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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염상(鹽商)’ 최병희(崔炳熙) 삶의 명과 암
일제강점기 소금무역을 통해 부를 쌓아 지역에서 일제에 적극 조력하다
박종선 부천지역위원장
1935년 10월 14일 부천군 소사역(현 부천역) 부근에서는 진흥관(振興館) 개관식이 성대히 열렸다. 일제의 식민 침탈과 식량 수탈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소사(素砂)에 극장뿐만 아니라 공동회의와 집회를 진행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진흥관을 만들 수 있도록 비용을 댄 사람이 최병희(崔炳熙)였다. 이 당시 진흥관을 만드는데 15,000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고하는데 그렇다면 최병희는 그 당시 부천에서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거대한 금액을 낼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지역의 유지였던 최병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최병희의 생애
최병희는 함경북도 경성군 오촌면 출신으로 1891년에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일찍 부모와 함께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하였다. 어렵게 학업을 이어갔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상업에 일찍 뛰어들었으며, 1910년대 최병희가 뛰어든 인천의 상업계는 이미 일본인 거상들에게 잠식되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1913년 모회사 외교원으로 입사하여 장사를 할 수 있는 밑천 자금 3-400원을 모았으며, 1918년 소규모의 중국소금 수입상점을 인천 지나정에 열었다.
하지만 일본대상과의 경쟁에서 밀려 실패하였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 상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을 준비하는 동시에 중국인들과 직접 무역을 하기 위해 중국어를 집중 연구하였다. 1923년이 되어 중국 상인들에게 신용을 얻어 성공을 할 수 있었으며 이때 이미 10만 원의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중국 지부항의 유명한 무역상 덕표창과 거래를 하였고, 청도 소금을 수입하고 우리나라 미곡을 수출하였다. 1920년대에 인천역전에 공신상회(共信商會)를 개업해 염류 판매 및 위탁매매를 하는 동시에 운송업을 겸영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인천부 해안정에서 동순공사(同順公司)라는 무역상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1922년 인천염업조합이 창립되었을 때 최병희는 상무이사로 참여하였으며, 1929년에는 인천상업회의소 평의원에 당선되었다. 소금 무역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상업 활동을 왕성히 했다. 하지만 최병희의 집은 인천이 아닌 부천 소사 심곡리에 있었다. 이로 인해 부천에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다양한 지역활동을 하였다.
부천 소사에서의 활동
최병희가 부천에서 가장 먼저 참여한 활동이 바로 계남면(소사면, 소사읍으로 개칭) 면협의원이었다. 최병희는 소사에서 면협의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었으며, 1923년·1931년·1939년·1943년 등 총 4회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소사에서는 총 5번의 면협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최병희가 4번을 역임하였으니 최장수 면협의원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33년 경기도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탈락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창씨개명하여 고산병희(高山炳熙)로 활동하였다.
면협의원들이 임원으로 참여하는 기업이 다수 존재하였다. 소사금융조합, 소사산업조합, 소사계리 등이 대표적이다. 최병희는 소사계리에 취제역으로 수등정웅, 이성환 등과 함께 취제역으로 참여하였다. 소사계리는 가축과 비료 등의 자금을 융통하고, 농산물을 위탁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회사였다.
최병희는 소금 무역을 통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사에서 농지를 많이 소유한 지주가 되었다. 그 당시 소사에서는 부평수리조합의 과도한 수세와 조합비로 고리대가 성행하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될때는 신부정웅과 함께 [상리갱생조합]을 창립하여 채권 1/3을 탕감케했으며, 1939년에는 소작료를 6할에서 5할로 내려받기도 하였다. (중략)
소사체육회가 1937년 7월 24일 창립되었다. 최병희는 원영상, 이성환, 신부정웅, 수등정웅, 천야육사랑, 중원경덕, 김응석 등과 함께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소사에서의 친일행위
첫번째, 소사신사 봉고제 기부. 일제는 중일전쟁 3년을 맞이하여 내선일체와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만들기 위해 소사신사에서 신역조영(神域造營)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사 신역 영조물을 4천원 예산으로 봉조하는 봉고제를 1939년 5월 9일 진행하였다. 이 봉고제에 최병희는 300원을 기부하였다. 이외에도 한다농장이 1370원, 소림간산이 683원, 신부정웅이 200원 등을 냈다고 하니 최병희가 3번째로 가장 많은 돈을 낸 셈이다.
두번째, 친일광고. 소금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쌓은 최병희의 친일 행위 중 상당량은 친일광고에 있었다. 1928년 4월 29일 『경성일보』에 일왕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봉축천장절>을 광고하였으며, 1938년 1월 1일 『조선신문』에는 <근영 국위선양의 봄>이라는 광고를 하였다. 동년 1월 3일 『경성일보』에는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광고를 하였으며, 동년 4월 2일 『경성일보』에는 <축 조선교육령개정 육군특별지원병제실시> 광고를 하였다. 이러한 광고는 모두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동의하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최병희의 삶을 보면 일제강점기 부천 소사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부평수리조합 설치, 조선 자작농의 몰락과 일본 자본의 농촌경제 침탈, 1930년대 일제의 침략전쟁과 강제동원정책, 소사신사를 중심으로 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등 서울에서 거물 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친일행위가 지역에서도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오마이뉴스> 202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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