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한국병합기념장을 끝까지 수령하지 않았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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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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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8월 1일자로 교부된 ‘한국병합기념장’의 모습이다. 국화 문양 아래 오동나무와 이화(李花, 자두꽃) 가지를 교차하여 배치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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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2년 4월 7일자에 실린 병합기념장 관련 보도에는 총 제작매수가 약 3만 개 가량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일본제국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가적 경사가 발생하거나 잇따른 침략전쟁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할 때마다 이를 영구히 기리는 뜻에서 칙령(勅令)을 통해 각종 기념장이나 종군기장을 발급하였다. 이를 통해 전쟁참가자들과 기타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 내거나 이를 재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곤 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이후에도 이러한 대업(大業)의 달성을 그냥 넘길 리는 없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12년 3월 28일에 제정된 칙령 제56호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 제정의 건(件)’이다. 이에 따르면 ① 한국병합의 사업에 직접 관여했던 자 및 한국병합의 사업에 동반하여 요무(要務)에 관여했던 자, ② 한국병합 당시 조선에 재근(在勤)했던 관리 및 관리대우자 및 한국병합 당시 한국정부의 관리 및 관리대우자, ③ 종전 일한관계(日韓關係)에 공적이 있는 자가 이 기념장의 수여대상자로 정해졌다.

일본제국의 각종 기념장, 종군기장, 전첩기장, 잡종기장, 휘장 발행 연혁

<매일신보> 1912년 4월 7일자에 수록된 「한국병합기념장」 제하의 기사에는 이 병합기념장의 주조수(鑄造數)는 약 3만 개 가량에 이를 것이나 수여 인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후 ????일본제국관보???? 1913년 4월 9일자(부록)를 통해, 기념장 수여자가 처음 공표되었는데, 1912년 8월 1일자로 소급하여 상훈국(賞勳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표시된 이 명단에는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전 내각총리대신은 물론이고 이른바 ‘창덕궁 이왕’과 ‘덕수궁 이태왕’의 신분으로 격하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총독부관보>의 경우에는 이들 명단 가운데 ‘조선 관련 해당자’만 따로 추출하여 1913년 4월 10일자 이후 총 18회에 걸쳐 ‘부록’의 형태로 그 명단을 게재한 바 있다. 여기에 수록된 명단을 잠정 집계해 본 결과, 총수록자는 11,928명이며 조선인의 숫자는 일본식 이름으로 이미 전환한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정확한 집계가 어려우나 얼추 4,850명 남짓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으로 일제가 수여하는 이러한 종류의 기념장이나 훈장, 서위(敍位) 등을 수령하는 것은 그 자체가 친일행위의 징표로서 특정인물의 행적을 가늠함에 있어서 중대한 흠결(欠缺)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간혹 예외가 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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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관보> 1918년 7월 22일자에 수록된 ‘거소불명자’ 명단이다. 이들은 외형상 퇴직 이후 거처가 파악되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이 가운데는 명백하게 자발적인 망명을 통해 기념장의 수령을 묵시적으로 거부한 이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관보> 1917년 2월 2일자에 실린 ‘한국병합기념장 배수자 거소불명(拜受者 居所不明)’이라는 명단이 반 페이지에 걸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병합기념장을 받아가야 할 사람들이지만 사는 곳을 파악하지 못해 이를 전달하지 못한 사람들의 명단인 셈이다. 그 후에도 거소불명자를 찾는 광고가 이듬해까지 20여 차례 계속되는 가운데 몇 몇 사람은 본인, 유족, 관계자를 통해 병합기념장을 찾아간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 가운데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도 88명(일본인 21명 포함)이나 되었다.

이보다 앞서 <매일신보> 1915년 12월 11일자에 수록된 「병합기념장 미교부자」 제하의 기사에 경찰관 퇴직자(순사 및 순사보 출신)가 다수 여기에 포함된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누구나 알 만한 인물을 한 명 꼽자면 상해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을 지냈고 해방 이후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의 존재가 단연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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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5년 12월 11일자에 수록된 명단.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직 순사 또는 순사보였던 경찰관 퇴직자였다.

그는 경술국치 당시 통감부 판사의 신분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출범하기 직전 날인 1910년 9월 30일자로 의원면본관(依願免本官, 자진사직)하였고, 다음날 총독부에 의해 중추원 부찬의(中樞院 副贊議)로 임명되었으나 이 역시 1911년 2월 25일자로 의원면직(依願免職) 처리되었다.

이러한 경력 탓에 그에게도 칙령에 정해진 규정에 따라 당연지급자로 분류되었으나, 정작 병합기념장이 교부될 당시에는 이미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상태였으므로 그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누구도 이를 수령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소불명자의 명단에 포함된 이로서 주목할 만한 또 한 사람은 경술국치 당시 강화군수였던 한영복(韓永福, 1867~1935)이다. 그는 1914년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베이징에서 신채호, 이회영과 함께 <천고(天鼓)>를 창간하였고, 그해 임시정부 외무부 북경주재 임시외교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듬해에 <독립공보>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바탕으로 그에게는 지난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바 있다.

이밖에 임시토지조사국 기수를 지낸 윤세린(尹世麟, 1881~1960)도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나중에 대종교(大倧敎)를 이끌었던 윤세복(尹世福;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과 동일인이다. 이들 외에도 건국훈장 서훈자의 명단에 포함된 다수의 인물이 보이지만, 이들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인지의 여부는 미처 일일이 확인해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살펴보았듯이 비록 경술국치 당시에는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던 탓에 병합기념장의 수여대상자가 되었지만, 끝내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일제에 항거하는 길을 택한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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