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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위안부’ 기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보류로 진실은 봉인되지 않는다

2018년 1월 9일 1121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는 비참한 망국의 수난자로서 인류역사상 가장 가혹한 상처를 입었다. 일본제국이 탐욕의 침략전쟁을 위해서 전대미문의 일본군 ‘위안부’라는 간악한 꾀를 내고 여성을 전쟁터로 강제로 끌고가 감금과 폭압으로 성노예로 삼아 존엄한 인격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짓밟아 삶을 피폐하게 파괴하여 버린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질렀던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비극적인 불의의 역사를 인류역사에 기록하여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이 정직한 과거청산과 정의로운 역사화해의 첫걸음임에도 가해 전범국 일본이 정의롭지 못한 농간으로 유네스코 등재를 훼방한 것은 일본 자신이 미래를 포기하는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듯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군국 일본은 침략전쟁을 야기하여 ‘전범국’ 오명을 얻었고 죄 없는 자국의 양민들이 막대한 피해와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 아비규환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비겁한 간계로 정의실현을 지연시킨다고 해도 명백한 불의의 역사는 말소할 수 없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시간이 지난다고 면죄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외면하려는가. 미래를 위해서 과거는 묻어버리고 가자며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더 덧내고 힘없는 약자를 얕잡아 우롱하는 양심 없는 무례의 극치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그렇게 두려워서 잔꾀를 부려 어설프게 봉인을 조작하기보다는 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반성하고 용서받고 아픈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화해로 가는 지름길임을 깨우치기를 기대한다. 등재 보류된 ‘위안부’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원만하게 등재하고 지난날 약육강식으로 이웃나라를 괴롭혔던 야만적인 침략역사를

일제에 의해 ‘중류사회의 표준’이 된 삼베수의

2018년 1월 9일 2960

요즘 우리네 일상에서 접하는 수의(壽衣)는 삼베[麻布]를 소재로 한 ‘삼베수의’다. 그런데 본래 삼베라는 소재는 돌아가신 분께 입혀드리는 수의에 쓰는 것이 아니라, 망자(亡者)의 가족과 친척들이 입는 상복(喪服) 소재로 쓰는 것이다. 돌아가신 분과의 혈연적인 친소(親疏) 관계를 따져서 아들이나 딸처럼 가까운 사람은 슬픔[哀]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꾸밀 겨를이 없다는 것을 형상화하기 위해 가장 거칠고 성글게 짠 삼베옷을 입고, 관계가 먼 사람일수록 슬픔이 작기 때문에 조금씩 고운 삼베옷을 입고 바느질도 제대로 한 옷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런데 상주 등이 입어야 하는 거칠기 짝이 없는 삼베옷을 지금 우리는 돌아가신 분께 입히고 있다. 우리네 상장례문화에서 삼베수의가 본격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확인된 것은 1925년 김숙당(金淑堂)이 지은 <조선재봉전서>에서 ‘가는베(細布)’로지으라고 한 것이 처음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베’는 기본적으로 삼베[痲]를 의미한다. 이어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반포한 <의례준칙(儀禮準則)>에서 ‘포목(布木)’으로 수의를 마련하도록 규정하는데, 여기서 ‘포(布)’는 삼베이고 ‘목(木)’은 무명(면)이다. 즉 일제강점기에 삼베수의가 등장하고 총독부에서 이를 백성들이 지켜야 할 준칙으로 규정한 것이다. 준칙을 제정, 공포한 이후 총독부는 각 지방별로 지방의 실정을 반영한 준칙시행서를 발행하게 했고, 수년 간 온갖 조직을 동원해 폭압적인 방식으로 준칙을 실행해나가면서 기존의 풍습 중 준칙과 맞지 않는 것은 ‘단연코 배제하는데 힘쓰고’, ‘확고한 신념과 부단의 노력을 통한 철저한 보급’을 강조한다. 이렇게 삼베수의는 우리네 일상으로 들어와 어느새 “삼베수의가 본래의 우리 전통”이라고

