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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대법원 판결, “이해승・방응모 친일파 맞다”

2016년 12월 20일 1437

지난 11월 9일 대법원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이해승과 방응모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만 방응모에 대해서는 일부 행위만을 인정해 언론권력에 대한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2009년 반민규명위는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대손 이해승에 대해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으로부터 조선 귀족 중 최고의 지위인 후작 작위와 함께 은사공채 16만8,000원과 한국병합기념장 등을 받았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시통제기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활동한 행적 등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도 이해승이 취득한 서울 은평구 일대 토지를 친일재산이라고 보고 국고환수를 결정했다. 이에 손자 이씨는 “대한제국 황실 종친으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에 불과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등에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냈다. 1심은 이해승의 친일반민족행위는 인정하되, 작위를 받은 행위에 대해서는 “한일합병의 공으로 받은 작위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친일재산결정취소소송에서도 재산을 환수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2011년 특별법 제2조 7호 내용 가운데 ‘한일합병의 공으로’라는 부분을 삭제해 개정하고, 개정법부칙에서 개정 내용을 소급적용하도록 했다. 이씨는 “개정법을 소급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위헌법률 심판제청을 신청했지만, 헌법재판소는 2013년 8월 합헌 결정했다. 이어 2심에서 이해승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고 그의 재산도 환수 대상이 맞다고 판단했다. 원고인 후손 이모 씨는 불복해 친일반민족행위자지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상고했고, 최근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가 원심을 확정한 것이다. 반민규명위는

임종국 선생 추모조형물, 천안 신부공원에 들어서

2016년 12월 20일 1495

임종국 선생 27주기 추모식 및 조형물 제막식이 11월 13일 오후 2시 천안 신부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함세웅 이사장을 비롯해 임헌영 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지철 충남 교육감, 이용길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장,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 아들인 차영조씨, 양승조 국회의원, 김영수 천안시의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또한 유족으로는 임종국 선생의 부인인 이연순 여사, 남동생 임종철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여동생 임경화 여사, 선생의 장녀인 임수연 씨 가족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충남지부와 천안, 아산지회 회원들은 추모식에 앞서 오전 10시 천안공원묘원의 임종국 선생묘소에서 제를 올렸다. 추모식은 임종국 선생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988년 임헌영 소장과 나눈 CBS라디오 〈오늘을 생각하며〉 대담 프로그램의 육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됐다. 폐기종으로 호흡이 고르지 못한 가운데서도 선생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친일파를 등용한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임헌영 소장, 김지철 교육감, 양승조 의원은 추모사에서 한결 같이 ‘평화의 소녀상’과 임종국선생 추모조형물이 들어선 신부공원을 역사교육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나아가 이용길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평화의 소녀상과 임종국 선생 조형물이 세워진 신부공원을 민족문화공원으로 조성하자”고 제안해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유족을 대표해 인사에 나선 임종철 전 서울대 교수는 추모조형물이 만들어져 감격스럽다며 지하에 계신 형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어서 장병화 회장은 추모 조형물 건립에 노고가 컸던 전훈진 천안지회장, 김영수 천안시의원, 다음카카오 스토리펀딩에 ‘역사독립군 임종국’을 연재한 조호진

제10회 임종국상 시상식 열려 – 학술부문 김상숙 박사, 사회부문 조영선 변호사 수상

2016년 12월 20일 1311

제10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11월 11일 오후 7시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회원 및 각계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의 축사, 여인철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설명, 시상 및 수상연설, 임경화 유족대표의 인사말, 함세웅 연구소 이사장의 인사말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6건, 사회·언론 부문 5건 등 총 11건이 올라왔으며, 지난 10월 11일 열린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은 각 부문별로 추천된 후보자들에 대해서 열띤 토론과정을 거쳐 수상자를 결정하였는데, 치열한 경합 끝에 학술부문에 김상숙 박사가, 사회부문에는 조영선 변호사가 수상자로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에는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하여 박찬승 한양대 교수, 장완익 변호사, 정근식 서울대 교수,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조세열 사무총장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김상숙 박사는, 진보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구·경북지역을 근거지로 여성·노동·역사 등 여러 부문에서 오랜 기간 사회운동을 펼쳐온 활동가이자 연구자이다. 특히 2007년부터 4년간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관으로 참여하여 한국전쟁 전후 대구·경북지역의 민간인 희생사건을 규명하는 데 힘썼다. 최근의 노작인 수상저서 『10월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는 그동안 금기시되고 있던 10월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연구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역사의 영역으로 온전히 복원해낸 값진 성과였다. 특히 좌우익을 아우르는 400여 명의 관련자를 면담 취재함으로써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고, 장기항쟁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실상에 접근한 10월항쟁의 역사상을

죽음의 휘파람을 불며 – ‘콰이강의 다리’

