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있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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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9]

망우리공원에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1936년)’가 남아있는 사연
이른바 ‘문화주택지’의 등장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서울 주변 공동묘지들

이순우 특임연구원

예로부터 서울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구분 지을 때 사용하는 용어의 하나로 ‘성저십리(城底十里)’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를 달리 ‘경성십리(京城十里)’라거나 ‘도성십리(都城十里)’ 또는 ‘성외십리(城外十里)’라고 적기도 한다. 일찍이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의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대목에도 ‘성저십리’ 항목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그 범주를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楊州 松溪院, 지금의 묵동) 및 대현(大峴)에 이르며, 서쪽으로 양화도(楊花渡, 양화나루) 및 고양 덕수원(高陽 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으로 한강(漢江) 및 노도(露渡, 노량진)에 이른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곳은 사산금표(四山禁標)가 적용되는 구간이며, 무엇보다도 금장(禁葬)과 금송(禁松) 등의 규칙이 엄격하게 집행되는 공간이었다. 조선 철종 때의 문헌자료인 『경조부지(京兆府誌)』에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一, 도성십리(都城十里) 안에서는 투장(偸葬, 몰래 묘를 쓰는 것)을 금단(禁斷)한다.
一, 경성십리(京城十里) 내에 입장(入葬; 죽은 이의 장사를 지내는 일)을 하면 원릉(園陵)의 수목(樹木)을 훔치는 율(律)에 의해 논죄(論罪)하며, 기한을 정해 억지로 파서 옮기도록 한다. 본부(本府)에서는 송사(訟事)로 인해 발각된 것과 특교(特敎)로 적간(摘奸)하여 옮기도록 한 것 이외에 투장(偸葬) 등의 일은 군문(軍門)과 사도(四道)에 이속(移屬)하여 이를 거행토록 한다.

이러한 원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도 도성 주변에다 밤에 몰래 묫자리를 쓰는 행위에 대한 단속이 이뤄진 흔적은 어렵잖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4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투장가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서서 금계정은 자래로 분명한 금산자내어늘 준준한 무식지배가 승야 투장하여 북망산을 만드니 그 형세가 그저 둘 수 없는지라, 불가불 파 옮기려니와 진즉 금지치 못한 죄책으로 해서 경찰관도 또한 반드시 벌이 있으니라 하더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1905년 5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을 보면, ‘장매위범률(葬埋違犯律)’ 항목에 “제448조 경성십리내(京城十里內)에 입장(入葬)한 자(者)는 징역 3년(懲役 三年)에 처(處)함이라” 라는 처벌규정이 엄연히 적용되고 있던 사실이 눈에 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성저오리 구역 내에서는 —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 무덤 하나 들어서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판국이었고, 하물며 공동묘지(共同墓地)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여지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형법대전(刑法大全)』 (1906)에는 “경성 10리 내에 묘를 쓰는 자는 징역 3년에 처한다”는 구절이 엄연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00년을 막 넘어가는 시점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서울도성 주변은 사방이 온통 공동묘지의 군락으로 포위된 형태로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이처럼 엄격한 법령의 존재에도 불구 하고 근대시기에 이르러 서울 주변 일대가 무덤들 천지로 변모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그 무엇이 단초가 되었는지는 가려내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외세가 밀려드는 와중에 대한제국 정부의 행정통제력이 크게 약화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1902년 5월에는 점차 득세하고 있던 일본인 거류민들에 의해 광희문(光熙門) 바로 외곽에 화장장이 설치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서울도성 인접지역에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들어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흔적인 듯하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경성거류민단역소(京城居留民團役所)에서 편찬한 『경성발달사(京城發達史)』(1912), 105~106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 아 있다.

