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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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1. 한일합병과 <학도가>

하필이면 서울 주요 신문의 휴간일이기도 했던 1910년 8월 29일 월요일, 한국과 일본국의 합병을 결정한 조약이 대한제국 마지막 관보를 통해 공포되었다. 한 주 전인 8월 22일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대일본제국 한국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양국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조인한 조약은 공포와 함께 즉시 발효되었고, 그렇게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마지막 관보 호외에 실린 조약 전문(全文) 앞에는 한국 황제 순종(純宗)의 8월 22일 조칙(詔勅)과 8월 29일 칙유(勅諭)도 있었다. 조칙을 통해 “한국 통치를 거(擧)하여 차(此)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께 양여(讓與)”함을 결정하고 “장래 아(我)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고자 했던 순종은, 칙유를 통해 “대소 신민은 국세와 시의(時宜)를 심찰(深察)하여 물위번요(勿爲煩擾)하고 각안기업(各安其業)하여 일본제국 문명신정(文明新政)을 복종하여 행복을 공수(共受)”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황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안녕을 바라는 한편, 조약 체결에 대한 인민의 반발과 그로 인한 소요 사태를 걱정했던 데에서는 나름의 진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한제국 마지막 관보가 발행된 바로 그날에는 조선총독부의 첫 번째 관보도 발행되었다. 1875년 9월 운요(雲揚)호 사건 이후 35년 동안 집요하게 진행된 침략이 완성되는 순간 한 치의 행정 오차가 없도록, 꼼꼼하게 준비한 일본의 치밀함이 보이는 모습이다. 일본어로 먼저 쓰고 뒤에 조선어 번역까지 넣은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에는 메이지(明治)천황의 칙령이 여러 건 실렸는데, 그중 첫 번째인 칙령 제318호에서는 한국의 국호를 바꾸어 조선이라 칭한다고 했다. 짧으면서도 묵직한 그 칙령에 따라, 사라진 대한제국의 자리엔 식민지 조선이 남았다.

1910년 5월 간행 『보통교육창가집』에 실린 <학도가> 가사.

한일합병 전후 혼란했던 시대의 모습을 잘 담고 있으면서 당시 대중이 가장 많이 듣고 불렀던 노래 중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 창가(唱歌) <학도가>다. 그 무렵 유통되었던 <학도가>에는 여러 가지 가사와 곡조가 있었는데, 가장 많이 알려진 노래는 1900년 5월에 발표된 일본 창가 <鐵道唱歌(철도창가)> 곡조에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가사를 붙인 것이다. <학도가>는 1910년 5월에 대한제국 학부(學部)에서 간행한 최초 음악 교과서인 『보통교육창가집』에도 실렸으나, 그 가사는 세간에서 유행하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보통교육창가집』 간행 당시 대한제국은 이미 허울만 남은 상태였으므로, 거기에 실린 <학도가>는 사실상 통감부의 뜻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鐵道唱歌> 곡조에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가사를 붙인 『보통교육창가집』의 <학도가>는 1911년 6월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정정(訂正) 보통교육창가집』에도 그대로 실렸다. 통감부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총독부에서 그 <학도가>를 계속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대한제국 『보통교육창가집』에 자주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가사와 곡조로 존재했던 <학도가>는 한일합병을 거치면서 이제 공교육 영역에서 단일화가 되었던 셈이다. 1913년 5월에 일본축음기상회, 즉 일축(日蓄)이 발매한 첫 번째 <학도가> 음반에 담긴 가사도 그래서 당연히 ‘청산 속에 묻힌 옥도’였다.

