광주 서구 치평동에서 한정옥(59)씨가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한방섭 선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 60년만에 유공자인정 받아낸 손자 한정옥씨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할아버지가 큰 일을 하셨는데도 억울하게 사셨다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섰습니다”광복절 62주년을 맞아 15일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을 받는 애국지사 한방섭(韓芳燮.1890-1958) 선생의 손자인 한정옥(59)씨는 조부(祖父)가 60년 동안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은 사연을 풀어놨다.   한방섭 선생은 1919년 전남 곡성군 곡성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가담하고 1924년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돼 광주교도소에서 3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한씨는 “할아버지가 감옥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는데 할아버지는 이때부터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외부에 숨기셨다”고 말했다.   한씨의 부친도 이 같은 집안 내력으로 인해 징용됐다가 돌아온 뒤로는 시름시름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했고 한씨의 조모는 결국 남편의 독립운동 자료를 모두 불태웠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독립유공자 인정은 꿈조차 못 꿨던 한씨는 우연히 자신의 조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김영학(金永鶴.1887-1939) 선생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2년 전부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서게 됐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자료가 모두 사라져 버려 유공자 인정신청이 번번이 거부되자 한씨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2년여 동안 서울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뒤지고 김영학 선생의 후손들을 찾아 다니며 증빙 자료를 모았다.   이 같은 한씨의 노력

환생한 안중근 의사가 화병에 걸린 이유

2009년 10월 29일 496

환생한 안중근 의사가 화병에 걸린 이유(미디어오늘, 09.10.28)

안중근의 가족들

2009년 10월 29일 468

안중근의 가족들(MBC, 09.10.26)

美의회에 日우경화 경고한 장일석씨-연합뉴스(07.08.14)

2007년 8월 14일 424

<사람들> 美의회에 日우경화 경고한 장일석씨(서울=연합뉴스) 박대한 기자 = “일본의 종군 위안부 강제 동원 행위가 잘못됐다는 생각,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일을 당했던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정치권 뿐 아니라 국제연합(UN) 등에 확산되기를 희망할 뿐입니다”미국 의회는 지난 1월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HR 121호)을 정식 발의했다.   결의안이 발의되기 직전 549명의 미 상.하원 소속 의원 전원에게 발신지가 한국으로 표시된 우편물이 도착했다.   이 우편물을 보낸 이는 장일석(62)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FIU) 행정실장. 그는 사비 462만원을 들여 자신이 집필한 ‘제2의 진주만 침공’이라는 책을 미 의회 의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경제대국으로 큰 일본이 보수 우경화 세력의 결집을 통해 세계 패권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책 앞머리에는 14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연행돼 위안부 생활을 해야했던 석순희(79.가명) 할머니의 사연을 담은 편지를 동봉, 미 의원들에게 굴절된 과거사의 아픈 상처를 외면하지 말기를 간곡히 호소했다.   장 전 실장이 일본의 우경화를 경고하는 ‘제2의 진주만 침공’의 집필을 구상하게 된 것은 재경부의 전신인 재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첫 해외 출장으로 일본을 방문한 그는 짧은 출장 기간이었지만 일본인의 친절에 한 번 놀랐고, 임진왜란 당시 우리 민족의 피해를 보여주는 한국인 귀 무덤을

美의회에 日우경화 경고한 장일석씨-연합뉴스(07.08.14)

2007년 8월 14일 379

<사람들> 美의회에 日우경화 경고한 장일석씨(서울=연합뉴스) 박대한 기자 = “일본의 종군 위안부 강제 동원 행위가 잘못됐다는 생각,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일을 당했던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정치권 뿐 아니라 국제연합(UN) 등에 확산되기를 희망할 뿐입니다”미국 의회는 지난 1월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HR 121호)을 정식 발의했다.   결의안이 발의되기 직전 549명의 미 상.하원 소속 의원 전원에게 발신지가 한국으로 표시된 우편물이 도착했다.   이 우편물을 보낸 이는 장일석(62)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FIU) 행정실장. 그는 사비 462만원을 들여 자신이 집필한 ‘제2의 진주만 침공’이라는 책을 미 의회 의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경제대국으로 큰 일본이 보수 우경화 세력의 결집을 통해 세계 패권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책 앞머리에는 14세의 나이에 일본군에 연행돼 위안부 생활을 해야했던 석순희(79.가명) 할머니의 사연을 담은 편지를 동봉, 미 의원들에게 굴절된 과거사의 아픈 상처를 외면하지 말기를 간곡히 호소했다.   장 전 실장이 일본의 우경화를 경고하는 ‘제2의 진주만 침공’의 집필을 구상하게 된 것은 재경부의 전신인 재무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첫 해외 출장으로 일본을 방문한 그는 짧은 출장 기간이었지만 일본인의 친절에 한 번 놀랐고, 임진왜란 당시 우리 민족의 피해를 보여주는 한국인 귀 무덤을