연구소,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 가이드북 제작

2018년 1월 9일 1866

11월 30일, 일본정부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해석전략 보고(2017.12.1)를 앞두고 <한일시민이 함께 만드는 세계유산 가이드북-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노동>(이하‘가이드북’)이 제작, 배포되었다. 이 ‘가이드북’은 우리 연구소와 일본의 ‘강제동원 진상규명네트워크’가 중심이 되어 현지조사와 자료수집을 통해 제작한 것이다.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의 23개 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하며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고 일본정부에 권고했다. 이에 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관련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현지답사 결과 한국인과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의 강제노동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지 시설 안내자들은 ‘강제노동’ 문제에 대한 질문에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라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오히려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는 그들이 배포하고 있는 동영상 「군함도의 진실」을 통해 강제노동을 부정하면서 한국이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가이드북’은 유네스코의 권고에 기초하여 일본정부가 해당시설의 전체 역사를 충실히 밝히고, 강제동원·강제노동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가이드북’에는 일본정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개별 시설의 어두운 역사와 함께 피해자들의 증언이 실려 있다. 독자들이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본의 ‘산업화와 전쟁,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한 ‘산업혁명유산’ 시설 주변에 있는 일본시민들이 만든 각종 추모비를 소개하여 현지 방문자가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에는 식민통치와 강제수용, 노예무역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부정적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기자회견과 청원운동 전개

2018년 1월 9일 1017

11월 3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박정희 출생 100년을 하루 앞둔 11월 13일에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 4m 크기의 박정희 동상을 세울 것이라는 첫 언론보도가 나왔다. 연구소는 즉시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후 11월 6일 연구소 집행위원회(소장, 실국장, 운영위원장단의 회의체)를 소집해 강력 대응키로 결의했다. 우선 뜻을 같이 하는 마포지역 정당,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11월 13일 제막식 저지 집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집회 전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동상 건립의 부당성을 널리 알렸다. 다행히 서울시도 시유지인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내에 동상을 세우려면 서울시 공공미술설치조례에 따라 해당 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동상 건립은 명백한 불법임이 드러났다. 게다가 연구소와 함께 동상 소재지를 파악하던 CBS가 동상 소재지를 독점 보도하여 반대 여론은 급격히 늘어났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상황이 불리해지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측은 당초 동상 제막식을 동상 기증식으로 변경해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연구소와 마포 지역주민들이 조직한 ‘박정희동상 설치 저지 마포비상행동’ 소속 회원 등 100여 명은 13일 오전 10시부터 동상 기증식장 앞 계단에서 1시간 넘게 동상 건립 반대 집회를 열었다.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차라리 황국 군인 동상을 세워라’ ‘헌정질서 파괴주범의 동상이 웬 말이냐’ 등의 피켓을 들고 항의했다. 또한 “지난해 촛불시민혁명으로 적폐청산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금 원조 적폐인 박정희 동상을 서울시민의 땅에 세우겠다는 준동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면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박정희 동상 설치 심의를

