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열사(烈士)의 후예(後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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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열사(烈士)의 후예(後裔)들

지난[1959년] 11월 12일 “순국선열유족회”가 그들 유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232선열의 유족들이 뭉쳐 서로 도와 나가자는 모임인 것이다. 경향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유족들 가운데는 세상에 알려져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대로 파묻혀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조국 광복을 얻기 위하여 피로써 싸워온 조상의 영광을 간직한 그들에게는 있을 법도 한 ‘특권’이 시대사조에 희생당하고있는 것이다. 이에 몇 유족들 가정을 찾아 그들의 근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 동아일보 편집자

① 이준 선생 따님 이종숙 여사

시내 사직동 262의 36에 있는 조촐한 2층 양옥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이준 열사 따님 이종숙(李鍾肅) 여사는 ‘따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색할 정도로 얼굴에 주름이 흔한 진갑이 지난 할머니(64세)였다.

“그때 내 나이 12세 양원(養源)학교 3학년이었지요. 헤이그로 가셨는지 어디로 가셨는지 전혀 집에서는 알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글쎄 7월 14일 멀리 이국땅에서 자결하셨다는구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15일 하오 2시경이었는데 전보를 받아든 어머니는 하도 놀라서 그때부터 심장병을 얻어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지요.”

고종 황제의 밀사로 멀리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서 왜제(倭帝)의 도적행위를 규탄하고 스스로 배를 갈라 창자를 ‘독립의 거름’으로 뿌린 이준 열사의 ‘역사적 장거’를 이 외동따님은 반세기 전의 가물가물한 감회를 섞어 띄엄띄엄 이렇게 회상해 나갔다.

선친의 비보를 받은 지 3년 후에 모친은 성묘라도 하여볼 셈으로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나온 오빠 이용(李鏞) 씨를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있다는 이상설(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로 갔던 밀사) 씨를 찾아갔었는데 그분마저 못 만나고 2년 만에 ‘일락장사추색원(日落長沙秋色遠), 부지하처조상군(不知何處弔喪君)’ 하는 시 한 수를 지어가지고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좀더 심해진 심장병으로 옷깃이 발랑발랑 떨리던 것을 기억한다고도 했다.

지금도 천도교 본부 자리에 있었던 양원학교를 마치자 오빠마저 중국의 군관학교로 가버리고 외가살이를 할 수밖에 없던 종숙 할머니는 그 나이답지 않게 홀로 일본여자대학으로 유학하게 되었으며 그때 같은 유학생이던 고고학자 유자후(柳子厚) 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사이에 외동딸 성천(星天. 32) 씨를 얻어 남편의 학자생활 속에 묻혀 연륜을 늘려왔다고 한다.

그래도 오손도손 알뜰하던 살림이 6.25 사변으로 남편과 함께 많은 재물을 북녘으로 빼앗긴 다음에는 그저 딸자식 기르는데 낙을 붙여 살았다고 하며 혼자 힘으로 딸을 미국 유학까지 시켰고 작년에는 사위(「코리안 리퍼블릭」 편집국장인 李揆現 씨)를 보아 함께 살고 있으나 어쩐지 슬하가 쓸쓸한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버렸다고 아쉽게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허나 종숙 할머니는 학벌로 보나 집안으로 보나 평범하다고만 할 수 없는 이력이 있다.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영감(유자후 씨)은 골동품만을 좋다고 열중해있을 때…” 하고 벽에 둘린 선반 위의 옛 사기그릇을 둘러본 다음 “나는 글씨를 썼지요. 서예공부를 했다는 말입니다.”고 수줍은 듯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 굴지의 명필로 이름있는 손재형(孫在馨) 씨와 김돈희(金敦熙) 선생의 문하생 동기였고 일제 때는 선전(鮮殿) 등에서 특선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며칠 뒤에 오시면 그때 글씨를 직접 보여줄 수도 있다”고 옆에 있던 딸 성천 씨가 응원하는 걸 듣지 않더라도 분명히 ‘평범한 할머니’라고만 할 수 없는 기품을 느끼게 했다. 화제를 바꿔 다시 이준 열사에게로 이야기를 옮겨보았다.

지난봄에 사위가 영국 갔다올 때 헤이그에 들러서 묘지 사진을 찍어 왔는데 보니까 “공동묘지지만 묘지 관리인이 대뜸 태극기를 들고 성묘를 안내할 정도이라니 우리네 공원보다 낫지 않나요” 하고 쓸쓸히 웃고나선 “요즘 선친의 묘지를 이장하느니 해가지고 협잡하는 자들이 많다는 게 무엇보다 분하다”고 표정을 도사리면서 선친의 유해를 남의 나라에 그냥 두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이런 혼란 속에 모셔오기도 송구스러워서 남북 통일된 다음에나 모셔오면 한다”고 말하고 지금은 이북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사도 모른다는 오빠 이용 씨의 근황이 알고싶다고 노인다운 말을 한다.