2016년 12월 20일 6368

  1941년 12월 8일 일요일, 일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태평양함대의 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태평양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필수자원인 석유, 고무의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은 이들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독일에 항복한 뒤 중부 휴양도시 비시에 새로운 정부를 세운 프랑스는 자국의 주권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네덜란드도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대안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뿐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단행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동남아 일대까지 확산되던 즈음, 일본은 ‘고도국방국가’를 표방하면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최소한 13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와 공장, 광산, 비행장 건설 현장 등으로 끌려갔다. 이들 중에는 군속 신분의 포로감시원도 있었다. 이들은 급속하게 늘어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아시아 태평양 일대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The Bridge on the River Kwai(1957)〉’는 태국 콰이강 철교 건설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연합군 포로를

기증자료소개

2016년 12월 20일 918

심정섭 지도위원 제48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23점 보내와 10월 25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48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광양군지>(2005), <강진향토지>(1980), <역대한국화폐개관>(1960) 등 총 10권의 도서이다. 이 중 한국은행발권부에서발행한 <역대한국화폐개관>은 고려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화폐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화폐의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있는 도서다. 소중한 자료를 기증한 심정섭 위원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식민지 비망록 17, 친일파 기념공간으로 변질된 베델의 집터 – 홍난파 가옥에 가려진 항일의 역사

2016년 9월 26일 5008

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에서 가장 먼저 봄꽃이 피는 곳이 어딘지를 묻는다면 대개는 말문이 막히기 십상이지만, 그 정답은 송월동 언덕마루에 있는 서울기상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관측표준목(觀測標準木)이라는 꽃나무들이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개화 여부를 가늠하는 탓이다. 따라서 우리 집 마당에 또는 근린체육공원에 개나리가 먼저 피었네 마네 하더라도 그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첫눈이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동네에 아무리 함박눈이 내렸더라도 이곳 서울기상관측소에 싸라기눈조차 오지 않았다면 그날 서울지역의 강설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서울기상관측소가 있는 곳을 ‘송월동’이라고 지칭하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자리는 서울도성이 지나는 구간으로 경희궁(신문로 2가) 구역도 함께 걸쳐있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11월 1일에 경성측후소(京城測候所)가 서울도성을 헐어낸 자리에 신축 이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중앙관상대(1948년 8월), 중앙기상대(1982년 1월), 기상청(1990년 12월) 시절을 거쳐 기상청이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신축청사로 이전(1998년 12월)한 뒤로도 옛 측후소 건물은 그대로 남아 서울기상관측소로 사용되고 있는 상태이다. <일본지리풍속대계> 제17권(1930)에 수록된 송월동 월암바위와 홍파동 베델 집터 주변의 옛 전경 사진 원래 송월동(松月洞)이라는 것도 일제가 1914년에 송정동(松亭洞)과 월암동(月巖洞)을 합치면서 어거지로 만들어낸 명칭이다. 일찍이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돈의문밖 서성(西城) 아래에 바위가 있어 깜깜한 밤에도 오히려 밝은 빛이 난다”고 적었는데, 이것이 월암(月巖) 즉, ‘달바위’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멀리서 봐도 매우 밝은 느낌이 나는 암질로 구성된 바위들이 두루 눈에 띄며, 특히 ‘월암동(月巖洞)’이라고 새긴 바위글씨(서울시 문화재자료 제60호, 2014년 6월 26일 지정)도

[기고] 친일문학가들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2016년 11월 28일 2616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발간 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친일문학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수상・제정되는 근원을 짚은 홍기돈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월호에도 게재됐다. -엮은이 친일문학가들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친일문학론』발간 50주년, 우리 시대의 자화상 홍기돈 가톨릭대학교 교수, 문학비평가 지난 해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보고사)가 완역됐다. 2백자 원고지 3만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친일파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해 권력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제주의 4·3은 그 과정에서 왜곡되고 이용당했다.” 이러한 내용의 소설이니, 〈화산도〉에 친일파의 면면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에 관한 부분을 여기 소개한다. “2천6백 년 전에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한 곳이 나라(奈良)의 가시하라(橿原)라는 곳이다. 그곳에 가구야마(香久山)라는 산이 있는데, 자신은 유서 깊은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성을 ‘가야마(香山)’라고 하고, ‘광수(光洙)’의 ‘광(光)’ 자를 따고, ‘수(洙)’는 ‘내지(內地)’ 식으로 하면 ‘랑(郞)’이 되기 때문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했다. 송구스럽지만 읽는 법도 천황폐하처럼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이 조선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자신도 자신의 자손도 천황폐하의 일부로 살아가는 길” – 김석범의 『화산도』 12권 248쪽 ″우리는 반드시 20년 후 돌아온다” 해방 이후,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미국과 손잡은 그들은 1949년 6월 6일 민족주의자들로 결성된 반민특위를 ‘역청산’하기에 이른다. 반민특위 해체 20일 후 경교장(2013년 3월 복원, 강북삼성병원 내 위치-편집자 주)에서 일어난 김구 암살

‘파이팅’은 일제잔재인가?