제11회 임종국상 시상식과 임종국 선생 28주기 추모식 개최

2018년 1월 9일 1158

제11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11월 10일 오후 7시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회원 및 각계인사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의 축사,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축하영상, 이민우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설명, 시상 그리고 수상자들의 수상연설,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 순으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6건, 사회·언론 부문 6건 등 총 12건이 올라왔으며, 9월 26일 열린 심사위원회에서 열띤 토론과정을 거쳐 학술부문에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가, 사회부문에는 한상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가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하여 박찬승 한양대 교수, 장완익 변호사, 정근식 서울대 교수,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조세열 사무총장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조재곤 교수는 <한국근대사회와보부상><그래서 나는 김옥균을쏘았다><민영환: 대한제국의마지막숨결> 등 다수의 저서를 내놓은 한국근대사 중견 연구자이다. 학술연구뿐만 아니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오랜 기간 민간기구와 정부의 과거사 청산에도 기여해 왔다. 수상저서인『전쟁과인간그리고‘평화’-러일전쟁과한국사회』는러일전쟁에 관한 한·중·일의 연구성과와 자료는 물론 러시아의 사료까지 섭렵하여 분석에 활용함으로써 러일전쟁의 연구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기존의 연구와 달리 전장으로서 한반도와 피해자로서 한국인의 관점에서 주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러일전쟁의 역사상을 재정립한 점이 돋보인다. 사회부문 수상자인 한상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는 대학의 민주화와 친일잔재 청산을 추진하다 해직당하는 등 학술연구와 현실참여를 병행해 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는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회장,

일제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제작 배포한 영문판 식민통치보고서, 애뉴얼 리포트

2018년 1월 9일 2481

강원도 삼척군(三陟郡)에서 상치(尙齒)의 은전(恩典)에 욕(浴)한 최동욱(崔東昱) 외 37명의 양반유생(兩班儒生)은 성은(聖恩)의 우악(優渥)하심을 감격하여 성덕(聖德)을 만세에 전하기로 거월(去月) 3일 천장가절(天長佳節)에 복(卜)하여 동군(同郡) 읍내 서단 죽서루(竹西樓)의 측(側)에 고(高) 8척(尺) 5촌(寸), 폭(幅) 2척 4촌, 후(厚) 8촌의 기념비를 건립하고 기(其) 기석(基石)은 융기한 천연의 대반석(大盤石)을 이용하였다는데, 전면에는 ‘天長地久’ 후면에는 ‘明治 四十四年 十一月 三日 立 天皇在上 葛人西蜀 命我總督 召化南國 恤窮褒節 耆老兩班 勸業省稅 臣民一體 江原道 三陟郡 兩班耆老 崔東昱 金炯國 外 三十六人’이라 서(書)하고, 건립위치는 풍광이 명미(明媚)하고 조망이 절가(絶佳)한 강원도 팔경(八景) 중 유명한 처(處)이라더라. 이것은 <매일신보>1911년12월6일자에수록된「천장지구(天長地久)」제하의기사이다.여기에는 삼척에 사는 ‘얼빠진’ 양반유생들이 천황의 은사금 하사에 감읍한 나머지 그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이때 양반유생의 기로(耆老)로서 은사금을 받은 자가 12,115명이오, 효자절부(孝子節婦)로서 포상은사금의 대상자가 3,209명이며,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으로서 구휼은사금을 받은 이가 무려 70,902명에 달하였다. 위에 나오는 삼척지역의 양반유생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은사금 사령서(辭令書)를 수여받는 장면이 담긴 사진자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이들이 양쪽에 차례대로 도열한 광경이 포착된 이 사진의 출처는 조선총독부가 1911년 12월에 펴낸 <애뉴얼리포트(1910~11년판)>이다. 이 책자는 원래 1908년 12월에 통감부에 의해 ‘1907년판’이 처음 나온 이래로 글자 그대로 해마다 간행된 ‘연차보고서’이다. 이러한

인왕산 자락이 채석장으로 누더기가 된 까닭은?

