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기사
서울시 “청사 본관 일부해체 추진”-뉴시스(07.09.03)
서울시 “청사 본관 일부해체 추진” 서울시는 새 청사를 건설하면서 등록문화재(52호)로 지정된 건물 전면과 중앙부 돔을 제외한 청사 전체를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현상변경 신고를 냈다고 3일 밝혔다.시가 지난 7월 문화재청에 제출한 ‘등록문화재 현상변경 신고안’은 “(현 본관 건물을) 도서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축물 해체 후 전면 및 중앙부 돔 복원, 내부 신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이 같은 내용의 ‘현상변경 신고안’은 오는 6일로 예정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새로운 설계안은 다음날인 7일 문화재경관 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심의된다.서울시청사는 조선총독부 청사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관청 건물. 건물중앙에 탑이 있는 4층 규모의 이 건물은 2003년 등록문화재(52호)로 지정됐다.시 관계자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건물 전면과 중앙부 돔을 제외하고는 해체할 방침”이라며 “6일로 예정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분과위원회에서 심의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책]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삶’
[책]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삶’(강원일보, 09.09.26)
의병장 허위 선생 기념관 구미서 개관
의병장 허위 선생 기념관 구미서 개관(연합뉴스, 09.09.28)
일제잔재 좌측 보행방식, 90여년만에 우측보행으로 바뀌나-헤럴드(07.09.04)
일제잔재 좌측 보행방식, 90여년만에 우측보행으로 바뀌나 지난 1921년 이후 시행되고 있는 좌측보행 방식을 우측보행으로 변경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4일 건설교통부는 좌측 보행이 신체 특성이나 교통안전, 국제관례 등에 맞지 않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것과 관련해 우측 보행으로 변경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연구용역을 한국교통연구원에 의뢰했다고 밝혔다.건교부는 연구 결과가 우측보행으로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나올 경우 내년부터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범정부적 차원에서 변경작업을 추진, 이르면 오는 2009년부터 시행할 방침이다.우리나라는 최초의 근대적 규정인 1905년 대한제국 규정에서 우측통행을 규정했으나, 조선총독부는 1921년 도로취체규칙을 개정하면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으로 변경했다.이후 미군정은 1946년 차량의 통행방법은 우측으로 변경했지만 사람의 통행방식은 그대로 뒀고 우리나라는 1961년 도로교통법을 제정하면서 ‘보행자는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는 좌측을 통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도로교통법은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의 보행방식을 정한 것이지만 보도내 보행방식이나 지하철 보행통로 등에까지 확대돼 관습적으로 좌측보행이 굳어졌다.건교부가 우측보행 도입 여부에 대한 용역에 착수한 것은 시민단체와 언론 등에서 ▷90%이상이 오른손잡이라는 점과 ▷보도내에서 차와 마주보고 걸어갈 경우 긴급한 순간에 차를 피하기 쉽다는 점 등을 이유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건교부 김정렬 도로교통정책팀장은 “우측보행 주장에 대해 과학적 검증과 국내외 보행실태 조사 등이 필요하다고 보고 연구용역에 착수했다”며 “우측통행이 타당한 것으로 검증되는 경우에도 오랫동안 관습화돼 있는 사항이라는 점 등을 고려해 도입시기와 세부절차 등에 대해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 훼손전 광화문 위치 밝혀졌다-세계일보(07.09.06)
일제 훼손전 광화문 위치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동편에서 발굴한 침목 12개와 시멘 트로 만든 틀 등 길이 9.7m의 전차 선로를 6일 공개했다. 연합뉴스 광화문 일대 발굴조사 결과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광화문의 위치와 규모가 밝혀졌다. 특히 이번 발굴에서 전차 침목이 다수 발견돼 문화재청이 추진 중인 전찻길 복원(세계일보 7월3일자 1면 참조)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고종 2년(1865) 경복궁 재건 때 함께 중건된 광화문(光化門)과 월대(月臺) 터를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철거된 광화문이 경복궁 중심축으로부터 3.75도 틀어져 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원래 광화문은 기단석 기준으로 지금보다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떨어진 아스팔트 도로 60∼70㎝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광화문 앞 광장을 일컫는 월대의 좌우 기단석과 어도(御道·국왕이 다니는 길)도 일부 드러났다. 월대의 동서 폭은 광화문(34.8m)보다 약간 좁은 29.7m였고 남북 길이는 전체 52m 중 8.3m만 발굴됐다. 월대 중앙에 위치한 폭 520㎝의 어도는 광화문의 중앙문(500㎝)과 이어졌다.중앙문을 비롯해 동문, 서문 등 무지개 형태(홍예·虹霓)의 3개 통로를 가진 궁궐 건축물은 광화문이 유일한데, 이는 국왕이 거처하는 대궐(정궁)의 정문이라는 의미이다. 월대 좌우에 있던 난간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문화재청은 최근 경복궁 녹산에서 확인된 동자석을 40개 월대 난간석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이 밖에 경복궁을 둘러싼 궁장(담장) 흔적과 청자, 백자 등 도자기류도 발견됐다.특히 1927년 개통된 세종노선의 침목 13개와 선로 시멘트틀, 목제 전봇대가