<학도가>
오노 우메와카(多梅稚) 작곡, 기독교청년회원 노래, 1913년, 일축(日蓄) 6217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네/ 낙락장송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 되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은 넘어가고 동천조일(東天朝日) 비쳐 온다
유신 문화 벽두 초에 선도자의 책임 중코/ 사회 진보 깃대 앞에 개량자 된 의무 크다
농상공업 왕성하면 국태민안 여기 있네/ 가급인족하고 보면 국가부영(富榮) 이 아닌가
문명 기초 어디 있노 학리 연구 응용일세/ 실업과학 학습함이 금일 시대 급선무라
애(愛)합도다 우리 부형 엄하도다 우리 선생/ 부사(父師) 교육 엄하온데 학문 불성할까 보냐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도 그렇지만, 이 가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남선(崔南善)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음반 딱지에는 기독교청년회원이 불렀다고만 쓰여 있는데, 신문 광고를 통해 노래를 녹음한 두 사람이 김영식(金永植)과 김은식(金恩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래 시작 전 ‘제18 <학도가>이올시다’라는 짧은 소개는 <학도가>가 『보통교육창가집』 열여덟 번째 수록곡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녹음한 최초의 서양음악 음반이기도 한 <학도가>는 이후 1923년에 음반번호만 K200으로 바뀌어 다시 발매되기도 했다.

가장 많이 알려진 <학도가> 곡조가 일본 창가인 점, 최초 <학도가> 음반이 통감부와 총독부의 방침을 반영한 가사였다는 점은 그리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20세기 초에는 음반에 담긴 <학도가> 외에 가사와 곡조가 다른 <학도가>가 여럿 존재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좀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학도가>도 많이 있었다. 예컨대 1905년에 발표된 것으로 알려진 김인식(金仁湜) 작사‧작곡 <학도가>는 일본 창가 곡조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가사에 애국계몽 의도도 훨씬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한국인이 서양음악 형식으로 만든 첫 번째 창작곡으로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2. 3‧1운동과 <탕자자탄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나 이후 몇 달 동안 이어진 그 사건에는 이름을 무어라 붙여야 할까. 운동일까, 혁명일까. 그 운동 또는 혁명의 목표는 또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선언하고자 함이었을까, 성취하고자 함이었을까. 그리고 그 목표의 수행 결과는 과연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1919년 4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20년부터 국경일로 기념한 3월 1일 삼일절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공휴일로 지정되어 공식 ‘빨간날’의 역사를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왔다. 3‧1운동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생각해 볼 점들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대 사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3‧1운동이 일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다. 다만, 그 날짜가 구체적으로 잡히는 데에는 1919년 1월 21일에 갑자기 사망한 ‘이태왕(李太王)’ 고종(高宗)이 본의 아니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종 국장의 발인일이 3월 3일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이 서울로 모이게 되는 상황을 고려해 이틀 전 3월 1일이 결행 날짜로 정해졌다. 당일 진행 과정에 순조롭지 못한 점이 있기도 했으나, 독립 선포와 시위는 예정대로 서울에서 시작되었고, 곧 전국 각지로 퍼져갔다. 당시 유일한 국내 발행 조선어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는 3월 6일부터 3‧1운동 관련 보도를 시작했는데, 현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 3월 2일자 지면 내용은 어떠했는지, 관련 보도가 혹시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시위에 참여했으므로 중간중간 함께 부르는 노래도 자연스럽게 있었을 것이다. 3‧1운동 현장에서 불렸던 그런 노래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3‧1운동이 남긴 노래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탕자자탄가(蕩子自嘆歌)>라 할 수 있다. 가사 첫 구절에서 딴 제목 <이 풍진(風塵) 세상>으로 불리기도 했고, 오늘날은 대개 <희망가>로 알려진 노래다.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실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확산한 낙망(落望)과 좌절, 허무와 열패(劣敗)의 감정이 이 한탄조 노래에 대한 호응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탕자자탄가>의 창작과 유행이 시작된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3‧1운동 열기가 잦아든 1919년 하반기쯤으로 추정된다. 현재 확인되는 <탕자자탄가>의 최고(最古) 자료가 1920년 7월 간행 노래책 『낙원창가(樂園唱歌)』이고, 앞서 192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노동가> 가사 말미에도 ‘곡조(이 풍진 세상을)’ 표기가 있다. <탕자자탄가>의 ‘노가바’로 만들어진 것이 <노동가>였던 셈인데, 1920년 4월 무렵 <탕자자탄가> 곡조가 웬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노래책과 구전으로 유통되던 <탕자자탄가>는 1923년에 기생 박채선(朴菜仙)과 이유색(李柳色)이 반주 없이 녹음한 <이 풍진 세월>로 첫 음반도 만들어졌다. 대중가요로 분류할 수 있는 노래가 음반에 담긴 첫 번째 사례다. 일축(日蓄)에서 발매된 첫 음반 이후로도 1925~26년에 <탕자자탄가> 음반이 최소한 세 가지 이상 발매되었고, 노래책에 실린 경우는 훨씬 더 많았으므로, 1920년대 초중반 최고의 히트곡이 이 노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23년에 발매된 <이 풍진 세월> SP음반 딱지.

