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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독립투쟁의 성지 만주 연해주를 가다

2016년 10월 19일 1416

∷ 회원마당 독립투쟁의 성지 만주 연해주를 가다 정용택 수원지부 회원·경기도교육청역사교육위원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농협에서 후원한 서전서숙 개교 110주년을 기념하여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독립투쟁의 흔적을 찾는 학술답사에 참여하였다. 언론 등을 통해 낯익은 분들이었지만 사적인 만남은 없었던 김삼웅, 서중석, 윤경로, 임헌영 선생 그리고 여러 단체에서 온 17명이 일주일간 동고동락한 뜻 깊은 기회였다. 우리 일행이 다녔던 연해주와 중국 동북부의 지린과 헤이룽장은 한말 동포들이 먹고 살려고 그 땅에 숨어들어가기 전까지는 동물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그런 수풀이거나 황무지였다. 동포들이 들어가 억척스럽게 갈고 가꾸어서 사람이 겨우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갈 무렵 조선은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의하여 망해가고 있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우국지사들은 지지리 못나고 억울하게 쫓겨 간 이들이 일군 땅에서 독립을 도모하였다. 이들이 없었으면 독립운동기지 건설도 없었으리라. 이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신한촌도 북로군정서도 청산리 봉오동 전투도 없었으리라. 답사의 처음 3일간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진행되었다. 이상설, 최재형, 홍범도와 관련된 권업회, 신한촌의 흔적을 보았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수십만명의 동포들이 죽음의 열차를 타야만 했던 라즈돌리노예역(驛)과 이상설 선생 유허비, 전로한족대표자회의가 열렸던 곳, 최재형의 집, 안중근을 비롯한 12인의 단지 동맹비를 돌아보았다. 다음 3일간은 중국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진행되었다. 매일 수백km를 달려서 가고 또 갔다. 서전서숙이 있었던 용정, 왕청현 라자구의 사관양성소, 수분하 대전자지구, 밀산 서일 총재 유적지와 한흥동, 한국독립군과 관련된 동녕현성 등이었다. 이번 답사는 지난해까지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2016년 10월 19일 2493

∷ 회원마당 이 글은 지난 8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미아 회원이 학위논문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 1945~1950년 암시장을 중심으로>를 직접 요약한 것으로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엮은이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박미아 서울서부지부 회원 오늘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반도 출신의 동포들은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의 일반적 호칭 외에도 식민지기와 분단 역사를 반영한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이 정치를 함의를 지닌 채 사용되고 있고, 복잡하고 다양한 존재의 방식을 수렴하고자 하는 의도로 ‘자이니치(在日)’ ‘재일코리안’ 등이 보편적인 용어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정주하게 된 이들의 경제활동을 ‘암시장’이라는 특수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해방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서 최말단의 직업에 종사하거나 강제연행으로 인해 전쟁산업에 종사했던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 경제의 중심축이 붕괴되면서 전면적인 실업상태를 맞이했다. 실업 문제는 일본인에게도 동일한 상황이었으나 조선인 대부분은 해방 이전부터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하는 상태였으므로 실업과 해고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 것이다. 국가의 역량을 전쟁에 총동원했던 군수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패전으로 인해 괴멸되면서 암시장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던 특이한 장이었다. 일부 자산가 및 엘리트를 제외하면 조선인들 중에서 특별한 기술을 지니거나 교육을 받은 이들은 드물었다. 이들은 암시장에서 식량통제에 나선 경찰과 쌀 몇 말 때문에 사투를 벌였고, 밀조 막걸리를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판매하면서 귀국과 정주의 전망

친일 노구의 최후 발악 – 중추원 참의 김윤정

2016년 10월 19일 3163

∷ 열전 친일파·8   윤의사 의거 1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김구 주석 중심으로 윤의사 의거 기념식이 열렸다. 신문에는 의거 당시 홍구공원 전경과 체포된 윤의사 사진, 의거를 소개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런데 윤의사 의거를 다룬 지면 하단에는 또 한사람이 등장한다. 백발이 성성한 수염을 늘어뜨리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노인의 사진. 김윤정(金潤晶, 1869~1949)이다.   친일의 망자(妄者), 등용을 애원 노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괘씸한 친일노구의 최후의 발악 – 시내 필운정 174의 1 김윤정(78)은 소위 한일합병 당시 화성돈(워싱턴) 주미대리공사로 있다 일본 주미공사 日置益(히오키마스)에게 조선공사관을 접수시킨 다음 출신교인 ‘껄레데트’ 대학총장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의 등용추천장을 얻어 조선에 돌아와 태인군수부터 인천부윤을 거쳐 충북지사,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종3위 훈2등의 꼬리표가 붙기까지 왜정에 바친 충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인데, 미군이 진주한 후 하지 중장에게 ‘자기는 친일파도 반역자도 아니니 등용해 달라’는 진정을 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이승만 박사, 김구 총리, 김규식 박사에게 대리공사증서,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장 등에 영문번역을 첨부하여 같은 진정서를 제출했다가 역시 축출을 당하면서도 누차 오만하게도 전화로 회답을 독촉하는 등 면회를 강요하여 27일 제1관구 경찰청에 면회강요죄로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윤정. 〈동아일보〉 1946년 4월 29일 석간 2면.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불과 8개월 남짓 시간이 흐른 때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고, 우리

