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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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②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선전 주간지 『앞길』에 실린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이다. 이 글은 1937년 3월~5월 사이 제4호부터 제14호까지 총 11편이 연재되었으나 현재 4편의 결락본(4호, 8호, 9호, 12호)이 있어 여기서는 7편만 수록하였다. 일부 한자투는 현대어로 풀어 썼고 판독되지 않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간도 신흥학교 회억-열혈건아 둔전제로 군산추월(羣山秋月)에 독병서(讀兵書)(10)

1919년 기미 3월초에 각 단체 대표 회의를 유하현 고산자에서 개최하던 중에서 3·1운동의 보도와 독립선언문이 내도하매 대표 전체는 환희와 흥분 속에서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하고 회의를 급속 진행하여 각 단체를 일체 해소하고 한족회로 개조하며 자치행정을 전력케 하고 일방으로는 군사에 관한 최고기관으로 서간도군정부를 조직하고 군령(軍令)과 군정(軍政)을 통할하여 군사활동의 준비에 전력케 하였다. 이때야말로 실로 10년간 각고 견인하면서 분투 양성하여 오던 수천 건아의 영용한 위력을 한번 시험할 시기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군비와 무기는 결핍하나 오직 적성과 열혈로 전간도의 주민들은 군사활동 준비에 일치 노력하매 그 진행은 가위 하루 천리지세(千里之勢)로 진전되었다.

3·1운동은 5천년 역사를 계승하여 오던 조국을 이족 일본에게 강탈당한 후 10년간 절치통한(切齒痛恨)하며 설욕 광복하고자 밤낮 고심하던 조선민족의 획기적 운동이라. 그리하여 내지동포의 맨손으로 적에 대항함이 장렬한 운동에 응하여 만주와 러시아의 수백만 교포들은 병력으로써 적을 섬멸하고자 무장대오 의 편성 훈련에 전력하였다.

이에 신흥학교는 간도사회의 중심이 되어 10년간 세력 양성한 천여의 군인을 기본 삼고 또다시 내지로서 잇따라 도래하는 열혈청년과 본지에서 농구를 던지고 일어나는 농촌장·소년 등 사오백 인을 모집하여 6개월을 1기로 삼고 3개 처소로 나누어 훈련하였다. 제1부는 약 200명을 선발하여 유하현 고산자 본교에서 윤기섭, 성준용 선생이 부책(負責. 교장 이세영 선생은 군정부 직무에 분망하므로 윤기섭 선생이 교장의 직무를 대리하였다) 훈련하고, 제2부 약 200인은 통화현 합니하 전교사(지주 중국인 장구경 선생이 무상 임대해 주었다)에서 양규열 씨(무관학교 출신으로서 한국시대 장교인데 수년 전부터 신흥학교에서 교무를 담임하였다)로 부책 훈련케 하고, 제3부 백여 인은 통화현 쾌당무자에서(고산자 본교에서 약 170리, 합니하에서 약 100리 되는 통화현 남방) 김창환 선생으로 부책 훈련케 하고 군정부에서는 작전군의 편성 및 작전에 관한 계획과 후방 책원지의 방어준비와 군비 및 무기 조달에 전력하였다.

이때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10개 조의 임시헌장의 발포 보도가 도달되자 서간도군정부에서는 “한 나라의 독립운동에 당하여 수개의 정부가 동시에 각지에 병립함은 곧 운동의 통일지도와 또는 우방의 원조를 얻는 데 극히 불리한 바이라” 하여 이탁·왕삼덕(윤기섭 선생이 대표로 선임되었었으나 그는 교무에 전력하고자 하여 대표를 사면한 까닭이다) 양씨를 대표로 삼아 상해에 파송하여 임시정부와 협의한 결과 군정부를 서간도군정서로 개조하고 군사상 절실한 연계를 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군사의 준비를 착착 진행 중 동년 여름에 일본에서 이청천·김경천(다 적 일본의 군대에서 복무하던 현역 장교로서 3·1운동 후에 탈주 도래하여 광복운동에 참가하기로 한 이), 내지에서 신팔균(한국시대의 장교), 상해에서 이범석·배천택(다 운남강무당학교 졸업생) 제씨가 내도함으로 이청천·김경천·이범석 제씨는 신흥학교에서 배천택·신팔균 제씨는 군정서에서 복무케 하였다.

