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2]
기꺼이 천황을 위해 죽기를 반복 세뇌한 ‘황국신민의 서사’
전국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황국신민서사비의 흔적들
이순우 특임연구원
독립기념관, 서산 나라사랑공원, 당진 면천읍성, 대전 한밭교육박물관, 대전여자고등학교, 대전유성초등학교, 세종연남초등학교, 연기향토박물관, 옥천 정지용문학관, 보령문화의전당, 대구 현풍초등학교, 광주 금선사(송정신사 터), 해남 해창주조장 등등…….
여기에 나열한 것은 전국 각 지역에 걸쳐 현재까지 ‘황국신민서사비’의 흔적들이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는 장소들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들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드러나는 바람에 옛 모습 그대로 잔존한 경우도 있고, 또 여기에는 ‘해방기념비’라거나 혹은 ‘독립기념비’ 등의 형태로 둔갑하여 재활용한 형태로 남아 있는 사례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황국신민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황국신민의 서사(皇國臣民の誓詞)’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의 개시로 전시체제기가 본격 도래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37년 10월 5일자에 실린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전조선(全朝鮮)의 학교, 청년단, 소년단에서 사용토록, 학무국(學務局)에서 각도지사(各道知事)에 통첩(通牒)」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미나미 총독(南總督)의 반도시정 중 교육체제의 근간이 되는 ‘황국신민의 조성(造成)’에 관하여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시국극복과 함께 더욱 일본정신의 철저발양에 매진하기로 되어 반도 신민중으로 하여금 항상 “우리는 일본인민이다”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여 언제나 이를 잊지 않도록 전조선의 학교, 청년단, 소년단, 기타 각종 단체에서 적어도 다수인이 회합하는 때에는 일동이 합창하여 그 정신을 전지에 피력시키기 위해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작성하여 지난 2일 미나미 총독의 결재를 거쳐 곧 각도지사에게 통첩을 띄웠다. 서사는 소년용과 청년 이상용의 2부에 나누어 자못 간단 명쾌한 글로써 작성하여 첫째 제국신민의 신념과 둘째로는 내선일체, 동포상애의 강조, 셋째로는 근로단련과 일본국가로서 세계에 대한 적극적 활동을 표증한 제국신민의 전수의 세 가지로 결정시킨 것인데, 초등학교에서는 매일 조회(朝會)에 이를 합창하고 일반단체도 모든 회합에 이를 합창하게 할 터이라는데 학무국에서는 곧 이를 인쇄하여 전조선에 배부하기로 되었다.

이는 곧 일제패망기에 이르도록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옥죄었던 바로 그 ‘황국신민서사’의 첫 등장을 알리는 기사였던 것이다. 서사의 내용 그 자체는 거창한 구호로 채워져 있지만, 실상은 이를 요약하자면 “조선인 역시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정신과 육체를 갈고 닦아서 일단유사시(一旦有事時, 일조유사시)에 천황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던져야 한다”는 얘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황국신민서사의 제정에 따라 조선총독부에서는 그 내용을 널리 보급하도록 별도 인쇄한 ‘카드’를 제작하여 전국 각처에 일제히 배포하기도 하였고, 각종 학교, 청년단, 기타 단체들에서 집회가 있거나 조회(朝會) 또는 의례절차가 있다면 그때마다 이를 낭창(朗唱)하도록 했다. 또한 그 당시의 신문지상에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황국신민서사가 내지(內地, 일본)에서도 큰 호응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여러 차례 등장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산 기슭에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 1939년 11월 24일 제막)’가 들어서게 되자, 이내 이곳은 수학여행을 오거나 여러 학교나 일반단체들에서 조선신궁을 참배할 때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필수코스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조선신궁 구내의 한쪽에 세워진 이 거대 조형물은 원래 1938년 5월 18일에 개최된 제16회 조선교육회 대의원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교육령 개정(朝鮮敎育令 改正, 1938년 4월 1일 시행)’의 실현을 영구히 기리고자 하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일본 조각계의 거물이던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1910~1964)의 도안과 설계에 의해 제작된 ‘황국신민서사탑(전체 높이 16.67미터, 밑면 가로 25.5미터, 밑면 세로 10.02미터)’에는 그 전면 상단에 ‘국가(國歌, 기미가요)를 연주하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연주 장면’이 묘사된 대형 청동판(길이 8.18미터, 높이 2.12미터)이 부착되었고, 그 위로는 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라고 새긴 돌기둥이 올려져있었다.
