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2]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박광종 선임연구원 1919년 평양 시위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기독교의 장로교와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장로교는 장대현교회 앞마당인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는 광성학교 근처 남산현교회에서, 천도교는 설암리교구당에서 고종의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개최하고 이어서 평양경찰서를 향해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각 시위대는 3시경 평양경찰서 앞에서 모두 합류하였는데 시위행렬과 인근 시민을 모두 합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가와 혈성가를 고창했으며 이후 서문과 평양역으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저녁 7시에 일본군대가 평양경찰서 앞의 군중을 강제로 해산하고 평양시내 곳곳에 군경을 파견해 시위대를 저지,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8시경 숭실대학과 숭실중학 밴드부가 숭실대학 교정에 모여 행진곡을 연주하며 시위대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던 중 일본 군경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평양의 시민과 학생들은 일본군의 저지를 뚫고 밤늦도록 시내각지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평양의 만세운동 시위는 그해 5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시위횟수가 12회나 되고 참가자 수는 3만여 명에 달했다. 3월 만세 시위 때는 숭의여학교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송죽회(松竹會)의 창단 멤버인 박현숙은 평양 남산현교회(감리교)의 유사(有司)를 맡고 있었는데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의 요청을 받고 3·1거사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숭의여학교 3학년 후배들로 이루어진 송죽회 회원들-권기옥, 김순복, 김옥석, 최순덕, 박정인, 한선부 등-을 동원하여 2월 20일경 숭의여학교 기숙사에서 태극기
몽이네 예나눔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배우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곳
[인터뷰] 몽이네 예나눔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배우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곳 몽이네 예나눔 대표 신동현 작가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김선아 학예실 5월 16일 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물 철수를 위해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을 찾은 몽이네 예나눔 대표인 신동현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나누었다. 지난 3월부터 4월까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몽이네 예나눔 회원들의 독립운동가 초상화를 전시한 바 있다. 또한 몽이네 예나눔에서 직접 제작한 기념노트와 수제브로치를 기증해주어 박물관에서 이것을 판매, 후원금으로 사용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문 : 원래는 고향이 여수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고향은 어디인가요? 답 : 네. 원래 고향은 서울이구요. 지금 웹툰 작가인 남편 양영순 씨도 어렸을 때 서울에 올라와서 살았어요. 저희 부부가 여수에 내려온 지는 딱 10년 됐어요. 남편과는 미술학원에서 만났죠. 문 : 그 전엔 어떤 그림을 그렸었나요? 답 :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쪽이었어요, 날고 싶은 자작나무라는 편지지 회사를 다녔구요. 삽화, 웹툰 등을 했어요. 원래 팬시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죠. 편지지, 일기장, 소품 등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한 5~6년 정도 회사를 다녔구요. 이후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했어요. 문 : 결정적으로 여수에 가야겠다 하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요? 답 : 아버님이 원래 여수 분이세요. 서울에 와서 사시다가 갑자기 여수에 내려가겠다고 하셨어요. 두 분이 사시기엔 너무 넓은 집이라 저와 남편이 함께 내려갔어요. 아버님, 어머님 댁에 들어가게 된 거죠. 아이도 5살밖에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창립
[초점] 4월 15일 오후 5시 중국 둥관시 동성국제호텔 3층 회의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중국광동지부 창립총회가 열렸다. 박호균 회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업가로 활동한 김유 회원이 초대 지부장을, 박호균 회원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창립총회에서 임헌영 소장은 ‘3·1혁명과 촛불혁명’을 주제로 특강을 했으며,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의 활동과 식민지역사박물관 등을 소개했다. 광동지부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LA와 일본 도쿄에 이어 해외 지부로는 5번째 중국 지부로는 첫 번째로 설립되었다. 앞으로 광동지부는 강연회 및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통해 우리 교민들과 함께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창립총회에 앞서 임헌영 소장과 김유 지부장 등은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아편전쟁박물관, 광저우 한국총영사관 등을 방문했다. 광동지부는 5월 9일 광저우한국학교, 심천국제학교, 동관한림학교를 방문해 〈친일인명사전〉을 각 1질씩 기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기증자료