《정정》 앞의 『앞길』 제9호 상단 제31행 “수만여 호의 이주민을 통할하였다”의 아래에 하기(下記) 한 단락이 인쇄부의 과오로 탈락되었기에 첨입 정정함.

“이와 같이 각 구역에 자치행정이 실시되며 소학교와 노동야학이 울흥(蔚興)하게 되매 신흥학교는 4, 5년간 훈련하였던 수십 청년의 투사를 선발하여 각 구역 학교의 교육임무를 분담케 하고 이 교육기관을 중심삼아 일방으로는 농한(農閑)과 야간을 이용하여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일반주민에게 군인정신을 보급시키며, 일방으로는 촌민을 유도 부축하여 자치행정을 협조케 하고, 일방으로는 신흥학교의 졸업생으로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여 교사 성준용(玄圍 호) 선생(학우단장을 겸임)의 직접 지도하에서 장교단의 책임을 지고 각 구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의 조직지도에 전력하여 군의 편성훈련과 군사행정의 기초를 정초하였다.”

『앞길』 제13호(1937.5.24)

간도 신흥학교 회억-열혈건아 둔전제로 군산추월(羣山秋月)에 독병서(讀兵書)(완)

이에 서간도의 군사진행의 성세가 날로 높아가매 적 일본은 내지 각처에서 일어나는 운동 대중의 학살도륙에 광분하던 중 일방으로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독립군의 진공을 위하여 우선 당지 관헌에게 신흥학교의 해산과 독립운동의 금지를 엄중 교섭하며 일변으로는 직접 출병 진공 기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간도에서 10년간 준비하던 군민(軍民) 전체와 내지에 비절장절(悲絶壯絶)한 투쟁을 하다가 도래한 청년 용사들은 적을 일거에 섬멸할 결심과 용기가 충일하므로 조금도 기탄 동요함이 없이 일의(一意) 분투하였다.

청조 말엽의 부패한 정치로 인한 인민의 불평을 대변하고 낙초(落草)한 녹림호객(綠林豪客)의 억강부약(抑强扶約)하던 의협의 본색을 모두 잃고 약탈만을 일삼는 만주마적은 신흥학교에 무기와 금전이 풍부히 저장되어 있다는 풍설을 듣고 이를 약탈하고자 각방(各幇. 마적 집단)은 제각기 내습하려 한다는 정보가 밤낮으로 보도되매 일반학생 그 중 더욱 만주마적은 살인을 밥먹듯 한다는 전설만을 들은, 내지에서 새로 온 학생들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여 건강이 해롭고 마음이 겉돌아 학술 훈련에 적지 않은 장애를 받게 되매, 교장대리 윤기섭 선생은 이를 우려하여 학생에게 타이르길 마적의 목적은 물질약탈에 있고 인명살상에 있는 것이 아니니 우리가 불행히 그들의 습격을 당할지라도 약간의 물질손실은 당할지라도 생명의 위해는 없을 것이요.

만일 그들과 충돌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들 방어에 여념이 없게 될지라. 이는 우리의 목적하는 일에 막대한 손실을 받을 것이요. 또 설사 약간의 물질손해를 당하거나 신체 상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두려움 없는 정신을 가지고 적 일본을 섬멸하고자 용왕 매진하는 우리로서 그만한 풍설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심란하고 건강을 해침은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니니 각자 안심하고 학술과에 전심전력하여 소기 목표를 향하여 일의(一意) 매진하자고 독려하매 전체 학생은 다시 태연 진정되어 학술연습에 진력하였다.