또한 전면 아래쪽 기둥 내부의 중앙 벽면에는 도쿄의 궁성 이중교(二重橋, 니쥬바시)를 청동조각으로 새겼고, 그 양측에는 황국신민의 서사 기1(其一)과 기2(其二)를 나란히 배치한 모양이었는데, 이곳의 바로 안쪽 자리에는 ─ 조선 전역의 5천여 학교에 재학하는 거의 모든 학생, 생도, 아동들이 일일이 한 장씩 썼다는 ─ 140여 만 매(枚)에 달하는 황국신민서사 필사용지를 봉납하는 공간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서사탑의 후면에는 조선교육회장(朝鮮敎育會長)이자 정무총감(政務總監)이던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가 직접 짓고 쓴 ‘황국신민서사지주의 기(記)’를 새겨놓은 돌판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황국신민서사탑이 제막되면서 ─ 총독부 학무국장의 통첩을 통해 ─ 누구라도 이곳을 찾을 때는 각별하고 엄숙한 주의와 절차를 지키도록 하였는데, 『조선일보』 1939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황국신민 서사주(皇國臣民 誓詞柱), 참배시(參拜時)의 주의(注意), 전조선 각학교(全朝鮮 各學校)에 통첩(通牒)」 제하의 기사에는 그러한 내용이 이렇게 적시되어 있다.
조선신궁 경내에 서 있는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는 조선학도의 적성의 상징이며 조선교학의 표주(標柱)로서 영원히 신궁에 봉납한 것인데 학교 교직원, 학생생도와 소학아동들이 단체나 개인으로 기둥 앞에 설 때에는 경건한 태도로 대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키도록 6일 학무국장으로부터 각 도지사, 대학, 전문학교, 관립학교장에 통첩하였다.
▲ 단체인 때에는 ① 기둥 정면에 있는 궁성조각에 면대하여 궁성에 최경례를 할 것, ②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할 것, ③ 창가 ‘우미유까바(海行かば; 바다에 가면)’를 합창할 것.
▲ 개인은 궁성에 대하여 최경례를 하고 목소리를 내든지 안 내든지 서사의 뜻을 마음속에서 외어 충성봉공의 생각을 새로이 할 것.
이 황국신민서사의 기둥 부근 지역은 항상 깨끗이 하여야 되므로 시내 각 학생, 생도, 아동이 돌아가며 청소봉사를 할 계획이 진행중이다.