2017년 11월 16일 3638

<매일신보> 1937년 6월 22일자의 지면에는 임사일(林士一)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연재물 「창의문 밖의 기억」 첫 회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그 다음달 7월 2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분할 연재되었는데, 창의문 밖을 벗어나 부암동 중턱의 무계동천과 윤웅렬 별장에서 시작하여 석파정을 거치고 골짜기 아래의 부침바위, 세검정, 연융대, 홍지문, 보도각 백불(白佛) 일대를 죽 탐방하는 행로가 그려져 있다. 이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듯 아닌 듯 이 일대의 옛 모습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 연재물에는 여기저기 채석장에 관한 언급이 유달리 많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7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4회’ 연재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묘사되어 있다. 부침바위 정면으로 건너편에 새로 지은 한씨(韓氏)의 정자(亭子)를 바라보면서 큰길을 그대로 잡아 내려가면 인왕산 후록 둔부(臀部)에 당(當)할 만한 위치에 채석장(採石場)이 있다. 자하문(紫霞門) 밖에서 채석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이곳이 초입의 채석장이다. 벌써 인왕산의 삼분의 일은 파먹어 들어갔다. 그대로 하여 인왕산을 횡단하면 옥인동(玉仁洞) 아방궁(阿房宮: 윤덕영의 집)의 후정(後庭)이 삼각산을 통거리로 들이마실 것이다. ‘따이나마이트’의 폭발하는 그 소리에 이전 세상 같으면 적군이 대포를 놓고 쳐들어온다고 피난준비에 야단법석이 날 것이다. 이전 세상이 아니라도 그 어마어마한 소리를 처음 들을 때에는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 아이들도 ‘캉’ 소리가 나면 또 돌 깨트렸다고 할 뿐 태연자약이다. 그리하여 자하문 밖 경치는

[기고]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2017년 11월 16일 4871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최초의 신소설 <혈의누> 작가 이인직 (1)

2017년 11월 16일 3614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한 번 맑아지고 땅이 한 번 편안해지매 통서(統緖)를 전하는 데에서 보록(寶籙)을 넓어지게 하였고, 별이 다시 빛나고 바다가 다시 넘실대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서 영전(令典)을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업이 한이 없게 되었고, 척의(尺依)는 점차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상제(上帝)께 밝게 받아서 후인들을 열어주셨습니다. 뇌사(雷肆:書筵)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림에 용안(龍顔)에는 기쁜 빛이 돌고 진저(震邸)에서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는 칭송이 퍼짐에 따라 인지(麟趾) 역시 어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태평을 누릴 아름다움에 응하였기에, 바야흐로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예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자질은 공자의 학문을 세우는 데 부끄러우나, 정성은 요(堯)임금이 되기를 축원하는 데 간절합니다. 사해에서 구가(謳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만리 밖까지 덕스러운 교화가 퍼짐에 모두들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정 5년(1916년-필자)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경학원잡지>제12호에당시경학원사성이었던이인직이일본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으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인직이 신소설의 개척자지만 그 글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빛나는’ 글을 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줍니다. 그의 지향과 정체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을 쓸 때입니다. 숨겨진 행적 최초의 신소설<혈의누(血의淚)>로잘 알려진국초(菊初)이인직(李人稙)은1862년에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산(韓山) 이씨 양경공파(良景公派) 25세손으로 이윤기(李胤耆)와 전주

[소사]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설립과 활동

2017년 11월 16일 1891

지난 9월 25일 교육부는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고석규)를 출범시키고 박근혜정권의 국정화 추진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사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고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거론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한 인물을 생각합니다. 전 재산을 들여 평생 동안 친일연구를 한 임종국 선생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친일연구 과정에서 본인 아버지의 이름도 친일인물로 기록하였던 분입니다. 사실에 기초한 기준 이외 혈연, 지연 등 다른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저 역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위원회가 세운 기준을 존중하고 일관성 있는 조사를 추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임종국 선생이 시대의 귀감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단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컸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에 대한 요구는 연구소 출범 당시부터 조금씩 논의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착수한 계기는 2003년 8월 22일 〈KBS 1TV 인물현대사〉 ‘임종국 편_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연출 김정중)가 방송된 직후부터다. 방송 이후 선생의 대표 저작인 <친일문학론> 판매가 급증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준비에도 힘이 부쳐 기념사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연구소 재정 외에 외부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이 광복군 장이호 선생의 아들이며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던 장병화 가락전자 대표에게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병화 이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회장직을 수락했다. 이후부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