이해 여름에 마적의 야습을 당하여 윤기섭 선생과 교사 1명, 학생 3명이 인질로 피랍되었다가 약 1주일 만에 4인은 탈출 귀교하였고, 윤기섭 선생만은 마적에게 구금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러한 중 교내에서는 일부 학생과 몇몇 교사의 혈기적 과오로 일대 사변이 발생하여 교장 이세영 씨는 면직당하고 약간의 교사와 학생은 형벌을 피해 도피하고 왜적은 이 사변을 기회삼아 직접 간섭하고자 하매 나머지 학생은 각자 흩어지고 학교는 부득이 자동 폐쇄되어 적잖은 곡절을 당하게 되었다. 적굴(賊窟)에 구금되어 이 사정을 듣지 못하고 밤낮 악형을 당하다가 40여 일만에 석방되어 돌아온 윤기섭 선생은 비로소 이 정경을 보고 몹시 통심하였다.

그러나 학교는 일시라도 정지할 수 없다 하여 이에 학교대장(學校隊長) 성준용 선생과 의논하고 곧 군정서에 요구하여 또 즉시 학생 백 여 인을 모집하여 그해 연말까지 훈련을 마쳤다. 그러나 적세(敵勢)는 더욱 침습되어 간도에서도 군사훈련을 종전과 같이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1920년 초에 군정서는 그 훈련방침을 변경하여 우선 졸업생 중 수백 인을 선발하여 교성대(敎成隊)를 편성하여 합니하에 집중 훈련케 하고 성준용 선생(윤기섭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상해로 갔다)을 대표로 북간도에 파송하여 일방으로는 제2수용지를 선정케 하고 일방으로는 북군정서(김좌진, 이장[동]녕, 현천묵, 서일 등 제씨가 3·1운동 후부터 왕청지방에서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수백 인의 군인을 양성하며 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준비에 전력하였다) 및 기타 독립운동기관을 연결케 하였다.

이에 성준용 선생은 동료 수인을 데리고 북간도로 향하다가 백두산 밑 안도현에 이르러 제2수용지를 택정하고 북군정서로 가서 양자 합동 행동하기를 약정하고 기타 각 기관과 연락을 취하게 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하매 동년 초가을에 교성대는 안도현으로 이둔케 하고 성준용 선생은 북군정서와 합동 행동을 실현하기 위하여 다시 북간도로 향하였다. 이러한 때에 적병은 서북 양간도에 직접 침입하여 무참한 대학살과 방화를 감행하였고, 서북간도의 각 독립군의 대부분은 백두산 밑으로 각자 집중되었다.

북간도에 침입한 적군은 다시 백두산에 집중된 독립군을 침구(侵冦)하며 각 독립군은 협동 진격하여 적군을 수차례 대파하였으나 중 과(衆寡)가 너무 현격하고 또 엄동설한에 의복과 수면 장구 및 식량 결핍으로 그곳에서 지지 하기 불능함으로 부득이 후방으로 일시 퇴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독립군은 연합하여 대한독립군을 편성하여 중동철로 이북 길림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였다가 1921년에 러시아 연해주로 이입하여 소련의 원조로 러시아에 있는 독립군과 함께 흑하(자유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불행히 이곳에서 소위 흑하사변을 당한 후 그 일부는 다시 만주로 각자 산회하여 각지에 잠재하여 계속 활동하였고, 기타 일부는 서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까지 전입하였다. 그러나 이도 또한 왜적의 교섭과 소련의 대일정책에 의하여 소련에게 해산의 치욕을 당하였다. 오호라 국인(國人)의 애통이여! 일마다 실패이며 도처에 치욕이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운동자 중에 잔살(殘殺), 파괴, 함해(陷害) 등 반혁명의 행위를 감행하는 자가 아직까지 끊이지 아니하니 이 망국노의 아픈 멍에는 언제나 벗어버리게 되겠느냐! 이것이 참으로 통곡할 일이로다.

이와 같이 최초의 서간도 경영은 10년간 분투의 결과 예기한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부민단-한족회의 여정진치(勵精盡治)로 만주 교포의 자치단체 경영은 만주교포에게 군인정신 보급과 무장대오의 기간(基幹)을 세웠고 따라서 그들은 내외 각지에 산처하여 독립운동에 열렬한 희생이 되었으며 또는 희생적 분투를 계속하고 있는 이가 적지 아니하다. 이는 우리 운동 전도에 한 줄기의 힘이며 이는 우리 운동사상에 한 부분의 빛이다.

『앞길』 제14호(1937.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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