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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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2]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박광종 선임연구원

1919년 평양 시위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기독교의 장로교와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장로교는 장대현교회 앞마당인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는 광성학교 근처 남산현교회에서, 천도교는 설암리교구당에서 고종의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개최하고 이어서 평양경찰서를 향해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각 시위대는 3시경 평양경찰서 앞에서 모두 합류하였는데 시위행렬과 인근 시민을 모두 합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가와 혈성가를 고창했으며 이후 서문과 평양역으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저녁 7시에 일본군대가 평양경찰서 앞의 군중을 강제로 해산하고 평양시내 곳곳에 군경을 파견해 시위대를 저지,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8시경 숭실대학과 숭실중학 밴드부가 숭실대학 교정에 모여 행진곡을 연주하며 시위대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던 중 일본 군경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평양의 시민과 학생들은 일본군의 저지를 뚫고 밤늦도록 시내각지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평양의 만세운동 시위는 그해 5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시위횟수가 12회나 되고 참가자 수는 3만여 명에 달했다.
3월 만세 시위 때는 숭의여학교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송죽회(松竹會)의 창단 멤버인 박현숙은 평양 남산현교회(감리교)의 유사(有司)를 맡고 있었는데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의 요청을 받고 3·1거사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숭의여학교 3학년 후배들로 이루어진 송죽회 회원들-권기옥, 김순복, 김옥석, 최순덕, 박정인, 한선부 등-을 동원하여 2월 20일경 숭의여학교 기숙사에서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고, 이것을 거사일 전날까지 숭덕학교, 남산현교회, 설암리교구당에 은밀히 옮겨놓았다. 3월 3일에는 송죽회 대원을 중심으로 숭의여학교, 숭실중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 등 남녀 학생들이 숭의여학교 교정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권기옥과 김옥석이 일본경찰에 체포, 투옥되기도 하였다.
한편 그해 10월 1일에도 평양에서 학생시위가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이래로 조선총독부 설치와 함께 조선통치 개시를 기념하기 위해 ‘10월 1일’을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로 삼고 공휴일로 지정, 관공서와 각급 학교에서 기념식과 행사를 거행했다. 시정 9주년이 되는 1919년 10월 1일, 3·1운동의 여파를 우려해 시위운동 예방을 위해 경계 경비를 강화하면서 시정 기념식을 개최토록 하였다. 권기옥, 안맥결 등을 중심으로 한 숭의여학교 상급반 학생들은 비밀리에 모여 시정기념일에 맞춰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행사 당일, 평양 서문여고에서 시정기념식을 개최하기 직전에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등단해 서문여고 학생들에게 식민통치의 폭정을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서문여고 학생들도 이에 동조하여 교문 밖으로 진출, 가두행진을 시작하였으나 급파된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시위가 진압된 후 200여 명의 여학생들이 평양경찰서로 붙잡혀갔는데,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안맥결, 권기옥, 김옥석, 계명선, 서춘자, 김성복, 편성심, 한선부 등이 3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안맥결의 학업과 결백회 활동

안맥결(安麥結)은 1901년 1월 2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림면에서 평범한 기독교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래로는 10살 터울의 여동생 성결이 있다. 아버지 안치호는 도산 안창호의 친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동생의 권유로 기독교 장로회에 입교하여 평생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맥결(麥結)이란 이름은 춘궁기에 결실을 맺는 보리에 비유한 것으로 숙부(叔父)인 안창호가 지어주었다. 안맥결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906년에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로 이사했다. 동진면은 안창호가 1899년에 강서군 최초의 근대적인 사립학교인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세운 곳이다. 동생 안창호의 권유로 안치호 일가는 초림면에서 동진면으로 이사 온 것으로 보인다.

