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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일제 경찰 작성 ‘감시대상 인물카드’ DB로 공개

2015년 2월 26일 1173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일제 강점기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가 등 ‘문제 인물’로 낙인한 이들을 관리하고자 만든 카드 형태 기록이 온라인으로 공개된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자체 소장한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 6천264장을 제96주년 3·1절을 맞아 데이터베이스(DB)로 서비스한다고 26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인물카드는 일제 경찰에 검거 또는 수배되거나 감시를 받던 인물에 대해 당시 경기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기록이다. 유관순, 한용운, 안창호 등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포함돼 ‘수형자 카드’ 또는 ‘독립운동가 신상기록카드’ 등으로도 불렸다. 가로 15㎝·세로 10㎝ 크기 카드에 사진과 함께 이름, 본적, 주소 등 신상정보와 검거 시기 및 관서, 죄목, 재판 정보 등 사법처리 내역이 기록돼 있다. 일제는 3·1운동으로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이 고양되자 위기감을 느끼고는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관리를 강화하고자 인물카드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작성 시기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후반 또는 1920년 무렵으로 보이며, 유관순을 비롯해 3·1운동 관련자 700여명의 카드 760건도 남아 있다. 국편 관계자는 “일제 경찰당국은 일제의 통치에 반대, 반항했거나 그런 행동을 취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의 명부를 만들어 일상을 추적·감시했다”며 “인물카드는 이런 인물들에 대한 수사와 체포의 효율성을 높일 기초자료로 고안돼 일제 말기까지 사용됐다”고 말했다. 카드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는 이광수나 최린처럼 이후 친일로 변절한 이들이나 경제사범, 일본인과 중국인도 일부 포함됐다. 수배, 체포 이후 등 신병 확보 여부에 따라 한 인물에 관한 카드가 여러

14살 학생부터 기생, 승려까지…일제 판결문에 드러난 3·1 만세운동

2015년 2월 26일 338

“대정 8년(1919) 4월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갔을 때 윤수선(尹秀善)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 강덕수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 박소수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략)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武安) 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丁)의 도로를 열어 지어 걸었다.” 일제 강점기 3·1운동에 나선 밀양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14~15살 소년들에 대한 판결문의 한 대목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부터 기생, 승려까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일제 강점기 법원의 판결문을 통해 확인됐다. 일제에 의해 식민화된 당시 법원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소년들에게도 보안법과 형법 등을 적용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국가기록원은 일제의 판결문을 통해 본 영남과 호남, 제주의 3·1운동을 담은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펴냈다고 26일 밝혔다. 남부지역 3·1운동의 전개양상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판결문 원문 50건(286명)을 한글 번역문과 함께 실었다. 지난해 경기·강원·충청 등 중부지역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을 펴낸 데 이어 두번째다. 이번에 펴낸 자료집에 실린 판결문을 살펴보면, 기생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통영의 기생조합 소속 기생 정막래(21)와 이소선(20)은 금반지와 금비녀 등을 팔아 같은 복장차림으로, 수천명이 함께 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보탰다. 식민지 법원은 정막래와 이소선에게 각각 징역

고교생까지 합세… 유해발굴 현장 ‘북적’

2015년 2월 26일 404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3일째… 자원봉사로 참여한 조영선 민변 사무총장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이 북적였다. 유해발굴을 위한 일손이 부족하다는 하소연이 전해지자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으로 몰려 생기가 넘쳤다.   발굴 3일째인 이날 40여 명이 일손과 마음을 보태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인근 금산에서 생업을 뒤로 하고 50대 남성이 달려왔다. 고교생 2명도 현장을 찾아 삽을 들었다.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아래 민변) 소속 6명의 변호사들이 유해매장지를 방문, 삽과 호미를 들고 희생자들을 변호했다. 유가족들은 직접 떡과 식혜를 만들어 유해발굴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  유해발굴 3일 째인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유해발굴 현장. 가로 약 3mx 세로 약 8m 구덩이에 유해가 즐비하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25일 오후)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현장 자원봉사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곳곳에서 마음을 전해오고 있다. 김동춘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지금 대전 산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 유족들의 주도로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라며 “현대사와 한국전쟁 학살의 물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니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한 번 가보시기 바란다”고 권유했다.  김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하던 지난 2007년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29명의 유해 발굴 현장 사진을 소개하며 “이를 원형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면 난징등과 견줄 가장 좋은 평화교육 현장이 됐을 것”이라며 “당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고 지금 봐도 많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구덩이에 층층이 쌓아”… 살해 증언과 일치한 현장