한편, 조선신궁 경내에 들어서는 황국신민서사탑의 조성공사는 그 자체로 이를 본떠 만든 관련 기념물들이 ─ 저마다 모양도 다르고, 만들어진 재질(材質)도 제각각이었지만 ─ 조선 전역에서 속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처의 학교교정이나 신명신사(神明神祠, 신메이신시) 구내에는 ‘조선교육령의 개정’과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공포’를 기린다거나 이른바 ‘황기(皇紀)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삼아 조성한 ─ ‘무슨 탑(塔)’이라거나 ‘무슨 비(碑)’라거나 ‘주(柱, 기둥)’라거나 ‘단(壇)’이라거나 그것의 이름을 무엇으로 불렀던 간에 ─ 황국신민서사와 관련한 기념물이 광범위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그 시기가 가장 빨랐던 ─ 더구나 조선교육회에서 결정한 황국신민서사탑의 건립계획보다도 더 빨랐던 ─ 것으로는 개성궁정소학교(開城宮町小學校, 옛 개성제3공립보통학교)의 사례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8년 5월 1일자에 수록된 「개성궁정소교 황국신민서사비(皇國臣民誓詞碑), 천장가신(天長佳辰)에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개성(開城)] 제2국민(第二國民)에게 국가관념(國家觀念)을 철저 인식시키며 비상시국(非常時局)에 대처할 각오를 확호(確乎)히 함에는 ‘황국신민서사’의 정신을 주입하여야 하겠기 개성궁정공립심상소학교에서는 이 서사를 석비(石碑)에 조각하여 교정(校庭)에 건립하고자 마스야마 교장(增山校長) 이하 각 교원과 천여 아동(兒童)이 영세(零細)한 성금(誠金)을 헌납(獻納)하였던 바 수(遂)히 29일 천장절(天長節)의 가신(佳辰)을 복(卜)하여 송 부윤(宋府尹)의 임석하(臨席下)에 엄숙한 건비식(建碑式)을 거행하였는바 동 교정에 흘립(屹立)한 동비(同碑)는 조석(朝夕)으로 천여 아동에게 무언(無言)의 교훈(敎訓)과 감화(感化)를 여(與)하리라 하여 아동교육상(兒童敎育上) 다대한 효과를 기대한다 하며 동 비문의 휘호(揮毫)는 미나미 총독(南總督)의 친필(親筆)이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약간 특이한 사례로는 함경남도 함주군에 자리한 오로심상소학교(五老尋常小學校)에 세워진 ‘황국신민서사창창지지의 비(皇國臣民誓詞創唱之地の碑)’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창창(創唱)’은 “처음(최초)으로 불렀다”는 뜻인데, 『경성일보』 1938년 10월 26일자에 수록된 「황국신민의 서사, 이곳에서 제일성(第一聲), 오로교정(五老校庭)에 기념비(記念碑), 미나미 총독(南總督)의 휘호(揮毫) 비친다」 제하의 기사에는 그 내막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함흥(咸興)] 함남 함주군 오로심상소학교 교정에 건조중(建造中)인 황국신민서사 창창지지의 비는 이 무렵 사진과 같이 멋지게 완성되어 29일 제막식(除幕式)을 거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비는 작년(昨年) 10월 5일 미나미 총독(南總督)이 함남순시(咸南巡視) 때 동교 직원 아동을 교정(校庭)에 모아놓고
“금회(今回) 총독부에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制定)하여, 다분(多分, 십중팔구) 오늘쯤 경성(京城)에서 발표(發表)가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지금 총독(總督)이 일구(一句) 선창(先唱)할 테니 모두 여기에 적어서 ……”
라고 음토낭랑(音吐朗朗)하게 북선(北鮮)의 일각(一角)에서 창창(創唱)의 제일성(第一聲)을 울렸던 기념(記念)의 지(地, 장소)로 근속(勤續) 20여 년의 야마구치 교장(山口校長)이 부형(父兄), 직원(職員), 아동(兒童)을 총동원(總動員)하여 1천여 원(圓)의 공비(工費)를 던져 건설했던 것이며, 제자(題字)와 더불어 황국신민의 서사 그 일(その一)은 미나미 총독의 휘호에 따라 금니(金泥) 찬란한 근사한 결과물이 되었고, 초석(礎石)에는 야마구치 교장 스스로가 붓을 들어 ‘창창의 유래(創唱の由來)’를 분명히 내놓고 있다. [사진은 기념비]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간 지도 어느덧 80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껏 이러한 자취들이 각처에서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이와 같은 기념물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관념을 억지로 주입하려 했던 시도가 일제에 의해 얼마나 집요하게 행해졌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현재까지 잔존수량이 확인된 경우를 통틀어, 이들 가운데 