친일사전 등재막아달라는 소송 기각

2009년 10월 29일 498

친일사전 등재막아달라는 소송 기각(bbs, 09.10.28)

박정희 전 대통령-작곡가 안익태 ‘친일파 명단’ 파문

2009년 10월 29일 466

박정희 전 대통령-작곡가 안익태 ‘친일파 명단’ 파문(일간스포츠, 09.10.28)

“몸뻬는 일제가 강요한 옷”-‘문화'(07.08.14)

2007년 8월 14일 551

“몸뻬는 일제가 강요한 옷” ‘몸뻬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 여성들에게 강제한 옷으로, 한국 여성 최초의 밀리터리 룩.’광복 이후에도 빈곤 계층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입었던 ‘몸뻬’에 대해 도입 및 정착 과정과 그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살핀 글이 나왔다. 안태윤 경민대 전임강사는 계간학술지 ‘사회와 역사’ 여름호에 발표한 ‘일제말 전시체제기 여성에 대한 복장통제’라는 수록문을 통해 일제시기 몸뻬의 강제와 여성성의 상관 관계를 고찰했다.글에 따르면, 일제 말기 여성의 복장과 외모는 여성 개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권력과 사회내 세력집단이 부단히 개입하고 통제한 대상이었다. 일제는 1940년 전시 남성복으로 자원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국민복’이라는 국방색의 복장을, 1942년엔 전시 여성복으로 ‘부인표준복’을 제정했다. 모두 7종류의 표준복 중에서 활동복으로 지정된 몸뻬만이 거의 모든 일본 여성에게 확산됐다. 몸뻬는 원래 메이지(明治) 이전부터 일본 관동 이북의 농촌 지방에서 남녀 공용으로 입던 바지형태의 작업복이었다.하지만 조선에서 몸뻬는 일본과는 달리 여성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정한 전시 복장들이 조선의 문화적 여건에 맞게 수정되는 과정이 없이 그대로 도입, 강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 지식인들에게도 국가정책에 호응하는 역할이 주어졌을 뿐이다.광복 이후에도 노동자, 농민, 빈곤한 상인층의 여성들에게는 몸뻬가 일상복으로 남았다. 몸뻬의 정치적 의미는 사라졌지만, 빈곤층 여성의 노동을 필요로 했던 한국사회의 경제적 여건이 몸뻬를 하나의 여성 패션으로 지속시키게 한 것이다. 

“몸뻬는 일제가 강요한 옷”-‘문화'(07.08.14)

2007년 8월 14일 1070

“몸뻬는 일제가 강요한 옷” ‘몸뻬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 여성들에게 강제한 옷으로, 한국 여성 최초의 밀리터리 룩.’광복 이후에도 빈곤 계층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입었던 ‘몸뻬’에 대해 도입 및 정착 과정과 그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살핀 글이 나왔다. 안태윤 경민대 전임강사는 계간학술지 ‘사회와 역사’ 여름호에 발표한 ‘일제말 전시체제기 여성에 대한 복장통제’라는 수록문을 통해 일제시기 몸뻬의 강제와 여성성의 상관 관계를 고찰했다.글에 따르면, 일제 말기 여성의 복장과 외모는 여성 개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권력과 사회내 세력집단이 부단히 개입하고 통제한 대상이었다. 일제는 1940년 전시 남성복으로 자원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국민복’이라는 국방색의 복장을, 1942년엔 전시 여성복으로 ‘부인표준복’을 제정했다. 모두 7종류의 표준복 중에서 활동복으로 지정된 몸뻬만이 거의 모든 일본 여성에게 확산됐다. 몸뻬는 원래 메이지(明治) 이전부터 일본 관동 이북의 농촌 지방에서 남녀 공용으로 입던 바지형태의 작업복이었다.하지만 조선에서 몸뻬는 일본과는 달리 여성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정한 전시 복장들이 조선의 문화적 여건에 맞게 수정되는 과정이 없이 그대로 도입, 강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 지식인들에게도 국가정책에 호응하는 역할이 주어졌을 뿐이다.광복 이후에도 노동자, 농민, 빈곤한 상인층의 여성들에게는 몸뻬가 일상복으로 남았다. 몸뻬의 정치적 의미는 사라졌지만, 빈곤층 여성의 노동을 필요로 했던 한국사회의 경제적 여건이 몸뻬를 하나의 여성 패션으로 지속시키게 한 것이다. 

4370명 친일 행적·해방후 경력 총망라

2009년 10월 29일 442

4370명 친일 행적·해방후 경력 총망라(한겨레신문, 09.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