허나 하직하려는 기자에게 종숙 할머니는 열사의 따님다운 말씀을 잊지 않았다.

“요즘 청년들은 기가 죽은 것 같아… 선친은 나라를 잃은 속에서도 강렬한 의지만은 잃지 않았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내 나라 안에서 왜들 죽어서 사는지…”

이준 열사 자신의 말씀과도 같은 엄숙한 교훈으로 들렸다.(『동아일보』 1959.11.23)

② 안창호 선생 질녀 안맥결 여사

도산 선생의 직계 후예는 고스란히 미국에서 살고 있다. 부인 이혜련(李惠蓮) 여사를 비롯해서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장남 필립(必立) 씨, 차남 필선(必鮮) 씨, 삼남 필영 씨 그리고 수산(繡山) 수라(繡羅) 두 딸이 모두 반(半) 미국인이 되었다. 장남은 헐리우드 배우이고, 차남은 공군성에, 삼남은 해군성에 그리고 두 따님은 각각 그곳 관리들에게 출가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질녀(姪女)가 되는 안맥결(安麥結) 여사를 찾을 때는 좀 주춤하는 기분도 없지 않았으나 “작은아버지의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줄곧 미국에서 살고있는 숙모나 사촌들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며 임종까지 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실감나는 일화들이 많았다.

가령 언젠가는 분명히 기억 못하나 몹시 추웠던 어느 날 아침 흰 가마를 타고 쉬쉬하면서 떠나간 일이 있는데 안창호 선생의 첫 도미행(渡美行)이었다는 이야기라든가, 또 도산 선생은 청결벽이 있어서 늘 먼지 묻은 곳을 찾아 꾸짖는가 하면 어떤 때는 솥이 있는 대로 물을 끓여서 동네 아이들을 모두 모아서 목욕을 시키곤 했다는 이야기라는가, 미국 갔다가 처음 귀국했을 때 양복을 입고 나귀를 타고 형인 안치호(安致浩. 안맥결 아버지) 씨에게 인사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양복 구경을 했으며 벗어둔 구두를 보고선 무섭다고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라든가 등등 모든 이야기가 ‘선각자 도산’의 풍모를 실감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시내 보문 6가 145에 있는 나지막한 양철 고가에서 만난 안여사는 나이 59세로 ‘할머니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경찰전문학교의 ‘초급영어’ 및 ‘한글’ 교수다. 허리를 다치기 전에는 치안국 여경계장을 지낸 총경급 경관이다. 물론 3남매(대학 다니는 아들 둘과 창덕고녀 다니는 딸)의 어머니로 그냥 부엌일만 보기에는 넘쳐나는 이력들이 많기도 하고 또 남편을 일찍이 여윈 관계로 사회활동이 오히려 집안일보다 손에 익숙한 할머니가 되어있는 것이다.

일찍이 평양 숭의여중을 나와(당시 국회의원으로 있는 朴賢淑 여사가 선생으로 있었다고 함) 작은아버지 도산 선생을 찾아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일이 있다는 안여사는 24세 때에 도산 선생의 주선으로 남경에서 동명학교라는 영어학교를 다니기도 하였으며 한때 결혼도 않고 “애국자를 만들어내는 공장주가 돼라”는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서울로 와서 중앙보육학교를 끝내고 보모 노릇도 한 엄청난 ‘신여성’이었다.

사회활동을 해본 할머니답게 안여사는 지나칠 정도로 이야기를 깔끔하게 들려주었는데 특히 도산 선생이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다시 대전형무소로 옮겨져서 고초를 당했을 당시에는 평양 숭의보육원에 있으면서 휴일마다 면회를 다녔고, 겨울에 쉬는 때에는 날마다 사식을 넣느라고 애를 썼다는 이야기와 12월 삭풍이 몰아치는 날 보석이 되어 대학병원에 누워있는데도 형사가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으며, 임종한 3월 10일에는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 등등은 ‘애국하는 마음’에 앞서서 ‘작은아버지를 따르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날 만나지는 못했지만 도산 선생은 또 한 사람의 질녀를 가지고 있는데 이름은 안성결(安聖結. 맥결 할머니 친자매) 씨, 40세의 처녀라고 한다. 1·4 후퇴 때 평남 대동군 대보산에 있는 도산 선생의 정자 송태정(松苔亭)에서 피난온 후 맥결 할머니랑 함께 살았었는데 달포쯤 전에 안암동으로 살림을 났다고 한다. 지금은 교통사고로 다쳐서 누워있지만 후생주택도 마련하고 그것을 세를 주어 살아간다고 한다.(『동아일보』 1959.11.24)

③ 유관순 양의 오빠 유우석 씨

자동차도 잘 못 들어가는 ‘아리랑고개’ 뒤편에 건평 7평의 납작한 약식 기와집(정릉 1동 604의 160)의 주인 유우석(柳愚錫) 씨는 벌써 60세가 되는 노인이지만 첫눈에 사진에서 보는 유관순 양의 모습과 비슷한 용모를 읽을 수가 있었다.

