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조국은 하나다
[추도사] 조국은 하나다 1975년 4월8일 학생운동조직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상고심 공판에서 민복기 대법원장이 8명 사형, 무기 9명 확정판결문을 읽고 있다. 이수병 등 8명은 이튿날 아침 4월 9일 전격 사형당했다. <보도사진연감> 경애하는 4.9통일 8열사 선생님―서도원 열사님, 도예종 열사님, 송상진 열사님, 우홍선 열사님, 하재완 열사님, 김용원 열사님, 이수병 열사님, 여정남 열사님! 영령들이시여! 저승의 세월도 이 속세에서처럼 유수같이 흘러가나요? 저승으로의 행차 날짜가 같으시니 오늘로 이제 만 44살이 되셨겠군요. 얼마나 통탄스러운 긴 44년이었습니까! 그동안 여러 열사님들의 뒤를 이어 시차를 두고 그곳으로 떠나신 분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석구 선생, 이재문 선생, 전재권 선생, 유진곤 선생, 조만호 선생, 정만진 선생, 이태환 선생, 이재형 선생, 나경일 선생, 이성재 선생님 모두 10열사님이 가셨으니 이제 열여덟 열사님의 영령이 이 자리에 함께 하셨겠군요. 여기 소생 몸과 마음 가다듬어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1975년 4월 9일, 그때 34살이었던 저가 어언 78살이 되었습니다. 기자촌에 살던 저는 버스로 서대문구치소 앞을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지나다녔습니다. 열사님들이 가시기 불과 1년 전인 1974년에 저가 문학인 간첩단 사건으로 갇혔던 곳이라 남들은 얼굴도 돌리기 싫어한다지만 저는 지날 때마다 그곳을 찬찬히 살피곤 했답니다. 여전히 그곳에는 존경하는 여러 선배님들과 동지와 후배들이 울분을 토하며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투쟁을 이어가던 때여서 그랬습니다. 1974년 봄, 그때 저는
25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구소를 성원하고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온 박영환 회원
[인터뷰] 25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연구소를 성원하고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온 박영환 회원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4월 2일 11시 연구소 회원 중 최고령인 박영환 회원(92세)이 연구소를 방문해 인터뷰에 응했다. 거동이 약간 불편할 뿐 연세에 비해 정정하고 과거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어 인터뷰가 무난히 진행되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상근자들을 격려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을 전달하였다. 박영환 회원은 1995년 가입한 이래 지금껏 빠짐없이 회비를 내주었고 서울남부지부(예전의 서울관악동작지부) 고문을 맡아 지부에서 추진한 박흥식·김석원 동상 철거 촉구 시위 등 친일청산 활동에 앞장서 왔다. 박 회원께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건강하시길 빈다. 문 : 일제시대 학교 다닌 이야기를 말씀해주세요. 답 : 1928년 경기도 장호원에서 평범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어요. 장호원심상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2년도쿄로 건너갔어요. 20살 터울의 큰형님이 도쿄에서 토목일을 하고 있었어요. 큰형님 댁에 얹혀살면서 도쿄부립 8부중학교에 다녔어요. 1945년 8부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복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죠. 일본 유학 생활 때 가장 기억나는 것은 형님집 근처 슈퍼마켓의 주인 아들과 교류한 거였어요. 그 일본인 학생을 통해서 당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경제학자가 쓴 <빈곤의 철학>이란 책을 했어요. 그 책을 통해 자본주의 하의 빈부 격차, 노동착취 등 사회문제에 눈뜨게 되었어요. 문 : 해방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하셨나요. 답 : 해방 직후 우리집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친지의 권유로 1946년 5월경 신설되어 전액 국비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집 집결소였던 육군 30사단에서 ‘항일음악회’ 열려
고양시(시장 이재준)는 4월 13일 고양시 화전동 육군 30사단 연병장에서 항일음악회를 열었다. 고양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연구소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후원한 이번 행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의 주둔지이자 강제징집 피해자들의 집결소로 알려진 현재 30사단 지역의 역사적 아픔의 의미를 되새기고, 잊혀져가는 광복군가 등의 항일음악 연주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평화의 불씨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진행됐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그간의 발전과정을 차분하게 성찰하는 동시에,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희망찬 미래 100년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날 음악회에는 1,000여 명의 시민 및 군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양시 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을 시작으로 힙합댄스팀 이지크루, 고양신한류예술단, 노관우 밴드, 30사단 군악대, 가수 신형원씨 등이 출연해 연구소가 발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노래를 중심으로 노래하고 연주했다. 