화장장(火葬場)은 우리(즉, 일본인) 거류지(居留地) 다년(多年)의 문제였지만, 마침내 본년(本年, 1901년) 4월에 들어 우리 미마스 영사(三增領事)는 한성부윤(漢城府尹)과 교섭의 결과, 수구문외(水口門外)의 송림(松林) 사이에 70여 평(坪)의 땅을 차수(借受)하고, 와다(和田), 야마구치(山口), 야마자키(山崎), 코죠(古城), 모리(森) 등의 제씨(諸氏) 발기(勃起)로 주선인(周旋人)으로 삼아 1,200원여(圓餘)의 기부금(寄附金)을 모집하여 화장장의 건축을 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묘지(墓地)의 제정(制定)이 없으므로 화장(火葬)에 붙인 뒤에는 그 유골(遺骨)을 각자 신봉(信奉)하는 바대로 경성(京城)에 있는 우리 사원(寺院)에 봉납하거나 또는 향리(鄕里)의 묘지(墓地)로 보낼 수밖에 없음은 유감(遺憾)이다.

여기에는 아직 광희문 밖 공동묘지(통칭 ‘신당리공동묘지’)는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묘사되어 있으나, 그 직후의 시점인 1906년이 되어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1, 2번지와 그 부근의 갈월리(葛月里)에 3,067평의 땅을 사들여 일반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에게 대여했다가 1914년 3월 31일 일본거류민단(日本居留民團)이 해체(解體)될 때 이를 폐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 다. 이와는 별도로 러일전쟁 직후 장차 일본군대가 영구 주둔할 후보지로 이른바 ‘용산군용지(龍山軍用地)’를 징발 수용할 당시에 이 구역 안에서만 무려 1만여 기(基)에 달하는 무덤이 잔뜩 포진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황성신문』 1907년 7월 5일자에 게재된 인명의숙 창립자 정재홍(仁明義塾 創立者 鄭在洪)의 장의안내광고(葬儀案內廣告)를 보면, “…… 하오(下午) 1시에 정동교당(貞洞敎堂)에서 장의(葬儀)를 거행하고 동(同) 3시에 남문외 아현공동묘지(南門外 阿峴共同墓地)에서 매장(埋葬)하올 예정이오니 …… 운운” 하는 구절이 남아 있다. 요컨대, 적어도 법률상의 제한과 처벌조항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저십리 구역 내에서의 금장(禁葬) 조치는 불과 수년 사이에 완전히 효력을 상실하여 사실상 사문화(死文化)의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경술국치’로 인해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개시되던 그 시점에는 이미 서울도성의 사방이 모두 공동묘지의 군락으로 포위되어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관보』 1913년 9월 6일자에 게재된 「(경성부 지역) 공동묘지 설치허가」를 살펴보면 그 명단들이 망라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미아리공동묘지, 이문동공동묘지, 수철리공동묘지, 신당리공동묘지, 이태원공동묘지, 아현리공동묘지(봉학산), 염리공동묘지(쌍룡산), 신사리공동묘지 등 제법 익숙한 명칭의 공동묘지가 두루 나열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이들 공동묘지의 ‘허가연월일’이 일괄하여 ‘1913년 9월 1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는 1912년 6월 20일에 제정된 조선총독부령 제123호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취체규칙(墓地, 火葬場, 埋葬 及 火 葬取締規則)」의 시행일(경성부 지역)이 바로 이날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풀이되며, 이 규칙의 부칙에 “본령 시행할 때 현존하는 공동묘지는 본령에 의해 설치한 것으로 간주함”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각각의 묘지가 개설된 날짜가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울 지역 공동묘지의 변천사를 죽 훑어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측면이 포착된다. 우선은 그것들의 수명(즉, 사용연한)이 생각만큼 길지 않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예를 들어, 신당리묘지는 1928년 11월에, 이태원묘지는 1931년 4월에, 아현리묘지는 1932년 5월에, 수철리묘지와 염리묘지는 1937년 4월에 더 이상 무덤을 쓸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각각 매장이 금지되거나 묘지 자체가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들 공동묘지의 수명이란 것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여 년 남짓에 불과했던 셈이다.