처녀로 순국한 유관순 양의 경우 — 유우석 씨는 엄밀한 의미에서 ‘후예’가 아니라는 생각도 퍼뜩 들었지만… 그는 유관순 양 오빠일 뿐 아니라 역시 ‘국정선열’로 등록되어있는 유원희(柳元熙) 씨와 이소제(李少梯) 여사의 장남인 것이니 역시 버젓한 ‘열사의 후예’임에 틀림없다. 사변으로 아들 둘을 잃고 나머지 장남 유제충(柳濟忠. 35) 씨와 함께 가난과 싸우고 있으나 “요즘 와서 아들도 실직하고 집안이 모두 백수건달이 돼서 이렇게 방도 차구려” 하며 차가운 온돌 안에서 목도리를 매만지고 나서 쓰린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우선 ‘전기영화’가 사실과 몹시 다르다는 것과 쓰린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 괴로워서 “아직 그 활동사진은 보지도 못했다”는 말부터 차근차근 ‘그때(1919년)’ 이야기를 영화 못지않게 엮어 들려주었다.

천안서 동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병천장터에서도 3·1운동의 불길은 드높아 동리 유지였던 유우석 씨의 아버지 유원희 씨는 그곳에 와있던 일본인 헌병을 잡아다놓고 취조하는 중에 천안읍에서 밀어닥친 20여 명의 헌병에게 잡혀 무참히 총살을 당했다. 어머니 이소제 여사는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불꾸러미로 헌병분견대의 숙소에 불을 지르려다가 잡혀 총살당하고… 유관순 양도 잡혔다. 당시 공주 영명고보에 다니던 유우석 씨 자신도 잡히고 5촌 아저씨도 유탄에 쓰러지고 삼촌도 잡혀 들고 온통 전 집안이 ‘왜제(倭帝)’의 총칼 앞에 참변을 당했던 때를 서두로 하여 그 후의 ‘고생담’에 이르는 2시간 동안의 이야기에선 불꽃이 튀었다.

유관순 양이 옥사한 후 완전히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유우석 씨는 서울 배재학교로 옮겨서 법학전문학교로 진학했었으나 1923년에 처음으로 벌어졌던 전국노농대회를 위한 학생후원회사건에 걸려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 후 아내 조화벽(趙和碧) 여사의 취직처인 원산으로 가서 그곳에선 신간회의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노동회’라는 좌익단체와 충돌하여 사람을 죽여 4년 징역을 산 일도 있다는 것이며, 태평양전쟁 초엔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에 항거하는 조수단(祖守團. 소학교원단체)을 만들었다가 호된 매를 맞았다고 한다. 평생을 통해서 이어온 유우석 씨의 ‘매운 성격’은 분명히 열사의 혈족다운 맛을 느끼게 해준다.

한때 유림(柳霖) 씨랑 독립노농당에서 함께 일한 일도 있다는 이 ‘매운 노인’은 열띤 이야기 끝을 대견한 정치론으로 옮기기도 했다.

“독일사회당의 노선 전환을 보시오. 이전 옛날에 말하던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있을 수 없게 되었어요. 자본주의 간판 속에 사회주의 내용이 들어가고… 아무튼 젊은 사람들은 공부를 해야 해요…, 공부를…”

유관순 양의 혈족으로는 오빠 유우석 씨뿐 아니라 아우인 유인석(柳仁錫) 씨가 시내 천호동에 살고있다고 하나 크게 넉넉하지 못한 듯하다. 유우석 씨는 “내 살림보다도 못하다”고 하면서 세번째 다 태운 ‘진달래’ 담배꽁초를 화난 듯이 문질러 껐다.(『동아일보』 1959.11.25)

④ 강우규 의사 맏며느리 최짐손 여사

“내 무슨 말을 할 줄 알아야지…”

3·1운동의 분노가 그냥 그대로 방방곡곡에서 소용돌이치던 기미년 9월 65세의 늙은 몸으로 일본총독 사이토(齋藤)에게 폭탄세례를 주려다가 실패한 강우규 의사의 맏며느리 되는 최짐손(崔朕孫) 여사는 철저한 함경도 사투리로 말문을 주저하였다. 벌써 80 노령, 나무껍질처럼 늙어버린 할머니 입에서 ‘역사 이야기’를 듣기란 듣는 편에서도 딱할 뻔했으나 마침 최짐손 할머니 막내딸 강영재(姜英才. 강의사 손녀) 씨가 곁에서 훌륭한 통역 겸 해설자 역할을 해주어서 한결 수월했다.