<탕자자탄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고, 출판사 광문서시(廣文書市)에서 가사를 ‘개량’했다는 표현이 『낙원창가』에 있는 정도만 확인될 뿐이다. 몇 년 전부터 임학천 또는 임학찬이 작사했다는 설이 유포되고 있으나,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3‧1운동에 참여한 공적으로 1997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이 추서된 임학찬(任學讚)이라는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탕자자탄가> 가사를 지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탕자자탄가> 곡조는 1910년 이후 일본에서 유행한 노래 <七里ヶ濱の哀歌(시치리가하마의 애가)>에서 유래했다. 사고로 숨진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가사 첫 구절에서 딴 <眞白き富士の根(새하얀 후지산 봉우리)>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불렸는데, 그것이 조선으로 건너와 <탕자자탄가>가 되었다. <七里ヶ濱の哀歌>는 또 1890년 8월 간행 창가집에 수록된 <夢の外(꿈 너머)>와 곡조가 같고, <夢の外> 곡조는 19세기 미국에서 널리 불린 찬송가에서 유래했다. 미국 찬송가의 작곡자는 제레미아 잉걸스(Jeremiah Ingalls)로 알려져 있으나, 제목과 가사가 바뀔 때마다 곡조에도 약간씩 변화가 생겼으므로, 그가 만든 선율이 그대로 <탕자자탄가>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탕자자탄가>
제레미아 잉걸스 작곡, 박채선‧이유색 노래, 1923년 일축 K116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이 무엇인가/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 른 하늘 밝은 달 아래서 곰곰이 생각하면/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다시 꿈 같구나
담소화락(談笑話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범하야/ 전정(前程) 사업을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반공중에 둥근 달 아래서 갈 길 모르는 저 청년아/ 부패 사업을 개량토록 인도하소서
나의 할 바는 태산 같고 가는 세월은 살 같으니/ 어느 누구가 도와주면 희망이 족할까/ 돋는 달과 지는 해야 바쁜 일 없거든 가지 마라/ 전정 사업의 전후사를 분별키 어려워
밝고도 더 밝은 이 세계를 혼돈천지로 아는 자야/ 무슨 연고로 이때까지 꿈속에 살았나/ 이제부터 원수의 마음의 난망(亂望)을 저버리고/ 문명의 학문을 배우기를 힘껏 지어라

<탕자자탄가>가 <희망가>로 수록된 첫 사례인 1962년 10인치 LP음반 재킷.

<탕자자탄가> 제목과 가사는 노래책에 수록되고 음반에 녹음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는데, <희망가>라는 제목은 1920년대 당시엔 아직 사용되지 않다가 노래의 유행이 시작된 지 40년도 더 지나서야 처음 등장했다. 1962년에 발매된 10인치 LP음반에 수록된 고복수(高福壽)의 녹음이 <희망가> 제목으로는 처음이었고, 이후 다른 가수들 역시 <희망가>로 부르면서 바뀐 제목이 차차 자리를 잡았다.

‘나의 희망이 무엇인가’ 가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제목이 <희망가>이긴 하지만, 노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희망이 무엇이냐 물은 뒤 난망을 버린다고 했으니, <탕자자탄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버려야 할 그 어지러운 바람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일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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