4월 24일 ㈜한양노동조합(위원장 김병인)조합원 9명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노동조합관련 자료(사진, 문서 등) 7상자를 기증했다. 이번 자료기증은 지난 3월 자료를 기증한 김충한 씨가 본인이 몸담고 있는 ㈜한양노동조합의 자료가 가장 가치있는 장소에 기증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루어졌다. 4월 25일 일본의 ‘히로시마 강제연행을 조사하는 모임広島の強制連行を調査する会’에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바로 그날의 일본 분위기를 알 수 있는 1910년 8월 29일, 30일자 『大阪每日新聞』 등 총 13점을 기증했다. 4월 26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경성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한 <朝鮮主要會社表>(1943년 1월)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 강좌 개설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은 서울시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운영 사업자로 선정되어 5월 10일 서울자유시민대학을 개설했다. 강좌의 주제는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으로 민족문제연구소 내·외부의 전문 연구자와 활동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번 강좌는 서울특별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성숙한 시민 양성을 위한 민·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과 다양한 특화 프로그램 및 우수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발굴하고자 하는 의도와 연구소의 시민역사교육의 대중화,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홍보가 잘 맞아떨어진 기획이다. 강좌는 매주 목요일에는 강의 9회, 토요일에는 2회 답사로 구성된다. 서울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진행되 기에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높아 개강 전에 정원 40명이 모두 찼다. 1회차 강의에서 한철호 동국대교수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일제가 한국을 침략·병탄했던 과정과 이에 대한 한국의 다양한 대응을 소개하며, 국치를 단순히 과거의 치욕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으로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2회차 강의에서 이형식 고려대 교수는 다른 식민지와 비교해 볼 때 조선총독은 입법, 행정, 사법에 걸쳐 거대하고 전제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식민지 지배정책사 및 대륙침략정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선총독을 정점으로 한 지배구조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강좌는 9회에 걸쳐 일본군대의 조선인 집단학살, 경찰, 경제수탈과 강제동원 등 식민지시기 일제 통치의 실상과 해방과 독립을 향한 투쟁을 살펴볼 예정이다. 또한 수탈과 저항의 현장에 대한 답사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증언도 진행한다. 그리고 박물관의 역사교육, 전시
식민지역사박물관,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기획전 개최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5월 8일 어버이날에 특별한 어버이를 기리는 전시회를 개막했다. 3‧1운동 100주년 두 번째 기획전으로 마련한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는 일제 침략전쟁에 끌려가 희생당한 강제동원피해자와 유족들의 통한의 삶을 담은 전시회이다. 개막식은 박물관 1층 돌모루 홀에서 열렸다. 이날 개막식에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소속 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남상구 소장과 용산구청‧청파동 주민센터, 민주인권기념관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해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함께 추모했다. 개막식은 특별영상으로 시작해 임헌영 소장의 인사말과 이희자 보추협 대표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특별히 일본에서 참석한 야노 히데키 씨는 1995년부터 한국의 강제동원피해자와 함께 투쟁해 왔던 과정을 소개하며 하나 둘 고인이 되신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유족의 이름을 호명해 참석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이번 전시회는 2011년 연구소와 보추협이 한일시민단체의 후원을 모아 천안 망향의 동산에서 개최한 일제하 강제동원 희생자 합동추모제를 다시 재현했다. 추모제는 친족들의 애도 속에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타지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을 기리는 합동장례식이었다. 그때 사용했던 목상여를 9년 만에 다시 꺼내어 전시장 한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 돌아가신 이의 시신도 유골도 혼도 없는 빈 상여지만 남은 이들의 애끓는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이 담긴 상여이다. 상여 주위 “끌려간 사람들, 남겨진 이야기”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20명의 사연이 전시되었다. 강제동원의 피해가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남은 가족의 삶마저 파괴하고, 자식들의 미래조차 집어삼키는 폭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끌려간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을 걷다’ 상반기 정기답사 개최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상반기 정기답사가 4월 20일, 27일 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 용산을 걷다’를 주제로 20일에는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배후 공간인 용산 일 대, 27일에는 1919년 3·1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마포전차길을 따라 마포 일대를 둘러보았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현장안내로 진행된 이번 답사는 답사 신청이 빠르게 마감 될 정도로 역사 현장답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번 답사에는 가족 단위 참가자와 비회원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자녀로 구성된 대가족과 모자, 부녀 참가팀 등, 가족 모두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연구소·박물관 후원회원이 아닌 참가자도 여럿이 있었는데, 답사뿐만 아니라 연구소에서 하는 일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추후에 있을 행사에도 참가를 희망하였다. 3시간이 넘는 대장정이었음에도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열기가 넘쳐났다. 특히 일제강점기 용산과 마포 일대의 일제식민통치기관의 설치와 변모, 수탈의 현장에 대한 해설이 진행될 때는 회한과 분노의 표정이 얼굴 가득하였다. • 임무성 교육위원
한국병합기념장을 끝까지 수령하지 않았던 사람들