17세 때 강의사 맏아들 강건하(姜鍵夏. 23년 전에 만주 연길서 별세)와 결혼하여 강복섬(姜福蟾) 강복동(姜福童) 그리고 강영재, 딸 셋밖에 낳지 못했는데도 강의사는 며느리를 딸같이 귀해 하고 때로는 버선 짓는 것까지 가르쳐주고, 병으로 누워있을 때는 머리의 이를 잡아주던 ‘자상하신 아버님’이었다고 ‘옛정’을 생각하여 스스로 울먹해지는 최짐손 할머니는 때때로 대가 끊어진 강씨 집안 생각에 시름겨운 때도 있지만 막내딸 강영재 씨를 따라 사위집 농협 부회장 채병석(蔡炳錫) 씨 집(청운동 56의 42)에서 군색을 모르고 살고 있는 형편이다.

강의사에게는 맏아들 강건하 씨 외에 강건형(姜鍵衡)이라는 둘째 아들이 있었고 그의 태생으로 강수연(姜壽淵. 55)이라는 손자가 있었지만 모두 만주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생사도 모르는 처지이며 최짐손 할머니 친딸인 강복섬(58) 강복동(54) 양씨도 함께 이북땅에 남아있어 할머니의 몸둘 곳은 막내딸 강영재(50) 씨밖에 없는 처지이다. 바로 해방되던 해, 당시 신의주 강영재 씨 집에 와있던 최짐손 할머니는 딸과 함께 월남하여 줄곧 수원에서 농사기술원장 등을 지낸 사위의 집에서 살면서 닭이니 개니 하는 가축 기르기에 취미를 붙여왔다고 한다.

“옛날이 되어서 소학교도 못 다녔고 독립이 뭣인지도 모르고 만주로 러시아(니콜리스크)로 따라다니기만 했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최짐손 할머니보다는 이화고녀(梨花高女)를 마치고 한때 교원 노릇도 했다는 강영재 씨의 말이 훨씬 ‘그 무렵’ 사정을 또렷하게 전해주는 듯하였다.

“할아버지가 남대문역에 폭탄을 던졌을 때 내 나이 9세였지만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기억하는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강의사 막내손녀는 아른아른한 기억의 단편들을 주워섬겼다.

한일합병 되던 해(강영재 씨가 태어난 해) 온 집안을 솔권(率眷)해서 정든 함경도를 떠나 만주땅으로 옮겨갔던 이야기, 길림성 요하현에 마련된 50여 호의 한국인들을 위해서 동광학교를 만들어 스스로 교장이 되었던 강의사는 조회 때마다 ‘조선독립을 강조하는 훈시’를 해주더라는 이야기, 교과서가 없어서 손수 붓으로 그림까지 그려서 교과서류를 만들어 가르쳤다는 이야기. 특히 붓글씨 공부를 시키느라고 엿 따위를 사놓고 아이들을 불러들였다는 이야기 등등 ‘의사이면서 또 다정한 할아버지’의 면모를 엿보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강영재 씨가 이화고녀를 나와 함양에서 선생 노릇을 할 때 ‘강신호’라는 사람이 강의사 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군자금을 모으다가 잡혔다는 신문기사가 났었는데 그건 나중에 군자금이랍시고 협잡해 먹은 것임이 밝혀졌다고 하는 이야기 따위는 특히 놀랍기까지 했다.

강의사가 사형된 후 만주 등지에서 독립단 사람들이 모여 추도식을 올리곤 했으나 고양군 신사리 공동묘지에 있던 강의사 묘(사형 후 강의사의 본관인 진주 강씨 종중에서 모신 것)는 지금의 우이동 입구로 옮기기까지 거의 버림받고 있었다고 한다. 현 묘소는 강의사의 고향인 덕천군 사람들이 옮겨놓은 것이며 이대통령이 낸 14만환으로 만든 비석이 서있다.(『동아일보』 1959.11.26)

⑤ 윤봉길 의사 아들 윤종 씨

비단 상해에 와있던 왜병뿐 아니라 모든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윤봉길 의사의 쾌거가 있은 지도 어언 30여 년. 의사가 고향을 떠날 때 세 살짜리 아기이던 아들 윤종(尹淙) 씨는 나이 벌써 33세의 헌칠한 장부가 되어있다. 어머니 배용순(裵用順) 여사(53)를 모시고 또 부인과 두 딸을 거느리고 시내 창천동에 자그마한 양기와집 하나를 마련하여 살고있는 그는 농림부 양정과의 ‘평범한 주사(主事)’이다.

3세 때 아버지와 헤어졌고, 5세 때 아버지가 왜놈 손에 죽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전해들었을 뿐 ‘그때’의 기억은 전혀 없다고 몹시 아쉬워하고있지만 평생을 통해서 아버지 동상을 건립할 것과 전기(傳記)를 하나 간행할 것을 마음먹고 있다는 그는 이젠 제법 줄거리가 잡힌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줄 줄 안다.

