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기사
[연합뉴스] 징용피해자 가족, 배상거부 日기업서 문전박대…”끝까지 싸울것”
[기사원문] <2024-03-25> 연합뉴스☞ 징용피해자 가족, 배상거부 日기업서 문전박대…”끝까지 싸울것” ‘제3자 변제’ 방식 해결거부 피해자 유가족 3명, 도쿄 피고 기업본사 방문 일본 기업, “약속 없다”며 면담 거절…요청서 접수도 거부 (도쿄=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제3자 변제’ 해법 수용을 거부한 일제 강제징용 소송 원고 유가족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 피고 기업을 방문했으나 문전박대당했다. 피해자 가족은 일본 피고 기업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징용 피해자 이춘식·양금덕·정창희 씨의 유가족이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 변호인 등과 함께 징용 피고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해 25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마루노우치의 일본제철 본사를 찾았다. ·········<중략>········· 이들은 대법원 판결 결과를 받아들여 배상하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들고 갔지만 일본제철은 이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임 변호사는 “사전에 면담을 요청하고 갔는데도 ‘약속이 없어서 면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또 “피해자 가족이 일본제철에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요청서를 전달하고 싶으니 직접 받아 달라고 했지만, 일본제철 직원은 ‘시간이 없어서 만나러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요청서를 데스크에 접수하면 공식적인 접수로 인정해 줄 수 있냐고도 물었지만 ‘인정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면담을 거부당하고 나온 이 씨는 이런 일본제철의 태도에 대해 “비겁하다.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며 “요청서를 받아줘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아버지는 이 회사 사원으로 있었고 이 건물(일본제철 본사)에도 아버지의 피와 땀이 들어가
[오마이뉴스] 반전에 반전… 친일 군인은 왜 여운형의 지시 받았을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방원철 해방 6개월 뒤인 1946년 2월 11일, 몽양 여운형과 김일성이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틀 전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된 34세의 김일성은 이날 회담에서 남북을 아우르는 민주주의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50세의 여운형에게 개인적 친밀감을 표시했다. 김일성의 발언 내용을 담은 그달 11일 자 ‘조선인민당 위원장 려운형과 한 담화'(<김일성 저작집> 제11권)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과거 산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울 때 선생과 련계를 가지려고 공작원을 파견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하여 유감스럽게도 선생과 련계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예전부터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며 친근히 대했지만, 서울로 귀환한 여운형은 자기를 따르는 청년들 앞에서 김일성의 남침 가능성을 예언했다고 한다.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승환·최창륜과 함께 이 말을 들었다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인 친일파 방원철의 회고에서 그 예언이 언급됐다. 이 회고록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내가 겪은 한국전쟁과 박정희 정부>에 실려 있다. 2021년에 <동방학지> 제197집에 수록된 김선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국가건설기 여운형 그룹의 북한군 창설 과정 참여와 월남’에 인용된 위 회고록에 따르면, 방원철은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민주국가인 미국의 지도하에 있는 남한이 북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며, 북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질 것은 확실한 일이라고 하였다”라고 회고했다. 여운형은 방원철처럼 일본군 경력이 있는 청년들을 이북에 파견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들을 보내 이북의 군대 창설을 돕고 김일성의 남침을 견제한다는 것이
[오마이뉴스] ‘3자변제 거부’ 피해자 자녀들, 일본 전범기업 찾아간다
[기사원문] <2024-03-24> 오마이뉴스☞ ‘3자변제 거부’ 피해자 자녀들, 일본 전범기업 찾아간다 24~26일 도쿄 미쓰비시 등 3사 방문, 사죄 배상 촉구…국회 간담회도 일제 강제동원 관련 윤석열 정부의 ‘제 3자 변제’ 수용을 거부해 온 피해자의 자녀들이 일본 전쟁범죄기업을 직접 찾아 나선다.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한국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의 ‘판결금’ 수령을 거부해 온 원고 4명의 자녀들이 24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원고 이춘식의 장녀 이고운씨, 고 정창희의 장남 정종건씨, 양금덕의 3남 박상운씨 등은 방문 이틀째인 25일 오전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를 차례로 방문한다. ·········<중략>········· 소송 대리인 장완익·김정희·임재성 변호사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과 김정은 사무처장이 동행한다. ·········<상세는 기사원문>········· ※관련기사 ☞광주in: 강제동원 원고 유자녀, 일본기업 직접 방문 ‘사죄·배상’ 촉구한다 ☞KBS뉴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자녀들, 일본서 사죄·촉구 ☞JTBC뉴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강제동원 피해 자녀, 전범기업 직접 간다
[프레시안] 천황옥새 찍힌 731부대 문서들…기둥에 묶어 탄저균 폭탄 생체실험도 했다