‘두 개의 얼굴-밀정이냐, 독립투사냐?’ –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의 진실

2016년 10월 19일 8974

∷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20   영화 〈밀정〉. 황옥의 애매모호함을 지우고 독립운동의 판타지를 그렸다 한 부의 보고서 1919년 4월 29일 상해 주재 일본영사는 한 부의 보고서를 받았다. 상해의 조선인들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신임 관리가 작성한 것이었다. 자신을 ‘상해파견원’이라고 밝힌 그는 보고서에서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고용된 조선인 정보원이 불령선인들의 협박으로 사직하면서 정보 수집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명의 밀정을 조선인 사회에 잠입시켜 정보 수집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한 명은 자신이 데려온 밀정 한경순으로, 조선인 청년회에 잠입하여 조선인들의 민적을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완전히 독립운동 동지로 가장하고 상해임시정부 안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상해파견원’은 그가 과격론에 편승하여 교묘히 조선인들에게 채용되었다며 조만간 상당한 정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밀정의 이름은 황옥이었다.최근 영화 〈밀정〉의 개봉으로 일제 식민지시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달아오르고 있다. 작년 영화 〈암살〉의 성공으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는 징크스는 깨지고 이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졌다. 학창시절 외우기 힘든 온갖 단체들의 등장으로 고통을 주었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생생한 영상언어로 치환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닌 새로운 현상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밀정〉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 일명 ‘황옥경부사건’이다. 영화 〈암살〉은 가상의 사건을

악이 차면 새로운 기운과 희망이 생긴다

2016년 10월 19일 1038

∷ 인터뷰 │ 이해학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2010년 야스쿠니반대 도쿄 촛불행동 목회자, 빈민운동가,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공동대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통일맞이 이사. 그 이력들이 말해 주듯이 늘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 이해학 목사를 만났다. 성남에서 주민교회를 개척하여 오랫동안 활동하였는데 그 계기를 물었다. 원래 이 목사는 민주시민들의 의료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성남에 첫 발을 디뎠다. 1971년 위수령이 발동되어 한신대에서 제적을 당했고 박형규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던 한국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서 그를 성남으로 파송하였다. 그런데 정보기관의 사찰이 그의 활동을 가로막았고 군사독재의 감시와 탄압으로 병원 부지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는 합법 공간인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성남에서 지역운동의 핵심적인 터전이 된 주민교회이다. 이 목사는 순복음신학대에 입학을 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흥사단 공개강좌에서 함석헌 선생의 역사신학과 장준하 선생의 민족주의를 접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역사의 토대 위에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미신이고 그 결과는 우상화로 가게 된다. 그래서 참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고 만들어진 신앙, 조작된 신앙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역사적 관점에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아 이 목사는 보수적인 순복음신학대를 뒤로 하고 한신대로 옮기게 된다. 이 목사는 ‘주민이 주인이 되고 주민이 민주화, 통일의 일꾼으로 자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민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열었다. 종교가 힘 있는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2016년 10월 19일 3024

∷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6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정의와 공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작은 밑돌이 되었으면 – 이두황 단죄비 제막 후기

2016년 9월 26일 1885

김재호 전북지부장 기나긴 여름의 끝자락에 묵은 체증을 내려 보냈다. 몇 달 간을 전주의 기린봉 자락을 오르내리며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전북 진안 부귀면에 윤치호 단죄비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데자뷰처럼 4년 후인 2016년 8월13일 같은 날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윤치호 가 한말의 사상가로 사회진화론과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논리에 맥없이 무너지며 민족개조론으로 일제의 침략에 무장해제되어 친일의 길을 걸었다면 이두황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일제 주구로서 선봉대 역할을 자임하며 온 산하에 피를 뿌린 전형적인 실천적 매국노였다. 기린토월(驥麟吐月), 전주 사람들은 전주 완산의 8경중 제1경을 그렇게 불렀다.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이 그만큼 아름다워 그렇게 부른 것이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친일파의 땅을 밟지 않고 달맞이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몇 년전 이두황의 묘를 답사하면서 땅의 소유권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어 기린봉 자락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1만 여평이 넘는 땅이 아직도 친일파 이두황의 직계 후손들에게 소유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두황이 죽은 지 정확히 100년이 지났다. 그리고 전주의 사대문과 조선왕조의 발상지의 위패가 있는 경기전을 지척에 바라보며 100년의 세월이 저리도 불경스럽게 누워있다. 백년만의 단죄(斷罪), 오랜 세월 친일과 식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한국사회에서 역사의식의 부재를 통감하며 단죄비를 세웠다. 전주시에 첫 공문을 보내기 시작한 후 3년 만에 전주시에서도 화답을 보내왔다. 시유지 제공 및 점용허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를 제공하였다. 전주시 추경예산에