일찍이 고향인 예산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조선에서 제일 나쁜 놈은 충남에 있었고, 충남서 제일 나쁜 놈은 예산에 있었는데 그 아들이 지금 덕산국민학교에 있다”고 윤의사를 지적 비방하는 선생이 있어 아이들까지도 냉대하는 통에 친구도 없이 외롭게 자랐다는 윤종 씨는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도 꼼짝 않고 그대로 베틀에 앉아있었을 정도로 뚝뚝해서 말을 않는 어머니”랑 여러 어른을 통해서 들은 ‘아버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윤의사 8세 때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이미 민족의식이 있었던지 흑판에 태극기를 그리다가 초등학교를 퇴학당하고 쭉 한문을 수학하여 17세 되던 해에는 동네에 ‘야학회’를 만들었고 일진회(日進會)라는 친일적인 모임에 대항하여 월진회(月進會)라는 반일 소비조합을 만들어 지도했고, 자기 손으로 지리 역사의 교과서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끝내 상해로 떠날 것을 결심했을 때는 평소에 잘 말도 건네지 않는 부인 배(裵)여사에게 이야기도 일부러 하고 못 본 체하던 아들 윤종 군을 안아주기도 하였다는 것. 또 떠날 때는 친구인 황종진(黃鍾震. 지금 공주농림학교장)에게 월진회를 인계하고 그이에게서 여비를 꿔서 갔다는 것. 그 후 중국 청도에서 세탁소 직공으로 있으면서 매월 송금해 와서 꾼돈을 갚았다는 것. 상해에서는 야채장수를 가장하고 모든 정탐을 하여 임시정부 활동을 도왔다는 것. 대부분 사람들은 윤의사를 단순히 왜병들을 한꺼번에 많이 죽인 사람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뒤에는 여러 가지 ‘비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 등등.

윤의사가 순국한 후 절로 파묻히게 마련이던 윤종 씨는 성의(聖儀) 남의(南儀) 준의(峻儀) 등 세 작은아버지(윤의사는 장남이었으며 본디 이름은 禹儀였으나 아명으로 부르던 鳳吉을 죽을 때까지 썼다고 함)와 전기한 친구 황씨 그리고 어머니 등의 힘으로 홍성중학교를 나왔고 해방 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여러모로 돌봐주어 끝내는 성균관대학 경제과를 마치게 되었으며 한때 서울시청에 있다가 정운갑(鄭雲甲) 씨가 농림부장관 때 그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백범 선생의 뜻을 받들어서가 아니라 윤의사 동상 하나는 “꼭 세워야겠다”고 거듭 다짐하는 그는 일본 오사카 어느 길 밑에 묻혀있던 윤의사 혼백을 해방되던 다음 해에 가까스로 서울 효창공원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윤의사가 사형을 받던 바로 그날 가야산 큰 바위 하나가 이유 없이 무너져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고 신비해 마지않기도 했다.(『동아일보』 1959.11.27)

⑥ 김상옥 의사 미망인 정진주 여사

모르는 사람이면 “거기도 서울시냐”고 묻는 월곡이라는 변두리 마을. 정확하게 말해서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석동 168의 112 8평짜리 후생주택에서 김상옥 열사 미망인 정진주(鄭眞珠) 여사는 양아들 김태운(金泰運) 씨와 함께 사내 하나 여식들의 손자 뒤치다꺼리에 바쁘다. 졸지에 찾아간 카메라 앞에 “너무 흉해서 바로 서는 건 싫다”고 할 만큼 늙은 정진주 할머니 나이는 벌써 65세. 열사를 여윈 지 40여 년. 온 얼굴을 덮고있는 주름살 속에는 ‘역사’가 녹음되어 있다. 때때로 덧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수월한 말씨로 주섬주섬 걸리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방에 비해서는 어색할 정도로 큰 김상옥 의사 사진(신문지 만한 크기)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18세 때 결혼하여 동대문 밖에서 영덕철물점을 경영하던 때의 ‘짧은 행복기’ 추억… 3·1운동 직후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여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신문을 내던 때의 일… 그해 12월부터는 암살단을 만들어 왜정 요인 암살계획을 하게 됐던 일… 따라서 집안은 엉망이 되고 날마다 집에는 형사들이 뒤끓고 법석치던 기억… 기미년 이듬해 미국의원단 내한을 계기로 일본총독 등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탄로되어 상해로 망명했던 때의 고초… 그 후 3년 만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세례를 준 후 당시 삼판통(지금 후암동)에 있던 은신처(매부 高奉根 씨 집)가 발각되어 총격전을 하고 일본인 형사 여러 명을 죽이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전율… 그때 가족이 몽땅 잡혀 들어가서 고문당하던 때의 굴욕… 1923년 1월 22일 효제동에 있던 은신처(교회에서 알게 된 李惠受 여사 집)가 동지였던 전모 씨의 배신으로 발각되어 밀어닥친 천여 경관을 쌍권총으로 대항하다가 자결했다는 호외를 보고 기겁하던 일 등등 가슴이 뻐근해지는 이야기를 우선 차근차근 일러준 다음, 그 후의 집안 이야기로 옮겼다.