이와 아울러 — 지극히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 공동묘지의 위치가 서울도성의 인접지에서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는 추세를 나타내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의 하나이다. 경성부의 인구팽창과 더불어 성외지역(城外地域)으로 계속 주거지의 확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더구나 경성부청(京城府廳)의 입장에서는 각종 시책사업에 투입되는 예산액의 부족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공동묘지 지역을 주택지(住宅地)로 전환하여 이를 방매처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공동묘지 자체를 죽은 이들의 영원한 안식처라기보다는 재원마련을 위한 하나의 수익창구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따라 가장 규모가 컸던 이태원공동묘지(梨泰院共同墓地)와 같은 곳에서는 일찍이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벌써 이 지역 전체를 문화주택지(文化住宅地)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구체화한 흔적이 눈에 띈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신문』 1930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세키미즈 전 부윤(關水 前府尹) 치토산(置土産, 오키미야게)의 남산 산록(南山 山麓) 2천여 만평(萬坪), 머지않아 총독부(總督府)에서 불하결정(拂下決定), 신경성(新京城)의 문화주택지(文化住宅地) 출현(出現)」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앞서 경성부(京城府)가 협의회(協議會)의 정식자문(正式諮問)을 거쳐 총독부(總督府)에 평당(坪當) 1원(圓) 50전(錢) 이내(以內)로
△ 13만 평(坪)의 불하(拂下) 처리를 신청중(申請中)인 남산 남산록 불하(南山 南山麓 拂下)의 건(件)은 세키미즈 전 부윤(關水 前府尹)이 총독부 산림부(山林部)와 최후적 교섭(最後的 交涉)의 결과(結果), 산림부 당국도 대경성 건설(大京城 建設)을 적극적 원조(積極的 援助)하는 의미(意味)로 고양군 한지면 소재(高陽郡 漢芝面 所在)의 국유임야(國有林野), 즉 남산 남산록 13만 평을 평당 99전여(錢餘, 입목을 포함)로 경성부에 불하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목하(目下) 총독부 내무국(內務局)에 회송(廻送)하고 기본재산(基本財産)으로서의 축적방법(蓄積方法) 기타를 심의중(審議中)이며, 머지않아 부민(府民)의 요망(要望)과 같이 99전 남짓의 안치(安値, 싼 가격)로써 기본재산으로 하여 불하를 주는 것으로 되었는데, 부(府)에서는 우(右) 국유임야의 불하에 보다 이상가치(以上價値)를 부여하고자 이곳에 인접(隣接)한 이태원(梨泰院)
△ 부유묘지(府有墓地)를 이전개장(移轉改葬)하고 그 적지(跡地)의 10만 평(坪)을 주택지(住宅地)로 개방(開放)하여 새로 불하를 받을 남산 산록 13만 평(坪)과 아울러 23만여 평(坪)의 신시가지 건설(新市街地 建設)에 착수하는 것으로 결정(決定), 더구나 목하(目下) 총독부에 신청중인 남산 남측(南山 南側)
△ 국유임야(國有林野)를 공원지(公園地)로서 무상대하(無償貸下)하는 건(件)도 총독부의 양해(諒解)를 얻은 모양(模樣)이므로 이것과 서로 어울려서 신경성(新京城)의 출현(出現)도 점점 더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1년 3월 28일에는 경성부 고시 제19호를 통해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동, 한강동, 보광리 소재 이태원묘지에 있어서 매장은 소화 6년(1931년) 4월 1일 이후로는 이를 인허(認許)하지 않음”이라는 내용이 공표되었다. 이와 아울러 이에 대한 대체공간으로 삼고자 시급히 마련된 곳이 바로 ‘망우리공동묘지(忘憂里共同墓地; 1933.9.8일 신설)’였다.