사회는 연구소 팟캐스트 진행자인 노기환 MC가 맡았고 김주경 씨가 음악감독을 맡아주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1]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 조한성 선임연구원 경성고보 학생들, 시위에 나서다 3월 1일 오후 1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박노영, 박쾌인은 교문 앞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을 모아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각 교실에 들어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있을 만세시위운동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했다. 교사들은 평소와 달리 쉬는 시간에 너무 조용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학교 내에서 불온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경성고보 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인 많은 시민, 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은 덕수궁과 동대문 방면으로 나뉘어 행진을 하면서 각국 대사관을 들려 조선의 독립 선언을 알리고, 조선총독부가 있는 진고개(현 충무로2가)로 집결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박노영 예심판사가 박노영에게 물었다. “조선 독립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일합방의 취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총독정치는 마치 조선을 식민지와 같이 취급하고,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지 않습니다. 총독정치의 근본정책은 동화정책이라 하는데, 민족을 달리하고 역사를 달리하는 두 민족이 동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다른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날이 보고 듣는 일 중에 우리의 감정을 해치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긴 것입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3월 1일 오후 3시 경운동에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2)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2)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4 조각배에 몸을 싣고 상하이를 일본이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연이은 의거로 일제는 대대적인 수색과 검거를 벌였다.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기 어려워진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국인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비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연출로 상하이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싱 백범 피난처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청년백범 1기 답사단 자싱의 지역 유지인 저보성의 집에 숨어들었다. 저보성 일가는 국민당에서 높은 지위의 당원이었고, 윤봉길 의거 등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백범은 중국인처럼 옷을 입고 광동 사람인 척하면서 ‘장진구’ 또는 ‘장진’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동말을 잘 하지 못하는 백범은 벙어리나 다름없는 답답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백범과 임시정부는 따로 또는 같이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백범은 자싱, 하이옌, 항저우 등을 오가며 피신하고 있었고, 임시정부는 항저우, 진강 등으로 이동하였다. 우리답사단이 자싱의 백범 피난처를 찾으니, 피난처 앞 갑판에는 중국인 강태공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조용하던 호숫가가 우리 답사단 때문에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강태공들은 시끄러운걸 싫어한다. 시끄러운 소리에 고기가 도망가기 때문이다. 조용한 동네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우리 답사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국 강태공들은 자신들의 낚싯대가 펼쳐진 자리를 순순히 비켜주며 단체사진을 찍으란다. 중국인 강태공들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모양이다. 먼 데서부터 제 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온 이방인들의
대한민주공화국 시작 101년 독립선언
[회원마당] 대한민주공화국 시작 101년 독립선언 김판수 회원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밝은 세상 함께 사는 독립의 나라’ 우리는 간섭받지 않고 종속되지 않고 굴종하지 않으며 자주 자율 자립 당당한 나라 지켜가면서 우리와 우리 모든 이웃이 불의를 치우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가 존경받고 사는 세상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지난날 자주역량의 부족으로 한반도에서 한겨레가 한말 한글 한역사를 지니고 아기자기 모듬살이 살았던 유구한 역사를 지켜내지 못하고 침략자의 농간에 굴복당한 치욕이 있다. 선린의 신의를 깨고 강도로 돌변한 간악한 침략야욕 막지 못한 굴욕역사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된다. 침략군의 발아래 짓밟힌 강토는 거대한 감옥이었고 나라 잃은 겨레는 노예가 되었는데 비참한 조국과 겨레의 고통을 외면하고 침략자의 앞잡이 주구가 되어 민족을 배신한 부역자가 있었다. 반민족 매국친일 부역자는 해방 후에도 참회없이 죄과를 감추고 버젓하고 잘 살고 반드시 했어야 할 심판도 없었다. 친일부역 매국죄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 않으며 반성과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100년이 지났어도 아직 늦지 않았다. 부역자를 가려내어 엄정하게 심판하여 굴절된 역사 똑바로 잡아서 기미 3·1독립혁명 이제라도 완성해야 완전한 해방 완전한 독립 달성할 수 있다. 분명한 심판과 진정한 참회가 용서화해의 길이고 온겨레 모듬살이 함께 사는 평화의 길이다. 100년 전 독립선언 오늘도 또렷하고 이 땅의 온겨레 깨어서 뭉쳐야 독립나라 세우고 독립나라 지킨다. 2019.4.11. 상해 대한임시정부