2015년 2월 26일 361

[유해발굴 둘째날] ‘A1 탄피’가 발견된 매장지 흙이 유독 까만 이유는? ▲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드러났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1950년 당시 촬영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여기요 여기! 이것 좀 보세요!” 24일 오전 11시쯤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유해발굴 현장.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하던 발굴팀 자원봉사자가 김민철 총괄 진행요원(민족문제연구소)을 불렀다. 서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뼈와 팔뼈, 두개골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박선주 발굴단장(68, 충북대 명예교수)은 “희생자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포개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구덩이 안에 배추포기 쌓듯 층층이 쌓아 놓았다’는 당시 현장에서 살해과정에 참여한 관계자 증언과도 일치한다. 당시 현장 살해 모습이 담긴 사진에도 구덩이 안에 시신을 포개 놓은 장면이 눈에 띈다. (관련 기사 :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오후가 되자 작업자들이 숨소리가 커졌다. 삽질하는 작업자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유해 발굴지에서 파낸 흙을 옮겨 놓은 흙더미가 높아졌다. 흙더미가 커질수록 드러난 유해도 늘어났다. 수백 여 점의 유해 파편이 즐비하다. 검정 고무신과 뒷굽이 있는 신발도 각각 발굴됐다. 흰색 단추도 나왔다. 희생자들을 민간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있는 현장 ▲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매장지에서 발굴된 A1소총 탄피(아래)와 탄두(원안). 탄두 아래 희생자 두개골로 보이는 뼈가 박혀 있다. 이날 발굴조사단은 A1소총

고교생까지 합세… 유해발굴 현장 ‘북적’

2015년 2월 26일 725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3일째… 자원봉사로 참여한 조영선 민변 사무총장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이 북적였다. 유해발굴을 위한 일손이 부족하다는 하소연이 전해지자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으로 몰려 생기가 넘쳤다.   발굴 3일째인 이날 40여 명이 일손과 마음을 보태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인근 금산에서 생업을 뒤로 하고 50대 남성이 달려왔다. 고교생 2명도 현장을 찾아 삽을 들었다. 특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아래 민변) 소속 6명의 변호사들이 유해매장지를 방문, 삽과 호미를 들고 희생자들을 변호했다. 유가족들은 직접 떡과 식혜를 만들어 유해발굴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  유해발굴 3일 째인 25일 대전 산내 골령골유해발굴 현장. 가로 약 3mx 세로 약 8m 구덩이에 유해가 즐비하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25일 오후)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현장 자원봉사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곳곳에서 마음을 전해오고 있다. 김동춘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지금 대전 산내에서는 시민사회단체와 유족들의 주도로 유해발굴이 진행 중”이라며 “현대사와 한국전쟁 학살의 물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니 가까이 사시는 분들은 한 번 가보시기 바란다”고 권유했다.  김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하던 지난 2007년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29명의 유해 발굴 현장 사진을 소개하며 “이를 원형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면 난징등과 견줄 가장 좋은 평화교육 현장이 됐을 것”이라며 “당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고 지금 봐도 많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이날

[2015.02.23] 일본군 헌병보조원에서 대한민국 특무대장으로 변신한 김창룡 1

2015년 2월 25일 300

▲[2015.02.23] 백년전쟁 : 일본군 헌병보조원에서 대한민국 특무대장으로 변신한 김창룡 1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626606 ☞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50218nrh1.mp3

“구덩이에 층층이 쌓아”… 살해 증언과 일치한 현장

2015년 2월 25일 945

[유해발굴 둘째날] ‘A1 탄피’가 발견된 매장지 흙이 유독 까만 이유는? ▲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드러났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1950년 당시 촬영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여기요 여기! 이것 좀 보세요!” 24일 오전 11시쯤 대전 산내 골령골 집단학살 유해발굴 현장.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하던 발굴팀 자원봉사자가 김민철 총괄 진행요원(민족문제연구소)을 불렀다. 서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다리뼈와 팔뼈, 두개골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박선주 발굴단장(68, 충북대 명예교수)은 “희생자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포개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구덩이 안에 배추포기 쌓듯 층층이 쌓아 놓았다’는 당시 현장에서 살해과정에 참여한 관계자 증언과도 일치한다. 당시 현장 살해 모습이 담긴 사진에도 구덩이 안에 시신을 포개 놓은 장면이 눈에 띈다. (관련 기사 :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오후가 되자 작업자들이 숨소리가 커졌다. 삽질하는 작업자의 이마에는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유해 발굴지에서 파낸 흙을 옮겨 놓은 흙더미가 높아졌다. 흙더미가 커질수록 드러난 유해도 늘어났다. 수백 여 점의 유해 파편이 즐비하다. 검정 고무신과 뒷굽이 있는 신발도 각각 발굴됐다. 흰색 단추도 나왔다. 희생자들을 민간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서로 다른 사람의 뼈가 뒤엉켜 있는 현장 ▲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매장지에서 발굴된 A1소총 탄피(아래)와 탄두(원안). 탄두 아래 희생자 두개골로 보이는 뼈가 박혀 있다. 이날 발굴조사단은 A1소총