그런데 새롭게 마련된 공동묘지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공동묘지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경성부가 재정결핍을 타개하는 돈벌이 수단의 하나로 고안한 방책이었다는 점은 『매일신보』 1931년 5월 9일자에 수록된 「망우리 전 도유산림(忘憂里 前 道有山林) 불하운동(拂下運動)에 주력(注力), 미아리묘지도 불원하여 충만, 공동묘지(共同墓地)로써 이용(利用)」 제하의 기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재정결핍(財政缺乏)이 절정에 달한 오늘에 있어서 이에 타개책(打開策)으로는 오직 국유임야(國有林野)를 불하하여 사업을 일으키어 돈벌이를 하는 것이 다만 하나의 첩경로(捷經路)이라고 생각한 경성부 당국자들은 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며 제1차로 주택지(住宅地)의 계획을 세워가지고 불하운동에 착수하였던 남산(南山) 뒤 대국유임야의 불하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2단으로 불하운동에 착수한 경춘가도(京春街道) 망우리(忘憂里)에 있는 도유림(道有林) 75만여 평의 불하운동도 이미 도당국의 양해도 성립되며 한 평에 약 8전씩 6만 원가량에 불하하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그 용도(用途)에 대하여 숙고(熟考)한 나머지 무럭무럭 자라나는 대경성의 백년대계(百年大計)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다만 하나의 미아리(彌阿里) 공동묘지도 불과 수년이면 이 역시 만원(滿員)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것도 공동묘지로 사용하기로 하는 동시에 일방으로 구 공동묘지이던 시외 이태원(梨泰院)의 105,120평, 아현리(阿峴里) 40,020평의 분묘를 철폐하고 이 역시 주택지를 건설하여 재정완화에 이바지하기로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이태원공동묘지는 “불원(不 遠) 다른 곳으로 이전 개장(移轉 改葬)이 부득이”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우선 1935년 4월 6일부터 9월 30일까지 기한을 정하여 묘지내 분묘의 관리인 또는 연고자로 하여금 분묘신고용지(墳墓申告用紙)를 제출토록 하였다. 그리고 해를 바꿔 1936년 4월 1일이 되자 “도시계획 탓에 이태원공동묘지의 이전 개장이 결정되었으므로 그해 10월 10일을 기한으로 삼아 개장인허증(改葬認許證)을 발급받아 분묘을 이장할 것”을 종용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물론 이 기간 내에 개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잔존 무덤을 전부 무연분묘(無緣墳墓)로 간주하여 경성부에서 직접 개장 집행을 할 것이라는 예고도 함께 곁들여졌다. 그리고 관리인 또는 연고자에 의해 묘지 이장이 이뤄지는 경우, 각 무덤에 대해 피장자(被葬者)가 대인(大人)이면 6원, 소인(小人)이면 3원의 비용을 지불하여 다른 공동묘지로 옮겨가거나 화장 처리의 방식으로 택하도록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이러한 절차를 밟아 정상적으로 묘지를 수습하여 옮긴 것보다 주인 없는 무덤으로 남겨진 이른바 ‘무연분묘(無緣墳墓)’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35년 4월 26일자에 수록된 「이태원(梨泰院)이 4만(四萬) 분묘(墳墓), 무연묘(無緣墓)가 7할여(七割餘), 아총(兒塚)만이 2만 7천 5백여(餘), 주택지(住宅地) 만들려고 굴총공고(掘塚公告)」 제하의 기사에는 그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이승을 버리고 저승의 손이 되어 척신이 부외 이태원공동묘지에 파묻혔던 4만여 명의 시체는 주접한 한 줌의 흙도 제 것이 못되어 어디로 이장케 될 운명에 당면하고 있다. 그는 4년 전 공동묘지가 대만원을 이루어 매장을 폐지한 이후로 그의 인접지는 날로 주택지로 화하여 이를 소유한 경성부로서는 장차 그를 주택지로 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의 이전개장은 경성부와 또는 연구자의 손에 장차 집행될 모양이라는데 경성부는 방금 그의 준비로 연고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중 그중에는 상당히 유명한 사람들의 시체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의 시체는 대정 3년(1914년) 10월 이 땅에 공동묘지를 개설한 이래 소화 6년(1931년) 3월 말일까지 공동묘지를 폐지한 때까지 전후 17년 동안에 그에 파묻힌 시체는 대인이 13,764, 소아가 27,557이다. 그중에는 연고자가 있는 것은 겨우 2할 5푼밖에 아니 되고 그밖에 7할 5푼가량은 거의 연고자가 없는 무연묘(無緣墓)라 한다. 그의 생전 이승에서도 의식이 곤란하여 주접할 안주지가 없어 넓은 이 땅 위에 유랑하는 한과 고독의 불쌍한 사람들과 또는 세상에 나와 철도 나기 전에 애달프게도 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더욱 많은 까닭이라 한다. 봄도 저물어가 모춘, 구천지하에서 오래 눈 감고 있던 그들의 수난은 그들의 유족들에게 애도의 정을 이끌어 마지않는 중이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 이들 무연분묘 3만여 기(基)에 대해서는 1936년 10월 11일에 위령법회(慰靈法會)가 집행된 것을 신호로 하여 경성부 당국에서 일괄 개장 작업에 착수하였고, 특히 이들 가운데 전혀 형적도 없는 무덤으로 연고자가 전연 없을 듯한 것에 대해서는 망우리공동묘지에 합장(合葬)처리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이러한 무연분묘 처리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利泰院墓地無緣墳墓合葬碑;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34번지 망우리공원)’이다.