안맥결

 

안맥결은 강제 병합되던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평양의 숭현여학교를 다녔고 1914년부터 2년간 숙부가 창설한 동진면 신양리의 점진학교 보통과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안맥결의 여동생인 성결에 따르면, 점진학교는 “신입생에게 제일 먼저 인사하는 예법을 가르쳤고 우리 고유의 예절을 바탕으로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하게 교육했다.
”고 한다. 점진학교를 나온 후, 1916년 봄 장로교 계통의 숭의여학교에 입학했다. 숭의여학교는 190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공의 실천을 목표로 설립한 여학교로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함양, 민주주의 실천을 교육이념으로 내세웠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교육정책에 입각한 교육령을 공포하여 각급 학교를 정비할 때에도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교육방침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학풍으로 인해 숭의여학교는 송죽회, 결백회(潔白會), 대한애국부인회 등 평양 여성독립운동의 요람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3·1운동을 겪고 난 이듬해인 1920년 초, 안맥결, 권기옥을 비롯한 제11회 숭의여학교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결백회를 조직했다. 결백단, 일편단심회, 절제회라고도 불린다. 송죽회의 민족의식과 항일활동을 계승한 단체로 정직과 검소, 국산품 애용, 금주·금연운동을 표방하며 지방순회강연에도 나섰다. 결백회 내에서도 특히 이영배, 안맥결, 배인수, 손옥련, 허경신 등은 ‘특별기도단’을 결성하여 망명한 애국지사를 은밀히 지원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일례로 1920년 3월 1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결백회 주최로 전도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는데 참석자가 1천여 명에 달했고, 1천여 원의 의연금이 걷혔다. 이에 대해 일제 당국은 결백회가 모은 의연금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1 결백회의 활동은 평남 지역 교회와 각 학교로 파급되어 결백회 지부가 조직되었고 각 단위에서 농촌계몽, 학생자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안맥결은 결백회 활동을 하면서 1924년 봄부터 1학기동안 회령 보통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해 가을, 숙부가 계신 중국 남경으로 향했다.


1 「결백단의 조직 및 의연금 모집에 관한 건」(1920.3.18),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5)』[공훈전자사료관]. 평안남도지사의 보고. “(결백단의) 동기·목적은 표면에서 기독교 전도, 금주 금연을 표방하나 내면에서…..의연 명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걷으려 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어 사찰 중이다. 의연 방법은 교회 안에서 전도 편에, 결백단 강연회 및 음악회를 열고 금연 금주 및 여자 자유권 등을 선전하고 그 자리에서 전도비를 희사받는다.”

 

남경 유학과 흥사단 가입

안맥결 흥사단이력서

 

도산 안창호는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만주방면을 시찰하며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을 위해 답사하던 중 1924년 남경에 머물면서 미주 동포들의 후원금을 받아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세웠다. 1924년 3월 3일에 개학한 동명학원은 중국인들이 교회당으로 사용하던 건물 상층을 빌려 3년 과정의 영어과·중어과와 1년 과정의 대학예비과를 두었다. 구미 또는 중국에 유학하고자 상해와 북경, 남
경 등지로 몰려드는 청년들에게 해외 각 학교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먼저 어학강습소를 설립하여 영어와 중국어를 가르치고 대학예비과정을 교수했던 것이다. 아울러 민족혼을 일깨우는 정신교육과 병식체조와 체력단련을 병행하여 민족국가 건설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더 넓은 세계로 나가 웅지를 펼치고 싶었던 안맥결은 1924년 가을 숙부의 뜻에 따라 남경으로 건너와 동명학원 영어과(3년 과정)에 입학하여 어학공부에 정진하였다. 아울러 숙부가 단장으로 있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에 가입하였다. 1925년 1월 19일 오후 3시 반에 동명학원 강당에서 차리석 부단장의 주례를 거쳐 통상단우(通常團友)로 인정받고 원동위원부 제19반에 편입되었다. 흥사단 자료에 따르면 그해 1월말 상해에서 열린 제11회 원동대회에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안맥결의 흥사단 입단원서에서는 학력, 종교, 단체, 주소변동, 직업, 가족사항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활동 단체에 결백회, 전도회, 면려회라고 기재했는데 결백회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것은 앞서 기술하였다.
이후 동명학원은 남경 사전만(絲轉灣) 40호에 교사를 신축하여 어학보습과정과 예비급의 고등중학과정까지 개설하여 상당수의 청년들을 교육시켜 상해의 인성학교와 더불어 재중 한인의 유력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나 점차 학생 수가 줄어들고 원동위원부가 상해로 이전함에 따라 얼마 못 가서 문을 닫고 만다. 안맥결은 3년간의 어학과정을 끝마치지 못하고 1926년 겨울 “애국자를 만들어내는 공장주가 되라”는 숙부의 가르침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숙부와의 애처로운 재회, 김봉성과 결혼