기증자료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3월 2일 즈시 미노루 씨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제작된 징병자료인 「조선동포남자호적 및 기류 일제조사」(朝鮮同胞男子 戶籍及寄留 一齊調査) 문서 1점을 기증했다. 3월 3일 오쿠무라 리쓰코 씨가 1988년에 작성된 「지문전사거부·외국인등록법불복종 공동선언」(指紋轉寫拒否·外國人登錄法不服從共同宣言) 문서 1점을 기증했다. 3월 6일 시모지마 요스시케 씨가 ????유골의 전후????(遺骨の戰後) 등 조선인 유골 관련 책자 등 5점을 기증했다. 성정강 회원(도쿄지회) 자료 기증 3월 22일 성정강 회원이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준공,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창립30돌기념 기념품 2점을 기증했다. 이와 함께 조영숙 회원이 「재일동포 2세 노후문제와 3,4세 정체성 확보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제언」 등 의견서를 기증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72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2점 보내와 3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2번째로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자료는 일제강점기 간찰과 청주 관련 상표다. 또한 회고집 <우공이산>(저자 심정섭)도 함께 보내왔다. 3월 1일 적기편집국편집위원회(赤旗編集局編集委員会) 관계자들이 연구소에 방문해서 도서 <전쟁의 진실 戰爭の眞實> 1권과 3.1운동 관련 자료 복사본을 기증했다. 3월 18일 아다치 요코 씨가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1권과 사진집 <戰後はまだ>(전후는 아직) 1권을 기증했다. 3월 18일 가스야 켄이치 씨가 <조선사>(朝鮮史) 선사~조선왕조 1권, 근현대 1권을 기증했다. 3월 19일 김충한 씨가 연구소에 방문해서 토지 기록물인 민유삼림(산야) 약도 등 총 13점을 기증했다. 3월 20일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에서 ‘강제동원진상규명에 관한 뉴스레터’를 기증했다. 3월 25일 화곡본동마을역사연구회 어대식 씨가 <매천야록> 등 도서 5권을 기증했다.
2019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대회 개최
3월 23일 연구소 회원대회가 15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감독기관인 서울시교육청의 요구로 기존 정기총회가 회원대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2018년 사업 및 결산보고, 2019년 사업 및 예산보고가 있었으며,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정관 개정에 대한 의견 수렴 절차도 진행되었다. 또한 홍경표, 이지훈, 정용진 회원이 대전과 광주지역 일제잔재청산에 앞장선 공로로 공로패를 받았다. 지부 모범회원상은 이지현(충남), 임희정(서울서부), 정지현(서울중부), 주하주(광주), 김영수(전북), 하현주(경기동북), 전현탁(부천), 김영진(대전), 김홍수(고양파주), 심경수(안산시흥), 조수연(전남동부), 이강혁(인천), 박규철(경기북부), 이현배(서울동부), 김종국(경기동부) 회원 등에게 돌아갔다. • 편집부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소장자료 톺아보기•3]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한국풍속’ 교죄처분(絞罪處分)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오른쪽 아래에 ‘1909.8.8’로 표시된 소인이 남아 있어서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연구소 소장자료 ‘조선풍속’ 교죄(絞罪)라는 제목을 달고 반복 유통된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조선’이라는 표현은 이 엽서가 경술국치 이후의 시기에 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연구소 소장자료 1994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참고도판은 집단처형지에서 포착된 또 다른 사진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사진아래에 남아있는 ‘글씨 흔적’은 이 사진의 정체를 밝혀줄 새로운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국가보훈처 여느 사람들이라면 똑바로 응시하기도 힘든 처참한 광경을 담아낸 두 장의 사진엽서가 여기에 있다. 열 명 남짓한 죄수들이 집단적으로 교수대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 모습이 자못 섬뜩하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지게들이 주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교수형 집행을 위해 발판용 도구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 이들 엽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래쪽에 각각 ‘한국풍속’과 ‘조선풍속’이라고 시리즈명칭을 다르게 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한국’이냐 ‘조선’이냐 하는 표현은 해당엽서의 제작시점이 1910년 경술국치의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된다. 실제로 ‘한국풍속’으로 표시된 엽서에는 ‘SEOUL, COREA, 1909년 8월 8일자’의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이 붙어있는 것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도저히 풍속이라는 범주에 넣기 어려운 집단처형장면까지 거듭 사진엽서로 제작하여 버젓이 유통시키는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