[소장자료 톺아보기 4] ▲ 1912년 8월 1일자로 교부된 ‘한국병합기념장’의 모습이다. 국화 문양 아래 오동나무와 이화(李花, 자두꽃) 가지를 교차하여 배치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 <매일신보> 1912년 4월 7일자에 실린 병합기념장 관련 보도에는 총 제작매수가 약 3만 개 가량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일본제국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적 경사가 발생하거나 잇따른 침략전쟁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할 때마다 이를 영구히 기리는 뜻에서 칙령(勅令)을 통해 각종 기념장이나 종군기장을 발급하였다. 이를 통해 전쟁참가자들과 기타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 내거나 이를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곤 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이후에도 이러한 대업(大業)의 달성을 그냥 넘길 리는 없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12년 3월 28일에 제정된 칙령 제56호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제정의 건(件)’이다. 이에 따르면 ① 한국병합의 사업에 직접 관여했던 자 및 한국병합의 사업에 동반하여 요무(要務)에 관여했던 자, ② 한국병합 당시 조선에 재근(在勤)했던 관리 및 관리대우자 및 한국병합 당시 한국정부의 관리 및 관리대우자, ③ 종전 일한관계(日韓關係)에 공적이 있는 자가 이 기념장의 수여대상자로 정해졌다. 일본제국의 각종 기념장, 종군기장, 전첩기장, 잡종기장, 휘장 발행 연혁 <매일신보> 1912년 4월 7일자에 수록된 「한국병합기념장」 제하의 기사에는 이 병합기념장의 주조수(鑄造數)는 약 3만 개 가량에 이를 것이나 수여 인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후 ????일본제국관보???? 1913년 4월 9일자(부록)를 통해, 기념장 수여자가 처음 공표되었는데, 1912년 8월 1일자로 소급하여 상훈국(賞勳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추가소송에 나서다
3·1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 강좌와 답사가 연구소 교육장 5층에서 3월 2일(토) 오후 3시에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서 개, 돼지 대접도 안 해주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이제라도 일본정부와 국민들은 과거를 생각할 때 반성해야한다.” 20대 청년으로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한 김한수 할아버지는 100세의 몸을 이끌고 기자들 앞에 서서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일본의 책임을 엄중하게 물었다. 4월 4일(수)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는 일제 강제동원사건 추가소송의 제소를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구소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지원단으로 지난해 10월 30일 역사적인 대법원 승소판결을 이끌어 낸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와 함께 이번 추가소송을 제기했다. 기자회견에서 조시현 연구원은 이 모든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당한 일이 아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 공동체의 문제이다. 개인에게 문제해결을 맡길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는 노력을 보여야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소는 강제동원소송 대리인단을 구성한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함께 지난 1월 25일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설명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후 두 달여에 걸쳐 300명에 가까운 강제동원 피해자 및 그 유족들과의 상담을 통해 추가소송을 준비해 왔다. 이번 1차 추가소송에서는 4명의 생존 피해자와 사망한 6명의 피해자 유족 27명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일본코크스공업(옛 미쓰이광산)을 상대로 원고들이 당한 불법적인 강제동원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했다. 특히 이번 추가소송에서는 이미 배상책임이 인정된 일본제철, 미쓰비시, 후지코시에 이어 일본코크스공업이 피고
용산총독관저 앞 언덕에 초대형 무선 송신탑이 들어선 까닭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의 부산물로 탄생한 육군무선전신소
[식민지 비망록 46] 용산총독관저 앞 언덕에 초대형 무선 송신탑이 들어선 까닭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의 부산물로 탄생한 육군무선전신소 이순우 책임연구원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조선 주둔 일본군대는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듯이 때마다 대규모 기동훈련을 벌였다. 이러한 훈련은 대개 가을철에 시행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용산에 주둔했던 제20사단 의 경우, 이를 ‘경성사단 추계연습(京城師團 秋季演習)’ 또는 ‘추계기동연습(秋季機動演習)’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특히, 사단 예하의 여단끼리 편을 나눠 대항전의 형태로 참가할 때는 이를 ‘여단대항연습(旅團對抗演習)’이라고 불렀다. 이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시행되는 기동훈련으로는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이 있었다. 잇따른 침략전쟁에 예하부대의 병력동원이 잦았고 여기에 예산 확보 문제가 겹쳐 사단 규모의 대항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1930년과 1935년, 단 두 차례 거행하는 것에 그쳤다. 그 가운데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첫 번째 사단대항연습은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즉 제19사단(나남)과 제20사단(경성)이 각각 북군(北軍)과 남군(南軍)이 되어 3만여 명의 병력이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가상 공방전을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이었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참관하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때의 기동훈련과 관병식의 상황은 <소화5년 어조선 사단대항연습사진첩(昭和五年 於朝鮮 師團對抗演習寫眞帖)>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므로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이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관병식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의 배경에 높은 철탑들이 솟아있는 모습이 곧잘 포착되어 있어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대규모 기동훈련의 말미에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이 거행되는 장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