김상옥 열사에게는 일찍이 태용(泰用)이라는 아들과 의정(義貞)이라는 딸 남매가 있었는데 김태용 씨(한때 동아일보 사진반원)는 요절하고 정진주 할머니는 동대문 부인병원(지금 이대부속병원)에서 21년 동안 식모 겸 침모 노릇을 해가면서 딸을 키워 사위를 본 다음에는 딸과 함께 사위의 직장이 있던 충남 한산에서 살다가 3년 전엔 그 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지금은 보건사회부 연금과 촉탁으로 있는 양아들 김태운 씨와 세 손자, 그리고 김상옥 열사의 옛날 사진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교회에서 보람을 찾는 외로운 처지에 있다.

김상옥 열사 기념사업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있기는 하나 별다른 사업은 한 것이 없고, 지금 모 영화사에서 전기영화를 만들려고 계획중이라고는 하나 또렷한 전망은 없는 것 같다. 아들 김태운 씨는 폐가 약해서 늘 걱정이라며 스스로 ‘액운 많은 몸’으로 자처하는 정진주 할머니는 너무나 짙은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머니는 교회가 없으면 못 사신다”고 하는 아들의 말에 무리가 없다.

김열사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여인이 있는데 첫째는 김열사 누이동생이 되는 김기숙(金基淑. 53. 고봉근 씨 부인) 씨로서 “늘 오빠와 나라”를 생각했다는 분이며, 둘째는 김열사가 마지막 은신처로 정했던 집의 주인 이혜수 여사이다. 특히 이여사는 당시 ‘동아부인상회’에 취직해 다니던 분으로 우리나라 직업여성으로는 처음이었던 이라고 한다. 두 분이 함께 살아있으나 “힘이 부쳐서 아무런 보답도 못한다”고 정진주 할머니는 힘에 겨운 걱정도 하고 있다.(『동아일보』 1959.11.28)

⑦ 나석주 의사 차녀 나응서 여사

올해 72세가 될 어머니(나의사 미망인) 이문성(李文成) 여사는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 남아있어 생사도 모르고 맏오빠 이응섭(李應燮) 씨는 병사했고, 둘째오빠 이응선(李應善) 씨는 1·4 후퇴 때 놈들에게 피살당하고 조카 둘은 모두 괴뢰군 나가기를 거부하다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완전히 손이 끊어져버린 친정’을 생각하며 나응서(羅應瑞) 아주머니는 새삼스럽게 씁쓸해한다.

평양으로 출가한 언니가 하나 있기는 하나 소식 하나 들을 수 없으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나의사의 후예는 둘째따님밖에 없다. 올해 42세, 출가한 후로 줄곧 서울서만 20여 년 살고있다는 나응서 아주머니는 벌써 중학 다니는 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애들 가꾸기에 또 야릇하게 비뚤어져 버린 세상풍조에 몰려 “아버지의 대쪽 같은 마음 등을 멀리 남의 일처럼 잊어가고있다”고 스스로를 야속해한다.

3세 때 집 나간 아버지의 뒤를 물고 날마다 순사와 헌병이 찾아들던 이야기… 9세 때 아버지가 동척(東拓. 지금 내무부 자리)에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몇몇 직원을 죽인 다음 식산은행(지금 산업은행) 앞길에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바느질 품팔이로 집에 있지 않았던 기억… 그때 바로 동아일보에서 왔다고 하면서 마구 사진을 찍더라는 이야기… 서울서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올 때는 사리원서 집까지 20리 길가에 정복 경관이 쭉 늘어서서 감시하더라는 이야기… 재령 공동묘지에 어린애 무덤같이 자그마한 묘지를 마련할 때는 계엄령 하처럼 동네 통행이 제한되고 밤에 변소 가는 것까지 따라다니더라는 이야기… 그 후 맏오빠 이응섭 씨가 이름을 백운학(白雲鶴)으로 고쳐서 상해로 김구 선생을 찾아가다가 붙들려 돌아왔던 이야기… 둘째오빠 이응선 씨는 사상관계로 사리원농업학교를 쫓겨나서 이를 갈던 때의 이야기… 모두가 “다시 겪을 수 없는 일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맏오빠의 장남 이효수(李孝壽) 씨가 6·25 때 괴뢰군에 들지 않으려고 싸우다가 어느 갈대밭에서 수류탄 자살을 했고, 차남 이효복(李孝福) 씨는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고, 둘째오빠 이응선 씨는 노동당에 들지 않는다는 것과 한번 월남했던 사실이 있다는것을 이유로 1·4 후퇴 직후 놈들에게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누구를 위해서 싸웠던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라고 자탄하며 눈시울이 불그스레 물들기까지 했다.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아버지의 뜻을 받을 수도 있겠고 나씨 집 대도 이을 것인데 그걸 못하는 게 무엇보다도 유감스럽다”고 거침없이 요즘 세태를 나무라고 나서 “내 몸에서 난 아이들까지도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투철한 무엇을 느끼는 것 같지 않다”고 쓰게 웃기도 했다.