[기사원문] <2024-03-23> 프레시안☞ 천황옥새 찍힌 731부대 문서들…기둥에 묶어 탄저균 폭탄 생체실험도 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4]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⑬ [그들은 전쟁 중에 인체실험으로 터득한 혈액의 동결 건조 기술을 사용하여, 가마가사키, 고토부키초와 같은 싸구려 여인숙 거리에서 (부랑자나 실업자들로부터) 혈액을 싸게 사들여 만든 건조 혈액을 미군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한국전쟁 특수는 전쟁범죄 의학자들이 돈벌이하는 기회이기도 했다](노다 마사야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65쪽). 윗글은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평론가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가 일본혈액은행을 비판한 내용이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일본혈액은행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31부대장(군의중장)과 나이토 료이치 전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 교관(군의중좌) 등이 만들었다. 이들은 731부대에서 ‘마루타’ 생체실험으로 인간의 생명을 마구 앗아갔던 엽기적인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돈벌이에 나섰다. 사죄·반성 없는 전범자들 인간의 피를 뽑아 팔고 사는 것은 지난날 빈곤 시대를 떠올리는 음울한 기억이다. 패전 뒤의 일본사회에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은 피를 팔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6.25 한국전쟁을 거친 한국사회도 그랬다).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은 그들의 피를 미군 부상병들에게 팔아 떼돈을 벌었다. ·········<중략>········· 10년 끌다 패소로 막 내린 731 재판 일본은 이른바 ’15년 전쟁'(1931년 만주 침략부터 1945년 패전까지 15년 동안의 전쟁)을 벌이며 숱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문제는 그 악행들에 대해 사과를 받기도 힘들지만, 재판을 통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기란 더더욱 힘들다. 한국의 강제동원과 ‘위안부’ 성노예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민족사랑 2024년 3월호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YTN 탐사보고서 기록] 나카가와와 다카하시
#일제강제동원 #제3자변제안 #전범기업 #역사정의 2024년 1월 25일. 대법원에 4년 넘게 계류 중이던 ‘후지코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이 마무리됐습니다. 일본 도야마에서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지원해 온 나카가와 미유키도 할머니들과 함께 대법원 판결을 지켜봤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간 지 30여 년. 나카가와 미유키 호쿠리쿠 연락회 사무국장의 투쟁은 대법원 승소 판결 이후에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이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카가와는 왜 이 투쟁을 끝낼 수 없는 걸까요? 나카가와의 도야마 집은 호쿠리쿠 연락회 사무실이자 후지코시 강제동원의 역사 자료가 있는 작은 역사관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 운동에 나선 나카가와. 그때부터 모아온 자료와 피해 할머니들의 사진엔 나카가와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도야마에서 만난 나카가와와 호쿠리쿠 연락회 회원들을 통해 가해국민으로서 강제동원 피해를 지원하한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2024년 2월 24일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 나고야에서 온 일본인들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조명한 연극 ‘봉선화’ 공연을 위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이 연극을 기획하고 제작한 사람은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의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입니다. 평범한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다카하시가 일제 강제동원 문제 해결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고야에서 다카하시를 만나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피해자 지원을 지속하는 이유와 연극 ‘봉선화’를 제작한 이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광복 후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마이뉴스] 독립운동가 묘역 앞 엉뚱한 운동장
문재인 정부의 효창공원 재구조화는 왜 성공하지 못했나 김구(38.0%), 안중근(33.4%), 윤봉길(26.3%) 2019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국민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항일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의 1, 2, 3순위 응답을 합한 결과, 응답자들은 위 세 명의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4위 유관순 22.8%, 5위 안창호 12.5%) 공교롭게도 가장 앞서 언급된 3인의 묘역이 모두 용산구 효창공원에 자리해 있다. 해방 후 조성한 첫 순국선열 묘역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한 역사는 1946년 7월 6일로 거슬러 오른다. 지금의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묘역이 이 날 조성됐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실 자리도 함께 마련해 두었다. 해방 후 환국한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조성한 첫 번째 순국선열 묘역이었다. 관련 내용을 보도한 1946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기사 “祖國光復(조국광복)에 바친 세血祭(혈제)”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삼(三)열사의 국민장은 서울의 성지 효창원에서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오세창·이시영·여운형 제씨(諸氏)와 한국민주당·조선공산당·한국독립당·민전·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평·부총·애국부인회·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단체 대표자와 각 정회, 각 학교의 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예하여 하오 1시부터 엄숙히 거행되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조성한 순국선열 묘역인 만큼 당대 유력인사, 제 정당과 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국민장이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948년 9월 임시정부요인 묘역이 조성되어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3인이 자리했고 1949년 7월에는 효창원 조성을 주도했던 백범 김구의 묘역도 이곳에