2016년 11월 22일 16925

지금의 국립국어원이 ‘국립국어연구원’으로 불리던 시절인 지난 2004년 9월, 일상용어의 하나로 깊이 자리매김한 ‘파이팅(화이팅)’에 대한 우리말 대체어를 공모한 결과 ‘아자’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한때나마 여러 매체를 통해 ‘아자 아자’라는 표현이 크게 부각되기도 했으나, 그나마도 최근에 와서는 ‘아자 아자 파이팅’의 형태로 회귀하는 바람에 이 시도는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한번 굳어진 언어습성을 고치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이 당시 ‘파이팅’이라는 말을 고치려고 했던 것은 그것이 당최 국적불명의 용어였던 탓이었다. 영어권에서는 대개 응원구호로 “고 포 잇(Go for it!)”이라거나 “킵 잇 업(Keep it up!)” 정도의 말을 사용하며, 일본과 같은 경우에도 “간바레(がんばれ)” 또는 기껏 “화이토(ファイト; Fight)”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알려진다. 따라서 “파이팅(Fighting!)”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비록 영어식 표현이기는 하나 그 어느 나라에서도 그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용어가 일제잔재라는 얘기도 종종 제기된 바 있었다. 이를 테면 카미카제특공대가 최후 출격을 앞두고 외치는 구호가 바로 ‘파이팅’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뜻도 모르고 함부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사실여부에 대한 고증이 미흡하여 정말 그러했던 것인지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 파이팅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것이 일제잔재와 결부된 결과물이라는 지적은 과연 사실일까? 이에 관한 흔적을 뒤져보면 독립신문 영문판인 <디 인디펜던트(The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2016년 11월 22일 1426

심정섭 지도위원 제47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23점 보내와 9월 23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47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한국신문, 잡지총목록>(1966), <이조오백년사>(1914), <유네스코한국총람>(1957) 등 총 23권의 도서이다.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심정섭 위원께 감사드린다. 오쿠무라 리쓰코(奥村律子)씨, 세번째 자료 기증 오쿠무라 씨가 <조선의 풍모朝鮮の風貌> 1점을 기증했다. 이번이 세 번째 자료기증이다. 이 책은 1940년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경성 부여 경주 등 주요관광지를 소개하고 있다.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통치, 원활한 자원 수탈 그리고 대륙침략을 위한 신속한 운송수단의 확보를 목적으로 철도를 계속 확장해 나갔다. 1940년 철도 지도와 함께 일제가 장악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모지마 요시스케(下嶌義輔)씨, 강제징용의 한 서린 침목 기증 일본 기후현 ‘일제하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회원인 시모지마 요시스케 씨가 침목(枕木) 1점을 기증했다. 침목은 비행기 엔진을 제작하는 나고야 미쓰비시 제4제작소를 이전하기 위해 만든 구구리(久久利) 남산 지하공장 터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약 2,0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 되었고, 1944년 12월 하순부터 공사에 투입되었다. 지난 10월 23일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씨가 연구소를 방문해 전달해주었다. 하라다 히로코(原田廣子)씨, 재조(在朝) 일본인 자료 기증 10월 11일 도쿄에서 열린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집회에서 고려박물관의 하라다 교코 이사장이 친척인 하라다 히로코씨의 소장자료를 기증해주었다. 대구공립고등여학교 교사였던 일본인 가키나가 켄이치(垣永憲一)의 일본 귀환 증명서, 이력서, 귀환 전 한국인에게 토지를 매도한 계약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박물관은

저항에서 친일로 – 일진회 회장 이용구

2016년 11월 22일 13433

열전 친일파·9 김덕영 선임연구원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1912년 일본 스마(須磨)에서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병문안을 온 일본의 우익낭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에게 이 말을 남기고, 얼마 후 병환으로 사망합니다. 1905년 일본에 외교권 위임을 청원한 「일진회 선언서」를 1909년 「한일합방청원서」를 주도한 친일파의 거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치고는 회한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용구는 186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명(初名)은 우필(愚弼)이었으나 후에 상옥(祥玉)으로 개명했고, 청일전쟁 이후에 다시 만식(萬植)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용구는 1904년 진보회(進步會) 결성 직전에 개명한 이름입니다. 동학에 투신하다 이용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니, 당연히 형편이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농사로 근근이 삶을 이어나가던 이용구는 동학(東學)을 만나게 됩니다. 1890년 그가 23살 때의 일입니다. 이런 그에게 동학은 희망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열심히 일했음에도 논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고단한 삶을 사는 이에게 종교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은 조선말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해 불안한 사회상 속에서 태동한 종교였습니다. 동학이라는 이름도 서교(西敎) 즉 천주교를 대신해 동쪽 나라인 조선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한 종교였습니다.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내세운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어 이용구가 입도할 당시인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事人如天)”를 비롯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울이 내재해 있다(物物天事事天)” 등 범천론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