1935년 2월 안창호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가석방되어 평양으로 내려온 이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이광수, 안창호, 안맥결이다. 흥사단 소장

 

안맥결은 부모님이 계신 강서군 고일리로 돌아와 잠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농사일을 도왔다. 이후 1927년 3월에 흥사단의 조선 지부격인 수양동우회 평양지부에 가입했으며 7월에 중국에서 유학하고 온 학생들의 친목모임인 유중학우구락부(留中學友俱樂部) 발기대회가 서울에서 열리자 여기에 참석했다. 그해 9월 1일에는 강서군 동진면 탄포리교회에서 열린 종교강연회에 나가 ‘무너진 집을 다시 건설하자’라는 제목으로 열변을 토해 청중들로부터 큰 갈채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장래를 두고 고민하던 중 서울에서 유치원교사를 양성하는 중앙보육학교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앙보육학교는 1928년 9월 박희도가 정동 1번지에 설립한 것으로 수업 연한 2년에 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정원 50명을 모집하였다. 안맥결은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가 중앙보육학교에 입학하여 유치원교사 양성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숭의보육원 교사가 되어 어린이 교육에 힘썼다.
1932년 5월 신문지상을 통해 숙부가 상해에서 체포되어 귀국길에 올랐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고 있다는 것이다. 안맥결은 아버지 안치호와 고모 안신호, 조만식, 김동원 등 평양 인사들과 함께 도산을 마중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6월 7일 오전 7시, 도산은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관들과 함께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도산은 23년간 이역만리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54세의 나이로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안맥결은 일본 경찰의 제지로 접견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나마 숙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오멸하고 만다. 도산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4년형을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후 숙부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35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할 때까지 안맥결은 쉬는 날에 빠짐없이 평양에서 서울과 대전으로 올라와 숙부를 면회하고 옷가지와 사식을 넣는 등 옥바라지에 힘썼다. 이때의 상황은 안맥결이 미국에 계신 숙모 이혜련한테 보낸 아래의 서신(1932. 11. 24)에서 잘 나타나 있다.

 