잔존하는 ‘친일’도로, 사라지는 ‘항일’도로

2015년 2월 25일 392

해방 70년을 맞는 오늘 일부 도로는 여전히 친일의 자취를 담고 있는 반면, 기존에 담겨 있던 독립운동가의 흔적은 도로명에서 배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 친일의 자취 인촌로 조방로…”명칭 변경 어려워” 25일 행정자치부와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서울 성북구와 전북 고창군에는 ‘인촌로’가 있다. 인촌은 고려대학교 설립자 김성수의 호(號)로, 성북구에는 고려대가 위치해 있고 고창군은 김성수의 고향인 탓에 이 같은 도로명이 붙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인촌로’ (사진=박종민 기자) 문제는 김성수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지난 2009년 친일 인물로 규정됐다는 점이다. 그가 일제 강점시기 전국 일간지에 조선총독부의 태평양전쟁 동원을 위한 징병과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을 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기고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인촌기념회와 후손은 위원회 결정에 대해 취소 소송을 제기한 가운데 관할 구청은 법원의 최종 판결이 어떻든 도로명 변경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성북구청 관계자는 “이에 대한 민원이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에 바뀌기는 힘들 것”이라며 “재판에서 친일파라고 최종 결정된다 해도 현행법상 구에서 도로명 주소를 변경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부산의 경우 범일동 시민회관 인근 도로가 ‘조방로’로 명명돼 있다. 1968년 사라진 ‘조선방직’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일제가 면사방직과 판매를 위해 설립한 조선방직은 시민지 시대 우리 민족에 대한 가혹한 노동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때문에 1943년 조선방직 파괴를 시도하다 체포된 독립운동가 이광우의 아들이, 1인 시위를 하면서까지 명칭 변경을 요구했지만 그 이름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 항일의 뜻 새긴

대전 산내 유해발굴 개토제 현장 …”아부지 아부지…” 중년의 딸 애끊는 사부곡

2015년 2월 24일 398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수천명 …낭월동서 학살당했다 알려져 “유해라도 찾아 모시고 싶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공동조사단 제2차 유해발굴 개토제가 23일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낭월동) 유해발굴지에서 열려 한 유가족이 오열을 하고 있다. 전우용 기자 yongdsc@ggilbo.com 23일 오전 9시 경 대전 동구 낭월동(구 산내면 골령골)의 -대전형무소 정치범 및 민간인 집단 1학살지-를 알리는 비석 주위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추모의 침묵에 빠져드는 유족들은 저마다 부모, 형제, 친지를 잃은 기억을 떠올리며 깊은 회한에 젖어 들었다. 한반도에 전쟁의 포화가 드리웠던 1950년 대전 산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혔다. 생각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야만 속에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할 국가의 이성은 깊게 매장됐다. 개토제가 열린 이날 오전 하늘에서는 검은 까마귀들이 날갯짓을 하며 울어댔다. 이 골짜기에서 희생된 이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 명. ‘흙을 파기 전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개토제는 산자와 죽은자를 연결해주는 의식. 한삼을 나빌레는 경기민요인의 춤과 유가족들의 제례는 사라진 그들의 넋을 의로했다. 검은 비석 앞에서 한 중년여성은 “아부지 내가 왔는데 대답이 없소. 아부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소. 누가 이랬는가.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라고 목 놓아 울었다. 비통의 정서에 이를 지켜보던 한 중년 남성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가 학살된 이후 힘겨운 삶을 살아온 유족들은 그 고된 삶을 주저리주저리 다른

유해공동조사단 “청·장년 일손 절실” 참여 호소

2015년 2월 24일 375

[유해 발굴 둘째 날] 대전 산내 골령골… 일손 부족으로 작업 일시 중단 ▲  유해공동조사단에 참여한 한 자원봉사자가 호미질로 조심스럽게 부서진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호미와 괭이를 이용,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일군 흙은 다시 양동이에 담아 옮겨야 한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24일 오전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작업이 일손부족으로 일시 중단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은 유해발굴을 위한 청년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발굴 둘째 날인 이날, 박선주 발굴단장(68,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은 “유해 매장지 깊이가 약 1.5미터 정도로 추정된다”며 “현재 주로 참여하는 여성들만으로는 흙을 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대전 및 인근지역에 거주하는 청·장년들의 일손이 절실하다”며 참여를 호소했다. 공동조사단에는 약 20명이 참여하고 있지만 대부분 여대생 등 여성들이다.  공동조사단은 23일 발굴 작업을 시작했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유해가 약 1. 5미터까지 켜켜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관련기사: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  약 1.2미터 아래에 희생자의 다리뼈로 추정되는 유해가 드러났다.(붉은 색 원안). 유해가 깊이 1.5 미터까지 켜켜이 쌓여 잇는 것으로 보인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유해를 훼손하지 않으려면 수작업에 의존해야 한다. 호미와 괭이를 이용, 조심스럽게 흙을 파내고 일군 흙은 다시 ?양동이에 담아 옮겨야 한다. 때문에 땅을 파내려갈 청·장년들의 참여가 요구된다.  공동조사단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23일 오전 10시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