“하긴 아버지도 원망스러워요. 나랏일도 좋지만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집안이 모두 이 꼴이 되었고… 아버지를 알아주는 후세도 아니고 남이야 어쨌든 나부터 살자는 요즘 세상에 아버지 같은 이의 생각이 환영받을 턱도 없고 더구나 외아들이었던 아버지가…” 하는 말은 사뭇 자조의 느낌까지 주었다.

남편 김진원(金鎭元) 씨가 가진 12평 4층 빌딩(충무로 1가 51)의 세도 받고 하여 군색을 모르고 지낸다는 나응서 아주머니는 “출가외인인 딸이 나서는 것은 안됐지만 보건사회부에서 1년에 12만환씩 내주는 유족 보조금일랑 모아서 친정에 양자라도 맞아들이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통일만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재령으로 가겠다”고 아쉽게 발돋움하고 있다.(『동아일보』 1959.11.29)

⑧ 이봉창 의사 맏형 이범태 옹

마포구 아현 3동 산7의 126 가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빈촌(貧村) 꼭대기.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못 들어가는 ‘무허가 판잣집’에 살고있는 69세 노인 이범태(李範泰) 옹은 자기 처지보다도 90세 되는 어머니 주(朱)씨를 보살피며 여생을 헤아리고 있다. 대추처럼 늙은 이봉창 의사 맏형은 모든 선열의 가족들이 그러했듯이 역시 “입으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한”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벌써 30여 년 전의 옛이야기. 당시 일본 삼정물산회사의 현지(청진) 고용인으로 있으면서 콩이니 소가죽 수집에 바빴던 이범태 씨는 용산철도국 기관수를 쫓겨난 동생 이봉창의 거동에서 “심상치 않은 점”을 발견했으며, 그 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는 자기를 찾아온 이봉창 의사는 이미 김구 선생의 밀명을 받고 온 사람이었고, 거사 전에 자기를 보고 “며칠 안에 변이 있을테니 미리 귀국하라”고 해서 청진으로 돌아왔었는데 이듬해 1월 8일에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잡혔고 자기는 청진서 잡혀서 마구 얻어맞은 끝에 1년 6개월의 징역살이를 했으며 거사 후 10개월 만에 집행된 이봉창 의사의 사형장에는 아무도 가보지 못했으며 나중에 시체를 찾아가려면 찾아가라는 일본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의 통지가 있었지만 “가지 않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는 청진경찰서의 협박으로 역시 가지 못했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묘지도 없었는데 김구 선생이 귀국하여 일본 유학생을 시켜 이치가야 형무소에 남아있던 혼백을 모셔와서 마침내 효창공원에 장지를 정했었는데 최근에 와서 그곳에 국제축구경기장이 생긴다는 통에 걱정거리라는 등의 이야기는 비교적 알려진 편이지만 해방 후에 두드려져야 할 이봉창 의사 집안 이야기가 오히려 귀에 설다.

해방되던 해 이봉창 의사 집안은 모두 청진에 살고있었으며 한때 괴뢰들이 만든 ‘유족회’에 무조건 가입되어 쌀 배급 같은 것을 탄 적도 있으나 “어찌나 회합이 잦고 또 거기 안 나오면 반동이니 뭐니 하는 통에 온 집안이 함께 월남해 버렸다”고 한다.

지금 남선전기(南鮮電氣) 사천출장소장으로 있는 막내동생 이봉준(李奉俊) 씨는 해방되던 해 이미 남한에 있었기 때문에 믿음직하기는 했으나 늙은 어머니와 아들 며느리들이 한꺼번에 피난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김구 선생의 알선으로 재목상을 벌인 일도 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일제 때 잠깐 한 ‘산판(山坂)’ 경험으로 농림부 산림과에 근무했으며 작년에 그만둘 때까지 그는 경무대 관저 뒷산 관리인으로 있었다고 한다.

집이 하도 가난해서 90세 된 어머님을 직접 모시지 못하고 막내동생 이봉준 씨에게 맡기고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죄스럽다고 이야기하는 이범태 옹은 버스 공장에 직공으로 다니는 아들 이실(李實) 씨의 2만환 남짓한 월수에 기대어 성냥통 같은 방 둘에 손주들이랑 7명의 식구 속에 끼여 살고있다.