[오마이뉴스] 이승만에게 고급 저택 제공한 사람의 정체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덕수 이승만은 친일파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됐다. 한민당은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1948년 대통령선거 때 그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준 것도 한민당이다. 김학준 서울대 교수의 기고문인 1985년 2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보호자 없는 한민당, 이승만 손잡아’는 해방 2개월 뒤에 있은 이승만의 귀국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승만은 우선 도오꾜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나흘 밤을 묵으며 맥아더 및 하지와 만난 다음, 10월 16일 맥아더가 내어준 미 군용기 편으로 만 32년 만의 해외망명 생활을 청산하면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때 그는 만 70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하지가 마련해놓은 숙소인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한민당은 즉각 그의 정치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귀국해서 여장을 풀자마자 한민당은 돈부터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3년 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배신으로 사이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분명히 동맹자 관계였다. 이승만은 한민당을 배신한 뒤에도 친일세력에 대한 답례만큼은 톡톡히 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경찰력을 동원해 탄압함으로써 친일청산을 무력화시켰다. 이를 통해 친일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게 됐으니, 이승만의 행위는 이완용의 친일에 못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청년, 친일파로 전향하다 이승만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대표적 인물은 한민당 지도자이자 호남 재벌인 인촌 김성수다. 김성수만큼은 아니지만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 또 다른 한민당 지도자는 장덕수다. ‘이승만 자택’ 혹은 ‘이승만
[오마이뉴스] “송현광장에 이승만기념관? 광주 금남로에 전두환기념관 짓는 것”
[현장] 15개 역사단체 송현광장앞 기자회견… 서울시는 “공식제안한 바 없다” 진화나서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거론한 서울 송현광장에 시민단체들이 모여 기념관 건립을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4.19를 촉발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함께 송현광장을 시민의 공간으로 지키겠다던 약속을 1년 새 뒤엎은 오세훈 서울시장을 직격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등 15개 단체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 녹지광장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윤석열 정부는 헌법을 부정하고 국격을 훼손하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즉각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은 이승만 하야를 끌어낸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 64주년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은 오 시장이 지난해 송현광장에 ‘이건희 미술관’ 외에 다른 시설물을 짓지 않겠다고 한 발언을 뒤집은 데 따른 것이다. 오 시장은 지난달 23일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 부지로) 현재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데가 송현동 공원”이라고 밝혔다. 오 시장은 또 “이승만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것이 공론화 혹은 공감대 형성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최근 영화 <건국전쟁>이 흥행하자 서울시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말을 바꾼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건국전쟁>은 이승만이 독재를 하지 않았고 단지 장기집권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피의 독재자 기념하냐”… “오세훈 시장 발언 거둬들여야” 기자회견 발언자로 나선 강현우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서울대교구 총무)는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이승만을 재평가하겠다며 공만 내세우고 과를 숨기며 심지어 과를 공으로
[오마이뉴스] 3.15의거 기념일 맞아 ‘이승만기념관 반대’ 목소리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 성명, 민족문제연구소 등도 입장 발표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에 업은 독재자. 친일파 경찰 박종표에 의해 잔인하게 희생된 김주열 열사. 3‧15의거 정신으로 독재와 친일 잔재 심판할 것이다.” “이승만의 수많은 죄상을 일일이 열거할 겨를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분명한 점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헌법을 여러 차례 유린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된 3‧15의거 64주년을 맞아 15일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민족문제연구소 등 단체가 각각 낸 입장이다. “현대판 친일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는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일, 영구집권의 탐욕을 이기지 못한 독재자 이승만은 온갖 비열한 술수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라며 “청년학생을 비롯한 압도적 다수의 시민이 부정부패로 가득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위대한 항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64년 전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때 청년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사망해 참혹한 그 시신이 유기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이런 일을 자행한 주범은 친일경찰 박종표”라며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친일경찰이 해방 후 민주화운동에 앞장 선 청년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이다. 이런 친일파가 이승만 독재정권의 기반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근래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이승만을 미화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가 개봉해 오랜 시간 극장 스크린을 차지하고 있고, ‘이토 히로부미 인재’의 황당한 주장이 현직 국회의원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라며 “이는 작년에 일어났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투사 흉상을 훼손하려는 심각한 움직임과 잇닿아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현상은 뉴라이트라는 조직된 세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