열전 친일파·7 조선귀족편, 을사오적의 후손들, 친일과 항일로 갈라서다(2)

2016년 9월 26일 3342

이용창 편찬실장·책임연구원 (지난호에서 이어짐) 박제순의 자작 작위를 이어받은 박부양은 조선귀족이면서 드물게 군수, 중추원 서기관 등의 관직을 지냈고 이런 저런 사업도 벌리면서 좋지 않은 행실로 언론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박부양은 1923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무렵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지방세조사에 관한 사무촉탁으로 일하면서 한성은행의 대주주이자 운송업과 자전거 판매업에도 투자했다. <1931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1929년 3월 설립된 자동차 매매 전문 합자회사 한양자동차상회(사장·대표 이성우)의 사원으로 전체 자본금 1만 2000원 중 1,000원의 지분을 보유했다. 또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주식회사 한성은행의 대주주로 이름을 올려 회사 전체 주식 12만 주 중,880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박부양은 ‘청년귀족’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그야말로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자동차와 자동자전차(오토바이-필자 주)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7월에 농구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자작 박부양’이 회장을 맡았고, 그해 4월에 개최된 제6회 축구대회 위원으로 소개된 ‘박부양’도 동일인으로 보인다. 박부양은 부친 박제순이 매국의 대가로 축적한 재력을 물려받아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고 품행마저 불량해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20살 전후에는 자동차·오토바이를 몰다가 사고를 친 일로 신문지상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동아일보> 1925.12.17. 5면 <매일신보> 1925.12.16. 2면 ‘말썽 많기로 유명한 청년 자작’이 “습작과 유산상속을 받아 요리점 출입, 자동차, 자동자행거(오토바이-필자 주) 타기, 기생 첩 두기로 날을 보내” 관할 동대문경찰서 보안계가 골치를 앓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귀족들은 주로 “금전과

카리브해의 조선인들(2) – 임천택과 헤로니모 임, 이민과 혁명

2016년 9월 26일 4521

김선호 선임연구원 쿠바혁명 1953년 7월 26일, 피델과 라울을 포함한 165명의 청년들이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 자리 잡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이들은 병영과 방송을 장악해 전국적인 봉기의 도화선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습격사건은 실패하였고, 피델과 라울은 체포되어 산티아고감옥에 갇혔다.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은 무모했지만, 쿠바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습격사건을 계기로 쿠바 전역에서 7·26운동으로 불리는 무력투쟁노선이 전면에부각되었다. 헤로니모는 곧바로 이 운동에 합류했다. 피델은 2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1955년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피델은 멕시코에서 이후 자신의 인생과 쿠바혁명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과를 졸업한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였다. 후에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는 이 청년은 과테말라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CIA가 후원하는 반공세력이 과테말라혁명정부를 전복하자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피델과 체는 1956년까지 2년 동안 멕시코에서 게릴라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압제를 피해 멕시코로 망명한 중남미 사회주 의자들을 모아 800명의 혁명군을 창설했다. 피델이 멕시코에서 혁명군을 창설할 때, 헤로니모는 아바나에 있었다. 7·26운동에 합류한 그에게는 수도 아바나의 지하투쟁이 맡겨졌다. 그는 도시에서 비밀리에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지하투쟁을 전개했다. 지하활동 중 가장 큰 위기는 1952년 결혼 직후에 있었다. 바티스타 정부의 경찰과 정보 요원들이 헤로니모의 집을 급습했다. 그러나 바로 전날 우연히 집에 있던 중요 문건과 무기를 옮겨 체포를 모면했다. 헤로니모가 지하투쟁을 지속하던 1956년, 피델과

[기고] 훈장 취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을 찾아가는 여정

2016년 9월 26일 934

박중석 뉴스타파 기자 한때 ‘OO으로 보는 역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를 프리즘 삼아 그 사회와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입니다. 훈장은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이에게 바치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그렇다면 훈장을 통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떨까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전체 서훈 72만 건의 데이터를 다루면서 집중했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면서 이후 세분화된 질문으로 나아갔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재임 12년 동안, 자신과 부통령 이시영 이외엔 김구와 안중근, 윤봉길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일체 건국훈장을 수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는 독립운동가에게도 건국훈장을 수여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친일파에게도 각종 훈포장을 무더기로 수여했는데, 그 의도는 뭘까? 민주주의를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훈장 잔치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이명박은 상훈 내부 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5개월짜리 장관 경질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까닭은 뭘까?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은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 등 헌법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가”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진행된 뉴스타파의 훈장 취재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인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때론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체 서훈 데이터는 72만 건이었습니다. A4 용지로 출력할 경우 2만 5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중 1950년대 서훈자의 경우, 주민번호 등 인적사항이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전체 상훈을 관리하는 정부도 정확한 서훈 명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