총각으로 순국한 이봉창 의사이기에 직계 후손도 없고 형이나 아우가 모두 “이렇게 가난하니 딱하기는 하나” 최인규(崔仁圭) 내무장관이 교통부장관으로 있을 때 이의사의 출신이 용산철도국이었음을 생각하여 동상이라도 만들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런 류의 계획이나 실현되었으면 형으로 더할 나위 없이 반갑겠다”고 바라고 있는 처지이다. 동상 이야기를 할 때, 피우던 ‘파랑새’ 꽁초를 손바닥 위에 세우며 고개를 갸웃하는 품이 무척 간절한 표정이 었다.

허나 야박한 세상은 가난을 돕기 전에 그 집이 ‘무허가 판잣집’이라고 해서 때때로 헐라는 호령을 하게 마련이라고 상을 찌푸리는 이옹은, 하도 고마운 이도 흔하지 않기에 오래전 박사일(朴士一. 현 경기도 경찰국장) 씨가 마포서장으로 있을 때 밀가루 5포대를 갖다주더라는 이야기를 침이 마르도록 되뇌이곤 했다.

이옹의 말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어머니와 동생 이태준을 한 해에 한 번씩이라도 서로 만나봐야 죽은 다음에 만날 봉창에게도 이야깃거리가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동아일보』 1959.11.30)

⑨ 민영환 공 3남 민광식 씨

서울 북쪽 끝 변두리 성북구 미아 2동 605번지, 머리가 처마에 닿는 납작한 초가의 문간방 하나를 빌려서 6명의 식구를 거느리고 허덕이는 민광식(閔光植) 씨는 민충정공(閔忠正公) 3남일 뿐 아니라 이번에 발족한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이다.

지병인 천식 때문에 지난 28일 광복선열 합동추도회에도 나가지 못했다는 그는 벌써 며칠째 자리를 펴고 누워있는 병자다. 다 헐어빠진 천장 무늬만 쳐다보고 누웠기에는 나이와 처지가 함께 용서하지 않는 터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딱하다”고 말하는 그는 아직 55세.

허나 “6·25 때부터의 영양실조로 이 모양이 됐다”고 한숨짓는 그의 낯은 훨씬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맏형 민범식(閔範植) 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둘째형 민장식(閔章植) 씨는 지금 돈암교 언저리에서 민광식 씨보다는 “좀 나은 살림”을 하고 있으니, 유족명부에는 민장식 씨가 오르는 게 순서일는지도 모르지만 “보건사회부에서 내어주는 12만환의 연금을 보다 군색한 사람이 타기 위해서” 민광식 씨가 등록되었다고 한다. 중형은 한때 조선피혁주식회사 사장을 지낸 일이 있는 터이고 또 맏집에는 고려대 교수로 있는 조카 민병기(閔丙岐. 국제정치학) 씨가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18세의 아들이 맏아이인 민광식 씨가 가장 군색함이 사실이다.

선친이 자결했을 때는 겨우 난 지 6개월의 아기였으니 평생을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컸지만 태고사 뒤편에 1천여 평의 대지를 가진 집이 있었고, 어머니 되는 박수영(朴壽泳) 씨는 든든하여 크게 고생을 모르고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맏형과 중형은 당시 상해에 있던 이승만 박사의 알선으로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 유학까지 했고 민광식 씨 자신도 상해에서 ‘영어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하며 왜인이 쫓을까 봐서 중국인 호적을 사가지고 다닐 정도였다는 등 “형세 좋던 옛날”의 기억을 그는 보배롭게 간직하고 있다.

허나 모든 선열의 후예가 그러했듯이 왜인의 냉대 속에 줄곧 ‘낭인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민씨 일가의 가세는 점점 기울어지고, 해방 후에는 이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지사들의 후원으로 민광식 씨는 조선흑연무연탄광회사 이사를 지낸 일도 있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지금은 집안이 거의 모두 다시 낭인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해방 직후만 해도 당시 살고있던 어머니(민충정공 부인)를 찾아오는 지사들이 많았고(이승만 박사, 김구 선생, 이시영 옹 등), 사변 전까지만 해도 또 형편이 “이토록 땅바닥에 붙어버리지는 않았는데” 6·25 격동 속에서 대쪽 같기 만한 열사풍 생리가 지배하던 이 집안은 결정적으로 몰락했다고 말한다.

지금 안국동 로타리에 서있는 민충정공 동상(金泰善 씨가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시에서 세운 것)으로 자그마한 위로를 받으면서도 “아직도 많은 후손의 할 일”을 셈하기에 바쁜 민광식 씨는 너무나 쇠약해진 스스로의 몸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아쉬워한다.

‘순국선열유족회장’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원호 명목으로 기부행위를 강요하는 따위의 일이 없도록 해야겠으나, 정부에서도 맨주먹으로 모인 우리를 좀 돌봐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예컨대 어려운 후손들은 후생주택 하나씩이라도 들게 해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허나 민광식 씨 자신의 말처럼 “아직 막연한 생각에 그치는 계획”이니 딱하다.[註] 겨우 9명의 의사밖에는 다루지 못하고 지면 관계로 나머지 분들의 소개를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동아일보』 195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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