황국신민서사비를 조성할 당시의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충남 대전에 있던 ‘대동공립고등여학교(大東公立高等女學校, 옛 대전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사례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황국신민서사주(皇國臣民誓詞柱), 대동여교(大東女校)서 제막식(除幕式), 19일 교정(校庭)에서 성대(盛大)히 거행(擧行)」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대전(大田)] 대전부(大田府) 대동여학교(大東女學校)에서는 19일 오전 9시 반 동 교정(同校庭)에서 나카무라 학무과장(中村 學務課長)을 비롯하여 관민, 학부형 다수 참렬하에 황국신민서사주 제막식을 거행하였는데, 정각(定刻) 개회사(開會辭)가 있자 일동(一同)은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고 이오카 교장(飯岡 校長)의 인사(人事)와 동교 후원회장(後援會長) 방두환(方斗煥) 씨의 인사도 있었고, 일동은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송(齊誦)하고 만세봉창(萬歲奉唱)으로서 동(同) 10시 반 폐식(閉式)하고, 이어 부형모자회(父兄母姉會)를 개최하고 수업참관(授業參觀)을 마친 후 회의(會議)에 들어 이오카 교장의 인사, 후지타 교유(藤田 敎諭)의 교육방침 (敎育方針)에 대한 설명(說明)이 있고, 학부형들의 질문(質問)이 있은 후 오후 3시 반 산회(散會)하였다.
그런데 지난 2019년 5월에 대전여자고등학교(대동고녀의 후신)의 신축공사장에서 화단 속에 엎어진 상태로 묻혀 있던 ‘황국신민서사비’가 발견되어 이에 관한 소식이 몇 차례 신문지면을 장식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이후 한때 이 비석의 보존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으나, 결국 2023년 2월 이후 운동장 한쪽에 그대로 눕혀둔 채 이를 일제침탈사의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토록 결정된 바 있다.
해방이 되고 서울 남산 조선신궁 터의 한쪽에 여전히 남아 있던 황국신민서사지주가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진 것은 1947년 7월의 일이었다. 『경향신문』 1947년 7월 17일자에 수록된 「황민서사탑(皇民誓詞塔) 파괴(破壞)」 제하의 기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 속에 들어있던 수십만 장의 서사 필사본이 모두 마포형무소로 옮겨져 재생종이의 원료로 사용되었다는 흥미로운 얘기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시내 각처의 ‘도리이(鳥居)’와 소위 황국신민서사탑이 무너진다. 6월 30일부터 시내 57개소의 ‘도리이’ 파괴공사를 시작하여 늦어도 초가을까지는 전부 파괴하리라는 바 조선서 제일 큰 남산(南山)의 ‘도리이’도 7월 3일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전국 초중등 생도와 직원들로부터 각 10전씩을 징수하여 건설한 ‘황국신민서사탑’도 장마가 끝나는 대로 파괴하리라는 바 이에 앞서 그 속에 깊이 보관하였던 수십만의 서사(誓詞) 종이는 지난 5일 마포(麻浦)형무소로 운반하여 재생시키고 있다 한다. 비록 시기는 늦었으나 보기 싫던 이 따위 물건이 우리 눈앞에서 없어진 것만은 유쾌한 일이다.

이렇게 사라졌던 황국신민서사지주의 존재는 지난 2009년에 이르러 서울 성곽(회현지구) 발굴조사(2009.6.1~7.29)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유구가 노출되면서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에 이른다. 그 이후 이 자리에는 서울도성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지금은 ‘황국신민서사지주 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 동판 하나가 설치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곳과 마찬가지 전국 각 지역에 만들어졌던 황국신민서사와 관련한 기념물들은 ─ 그중에 더러 ‘해방기념비’나 ‘독립기념비’로 전환된 경우도 있긴 했지만 ─ 대개는 해방과 더불어 매몰처리되는 수순을 밟았다. 따라서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라기보다는 그저 우리들의 눈에서만 보이지 않게 처리된 것이므로, 앞으로도 언젠가는 땅속에 묻혀 있던 것들이 다시 드러나 그 시절의 속박과 고통을 곱씹어야 봐야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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