면회할 때에 아버님(안창호를 말함-인용자)께 대한 사회여론을 물으시고 또 미주와 상해 소식, 우리 여러 가족의 소식을 물으시기에 다 사실대로 기쁜 소식 드리니까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세 가지 부탁하셨습니다. 치과의사에게 한번 다시 와달라고 하시고 또는 변호사가 기록한 서류를 속히 보내달라고 하시고 또는 변호사를 공판 날 세울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중략) 그리고 곧 평양으로 와서 유치원 일을 그날부터 계속입니다. 이는 다 나으셨지만 다시 한 번만 보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옷은 조선 솜옷을 입으셨는데 덧저고리까지 입으셨어요. 고로 춥지 않다고 하시는데 보기에도 추운 것 같지 않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12월에야 극히 추운 때니까 견디기 거북하실 것입니다. 저도 갈 때 조선옷을 바지저고리, 주의를 누에고치 익은 솜으로 두어서 할 수 있는 대로 춥지 않도록 해갔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처지에서 안맥결은 1934년 3월 1일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인 김봉성과 평양남문정에 위치한 장로교회당(남문밖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봉성은 1901년 강서군 동진면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선천군 선천읍에 있는 기독교계 중등학교인 신성학교 4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교사 홍성익의 지도로 동급생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했고 3월 1일 선천읍에서 열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해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일본에 건너가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에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교 경제학과를 다녔다. 미국 체류 중인 1931년 1월 시카고시 조선인 기독교 감리파교회에서 흥사단에 입단, 통상단원으로 활동했다. 남캘리포니아대학교를 중퇴하고 1933년 8월에 귀국, 9월에 수양동우회 선천지부에 가입했고, 11월부터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결혼 후 안맥결 부부는 살림집을 친정집에 차렸던 것으로 보인다. 김봉성의 수양동우회 관련 판결문(1940)에 그의 주소가 처갓집 주소인 ‘강서군 고일리 401번지’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편 김봉성은 1933년 11월부터 1935년 1월까지 동아일보 선천지국이 주도한 선천회관 건축공사에 힘을 기울였고 선천회관 낙성식 후에는 동 회관 총무로서 도서관, 유치원, 각종 강습소 개최 등 선천회관의 운영을 도맡았다. 1936년 5월에 안맥결, 김봉성 부부는 수양동우회가 관여하는 점진학교 교사에 임명되어 청소년들의 민족의식 함양에 힘썼다.

수양동우회2사건으로 안맥결 부부 체포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돌입하자, 조선총독부는 지식인과 자본가들에 대한 단속과 회유 포섭을 위해 각종 모임과 단체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일본 경찰이 서울의 수양동우회 사무실을 수색하던 중 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가 제작한,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출한다는 내용이 담긴 인쇄물을 발견하였다. 조사과정에서 그 인쇄물이 수양동우회 전국 35개 지부에 발송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1935년 2월 가석방되어 평양 대보산 자락 송태산장에서 은거하고 있던 안창호를 비롯해 평양, 선천, 해주 등 각지의 수양동우회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업에 들어갔다.
그 마수는 이미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있던 안맥결, 김봉성 부부에게도 뻗쳤다. 11월초 강서경찰서에 의해 체포된 안맥결 부부는 11월 9일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안맥결은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받던 중 만삭인 사실을 감안해 근신과 교사 사직이란 조건을 달아 12월 21일 기소유예로 가석방되었다. 그리고는 12월 29일자로 점진학교 교사에서 해임되었다. 수양동우회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에 대한 예심이 1938년 8월에 있었는데, 체포자 181명 중에서 49명이 기소, 57명이 기소 유예, 75명이 기소 중지되었다.
한편 도산은 1937년 6월 28일 평양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로 이송, 조사를 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고문 수사와 열악한 수감환경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어 12월 24일 병보석으로 출감,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무렵 만삭이던 안맥결은 서울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는 거의 병원에 살다시피 하며 숙부를 극진히 간호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산은 1938년 3월 10일 간경화와 폐렴의 합병증으로 병상에서 향년 6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장지는 도산의 유언대로 제자 유상규의 묘소(망우리 공동묘지) 옆으로 정했다. 그의 장례식은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가족 친지와 수양동우회 회원의 주도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2 1922년 2월 상해에서 돌아온 흥사단원 이광수과 김종덕, 박현환 3명을 중심으로 조직된 수양동맹회가 1926년 1월 평양에 있는 동우구락부와 통합하고 수양동우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29년 11월 다시 동우회로 개칭되었다.

