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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독립유공자 679명 발굴… 애국심 찾는 ‘탐정 공무원’

2009년 10월 29일 563

독립유공자 679명 발굴… 애국심 찾는 ‘탐정 공무원’(한국일보, 09.10.28)

‘수탈과 저항’의 역사 가운데 착한 일본인도 있었다

2007년 8월 16일 3199

    내일신문 신명식 기자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수탈과 저항’의 역사로 표현된다.  아베 개헌정권은 우경화로 치달으며 역사왜곡을 노골화 하고 있다.이런 때일수록  과거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운동그룹과 지식인에게 힘을 주는 일이다.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한 일본인은 저명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가유일하다.  그것도 2004년에 이루어졌다.  이밖에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쑨원 장제스 등 중국인 31명, 영국인 6명, 미국인 3명, 아일랜드 인 3명, 캐나다인 1명으로 모두 45명뿐이다.식민지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식민지침탈의 첨병노릇을 했다. 일본 하층민에게도 조선은 부와 권력을  쥘 수 있는 ‘신천지’였다.  극소수이지만 착한 일본인들의 활약은 돋보인다. 정부가 조선의 독립을도왔던 이들을 소홀히 했던 것은  대다수가 사회주의 계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대한다는 취지에서  2005년부터 북한정권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60여명을 발굴, 서훈했다.◆자유법조단 변호사 맹활약 = 식민지조선을 도운 일본인 친구를 꼽자면 변호사가 많다. 후세 다쓰지와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1889~1976)는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다. 이들은 당시 합법적 좌파정당인 노동농민당 소속이었다.후세는  조선인 이재민의 구호와 인권옹호에도 힘쓰고,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했다. 조선총독부도 그를부담스러워했고,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각종 인쇄물에  ‘우리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라고 존경심을 표시했다.한편 1910년대에는  하나이 타쿠조(花井卓藏) 우자와 소오메( 澤總明) 변호사가 신민회와 3·1운동 변호를 맡았다.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변호사로 후세 다쓰지와 쌍벽을 이뤘던 야마자키 게사야(山崎今朝彌 1877~1954) 변호사는

친일파 토지 몰수 결정-마이니치신문(07.08.14)

2007년 8월 16일 374

친일파 토지 몰수 결정    (일본 마이니치, 8.14, 7면, 서울지국) 한국 대통령의 직속조직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13일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협력한 ‘친일파’로 알려진 10명이 취득한 토지(총면적 약 102만㎡, 공시지가 총액 105억원)을 몰수해 국유화하기로 결정했다. 5월에 1910년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 각료 등 9명으로부터 토지몰수를 결정한 이후 ‘친일파’재산의 국유화는 이로서 두 번째이며, 10명 중 5명은 몰수결정에 대해 불복할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 독립운동가 녹음테이프 발견

2009년 10월 29일 418

1910년대 독립운동가 녹음테이프 발견(연합뉴스, 09.10.28)

‘안중근의 노래’

2009년 10월 29일 428

‘안중근의 노래’(MBC, 09.10.28)

친일파 토지 몰수 결정-마이니치신문(07.08.14)

2007년 8월 16일 327

친일파 토지 몰수 결정    (일본 마이니치, 8.14, 7면, 서울지국) 한국 대통령의 직속조직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13일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협력한 ‘친일파’로 알려진 10명이 취득한 토지(총면적 약 102만㎡, 공시지가 총액 105억원)을 몰수해 국유화하기로 결정했다. 5월에 1910년 한일합방조약 체결 당시 각료 등 9명으로부터 토지몰수를 결정한 이후 ‘친일파’재산의 국유화는 이로서 두 번째이며, 10명 중 5명은 몰수결정에 대해 불복할 것으로 보인다.

캐리커처로 보는 ‘한 시대의 다른 삶 -항일과 친일’

-0001년 11월 30일 995

     민족문제연구소  전시회자료 내려받기   ▶ 전시개요  주    최 : 전주역사박물관  주    관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전시유물 :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초상화(캐리커처) 38점  전시장소 : 전주역사박물관 민화실(2층)  전시기간 : 2007년 8월 15일∼9월 16일  전시개막일 : 2007년 8월 14일 오후 2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가  주관하는 “기획초대전 한시대의  다른 삶-항일과 친일”전이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한 시대 서로 다른 삶의  길을 걸었던  일제시대 인물들을 조명해 봄으로써 항일과 친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함께 고민해 보는 자리로 마련되었다.일제시대 미술, 문학,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 친일인물과 같은 시대 다른 길을 선택한 항일인물을 분야별로 뽑아 38명의 행적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인물들의 삶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각 인물들은 캐리커처(caricature)로 표현하였다. 캐리커처는 사건의 양상이나 사람 모습에 대한 특징을 잡아 과장되게 표현한 그림으로 항일·친일 인물의 특징을 한 눈에 보여주도록 표현했다. 관련기사 전북서 광복절 행사 다채 (연합뉴스, 07.08.15)<카메라뉴스> “캐리커처로 항일 역사 배워요”(연합뉴스, 07.08.14)일제시대 ‘맞수들’ 곧은길 대 굽은길(한겨레신문, 07.08.13) 이번 전시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친일 잔재를 확인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것이며,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일면을 인물들의 삶 속에서 확인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의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일제강점기에는 누구라도 친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맹목적 옹호나,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지만 기여한바도 크다는  미화를 서슴지

80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행사 풍성(종합)

2009년 10월 29일 439

80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행사 풍성(종합)(연합뉴스, 09.10.28)

“하토야마 위안부문제 해결 기대”

2009년 10월 29일 480

“하토야마 위안부문제 해결 기대”(서울신문, 09.10.29)

광복절에 되찾은 할아버지의 명예-연합뉴스(07.08.14)

2007년 8월 14일 399

<사람들> 광복절에 되찾은 할아버지의 명예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14일 광주 서구 치평동에서 한정옥(59)씨가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한방섭 선생의 사진을 들고 있다. 60년만에 유공자인정 받아낸 손자 한정옥씨 (광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할아버지가 큰 일을 하셨는데도 억울하게 사셨다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섰습니다”광복절 62주년을 맞아 15일 독립유공자 건국훈장을 받는 애국지사 한방섭(韓芳燮.1890-1958) 선생의 손자인 한정옥(59)씨는 조부(祖父)가 60년 동안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은 사연을 풀어놨다.   한방섭 선생은 1919년 전남 곡성군 곡성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가담하고 1924년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돼 광주교도소에서 3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한씨는 “할아버지가 감옥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는데 할아버지는 이때부터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외부에 숨기셨다”고 말했다.   한씨의 부친도 이 같은 집안 내력으로 인해 징용됐다가 돌아온 뒤로는 시름시름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했고 한씨의 조모는 결국 남편의 독립운동 자료를 모두 불태웠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독립유공자 인정은 꿈조차 못 꿨던 한씨는 우연히 자신의 조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김영학(金永鶴.1887-1939) 선생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2년 전부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나서게 됐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자료가 모두 사라져 버려 유공자 인정신청이 번번이 거부되자 한씨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2년여 동안 서울에 있는 국가기록원을 뒤지고 김영학 선생의 후손들을 찾아 다니며 증빙 자료를 모았다.   이 같은 한씨의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