“日 정권교체, 위안부 문제 해결할 기회”
“日 정권교체, 위안부 문제 해결할 기회”(연합뉴스, 09.09.24)
아물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의 상처
아물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의 상처(연합뉴스, 09.09.24)
민족일보 조용수 선생 묘소 참배 안내
민족문제연구소 ▲ 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경기 동부지부(지부장 김하욱)는 추석 명절을 맞아 오는 9일 민족일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후 현재 남한산성 안에 모셔져 있는 고 조용수 선생의 묘소를 찾아 참배할 예정이다. (아래 참조) <아래> – 때 : 9월 9일(일) 낮 12시– 모이는 곳 : 경기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 94-1 개미촌 식당 앞(남한산성 내 검복리 주차장 부근)– 문의 : 김하욱 지부장 017-395-0965– 회비 : 1만원– 벌초, 참배 후 점심 식사 예정 조용수 선생은 1961년 2월 13일 평화적 통일과 부정부패 고발, 노동대중의 권익 옹호 등을 목표로 창간된 민족일보의 사장이었다. 민족일보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분출하던 평화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욕구에 부응하며 급성장해 가판 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창간 3개월 만인 5월 19일 박정희 군사반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하고 만다. 관련기사 사법부, 정의의 보루로서 진실 밝히라(한겨레신문, 06.12.03)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45주기 추모식 열려(한겨레신문, 06.12.17)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자처했던 ‘혁명검찰부’는 7월 23일 조용수 사장에 대해 간첩혐의를 적용해 기소하고 이어서 ‘혁명재판부’는 바로 그 해 12월 21일 일사천리로 사형을 집행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민족일보 사건의 진실규명과 조용수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동생 조용준 선생은 법원에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였고 법원은 46년 만인 지난
“비적은 항일군”…유치환 친일시 증거 찾아-오마이뉴스(07.09.05)
"비적은 항일군"…유치환 친일시 증거 찾아 일본 현지서 만주 항일군 토벌·효수 기록 등 발굴 ▲ 관동군 사령부에서 발행한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 전갑생 관동군사령부 유치환의 시 ‘수(首)’에 나오는 ‘비적’을 놓고 몇 년째 친일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또한 내년 유치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 통영시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은 통영시가 친일작가 키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필자는 과연 그가 친일문인인지 아닌지, 다시금 ‘수’를 통해 따져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비적’ 기록을 찾아서 일본을 가다 ▲ 유치환은 극작가인 형 유치진과 함께 친일문인으로 의심받고 있다. 필자는 2004년 10월 5일 <오마이뉴스>에 "유치환 시의 ‘비적’이 항일독립군 아니라고?"라는 글을 통하여 ‘비적’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항일독립군(이하 항일군)이라고 역설하였다. 그 이후 통영시와 보수적인 문인단체인 문인협회 등에서는 ‘비적은 단순한 도둑떼일 뿐이다’라고 본질을 왜곡하였다.또한 유치환을 옹호하는 문인단체와 소속 일부 회원들이 ‘정말 가성네거리에 효수된 사람이 독립군인지 밝혀내라’고 역공을 펼쳤다. 비적이 항일군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세우지도 못한 채 말이다.필자는 ‘비적’이 항일군임을 밝히고자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일본의 방위성 방위연구소, 국립국회도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직접 방문하여 사료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는 고 임종국 선생이 주장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고, 약 3년간 필자가 주장한 대로 ‘비적’이 항일군이었음이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찾아냈다. ▲ 항일군 장조인. 1940년 3월 1일 항일군 장조인이 하얼빈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식민지 관계 청산은 왜 이루어…’
<신간> ‘식민지 관계 청산은 왜 이루어…’(연합뉴스, 09.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