 

김봉성. 1938년 4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안창호 사후에도 수양동우회사건에 대한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다. 1939년 12월 8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김봉성을 포함한 피고 전원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이에 검찰이 상고하여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 2심 재판이 열렸다. 피고 18인에게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 등 실형이 선고되었는데 이때 김봉성에게 2년형이 언도되었다. 1941년 11월 17일에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심이 열려 증거불충분으로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봉성의 석방 이후 해방 직전까지 김봉성과 안맥결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김봉성의 2심과 3심 판결문에 주소지가 각각 ‘경성부 신설정 산13번지 5호’와 ‘경성부 신설정 271번지 4호’로 나와 있어 1940년과 1941년 사이 서울에 거처를 마
련해 생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봉성의 마지막 기록은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 찾을 수 있다.
“1945년 12월 18일 서울 신설동 13번지에서 사망”이다.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1945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나온다. 김봉성은 1919년 선천읍에서 3·1운동을 주도, 일본과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 점진학교 교사를 지내고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민족운동에 진력하다가, 해방된 바로 그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사고사하고 만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자신이 존경하던 도산 선생 묘소 바로 옆에 묻혔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 타계 42년 만에 서훈

경찰 간부로 활동할 때의 모습. 앞줄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안맥결 총경

 

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안맥결 지사의 아들 김대영 씨가 안지사의 건국포장을 대리 수령하고 있다.

 

1945년 12월 남편이 죽은 후 서울에서 2남 1녀를 키우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워 두 아들을 평남 강서군의 친정집에 맡겼다.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가로막혀 이산가족이 되었고 1951년 1.4후퇴 때 고향집에서 여동생 안성결이 두 아들을 데려고 서울로 내려와 다시 합칠 수 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청 경무부는 여자경찰관제도를 설치하고 여자경찰관 간부 지원자 모집 공고를 내고 우익단체의 추천을 받았다. 이때 안맥결을 비롯한 독립촉성부인회 등 우익단체 여성지도자들이 많이 지원하였다. 6월에 간부급 여자경찰관으로 임용된 사람은 독립촉성부인단장 양한나, 안맥결, 고황경, 김용제, 김현숙 등 16명이었다. 이들은 국립경찰학교에서 간부 훈련를 받은 후 그해 7월 경무부 공안국 안에 신설된 여자경찰과(초대 과장 고황경)에 배치되어 여자 경찰관의 지도와 여자에 대한 범죄예방과 풍기 선도를 담당하였다.
한번은 여동생이 안맥결에게 경찰이 된 이유를 묻자, “옛날에는 일본의 경찰이라 우리 애국자의 가족을 못살게 억압했으나, 지금은 해방된 우리나라의 파수꾼이니 신성한 직무가 아닌가”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보듯이 안맥결은 경찰로서의 자부심이 높았으며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952년에는 총경으로 승진하고 3대 서울여자경찰서장에 임명되어 2년간 근무했다. 당시 여자경찰서는 부녀자, 노인, 소녀의 보호, 풍속 업무 등을 담당했다. 1954년 치안국 보안과 여경계장으로 복무했으며, 1957년 경찰전문학교 교수로 발령받아 후배 경찰들에서 한글과 영어를 가르쳤다. 1961년 7월 사직하여 15년간의 경찰생활을 마감했다. 사직 때의 뒷이야기가 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부로부터 정권에 합류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안맥결은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정권에 협력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안맥결은 경찰 재직시 청탁 명목으로 뇌물을 가져오면 돌려보냈고, 직원들에게 항상 청렴과 봉사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성실한 근무자세와 봉사정신으로 인해 1954년 무공포장(여자경찰서장)과 1960년 근정포장(경찰전문학교 교수)를 받았다. 1976년 1월 14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안맥결 지사에 대한 서훈 신청은 유족과 흥사단을 중심으로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나 서훈 요건과 자료 미비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여러 차례 반려되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초부터 경찰청은 산하에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단을 두고 올바른 경찰정신의 뿌리찾기 사업을 벌였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2018년 10월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찰관 5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국가보훈처에 요청했는데, 그 중에 안맥결 지사가 포함되었다. 마침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안맥결 지사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타계 4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안맥결 지사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대로 “애국자를 길러내”는 삶을 살았다.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했으며 해방 후 청렴하고 성실한 삶으로 후배 경찰의 표상이 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강직한 경찰관으로서 살아온 안 지사의 웅혼한 삶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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