이 묘비석의 뒷면에는 “소화 11년(1936년) 12월, 경성부(昭和十一年 十二月 京城府)”라는 표시가 남아 있지만, 실제로 이 비석이 건립 제막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37년 6월 9일의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9일자에 수록된 「역려인생(逆旅人生)의 간 자취, 적료무연(寂廖無緣)의 일배토(一坏土)들, 망우리(忘憂里)에 개장(改葬)된 무연분묘(無緣墳墓) 2만 8천 기(基), 경성부(京城府)에서 위령제(慰靈祭)」 제하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경성부 위생과에서는 이태원공동묘지(梨泰院共同墓地) 제1묘지에서 무연분묘와 유연분묘를 지난 4월 8일까지 전부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楊州郡 九里面 忘憂里)묘지에 개장(改葬)을 필하였으므로 9일 오후 2시부터 망우리묘지 안에 서 전기의 이태원으로부터 개장되어 온 분묘에 대하여 위령제(慰靈祭)를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거행하리라는데 연고자가 있는 분묘 4,778기는 망우리에 개장된 것도 있고 다른 지대로 개장된 곳도 있지마는 연고자가 없는 28,338기는 전부 망우리에 개장되었으므로 이들의 영혼은 9일의 위령제를 받으면 다시는 술 한 잔도 부어줄 사람이 없는 무연고총(無緣故塚)의 가련한 영혼들이라 한다.
[저주(咀呪) 받는 도시(都市), 조취모산(朝聚暮散)이 주원인(主原因)]
전기의 이태원공동묘지는 대정(大正) 3년(1914년) 7월 6일 즉 지금부터 24년 전에 창설된 것으로서 전기한 바와 같이 무연고총이 28,338기나 된다는 것은 그 가운데 행려병 사망자(行旅病 死亡者)와 유치아의 백골도 있다는데 도시에 오는 사람도 많지마는 도시를 저주하고 떠나가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그들의 대부분은 일정한 곳에서 주거하지 못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이 되고만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 전기의 개장문제는 오래전부터 광고와 갖은 수단으로 연고자를 찾았어도 종내 이와 같은 무연고총이 있었다는 데서 짐작되는 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4만여 기가 넘는 무덤들이 몽땅 사라진 ‘이태원공동묘지’는 그 이후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폐허지(廢墟址)로 남은 이곳은 당초 경성부 당국에서 의도한 바와 같이 장차 부촌(富村)의 상징이 될 거대한 문화주택지(文化住宅地)로 서서히 변모되어 갔는데, 예상대로 다수의 분양업자들이 이곳을 주목하여 불하(拂下)요청이 쇄도하는 통에 자연히 땅값마저 크게 올라가는 결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지점에 노고산장택지경영주식회사에서 건립한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京西老姑山遷骨聚葬碑, 1938년 9월)’란 것이 남아 있다. 이 역시 건립주체는 비록 조선인들이었지만, 경성 인접지역의 공동묘지를 파헤치고 문화주택지를 건립하면서 생겨난 부산물의 하나이다.

이로 인해 불과 수년 사이에 이 일대는 문화주택과 상점 건물이 속속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곳의 소유자는 절대다수가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의 몫으로 돌아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 1938년 11월 29일자에 수록된 「세궁민(細窮民)은 쫓겨나고 문화주택(文化住宅)만 격증(激增), 남산주회도로 부근(南山周廻道路 附近)에」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경남(京南)] 남산주회도로의 개통을 목전에 두고 경남 일대의 발전상은 괄목할 것이 있는데 금번 이 도로는 주택구로 설정된 전 공동묘지 터와 기타 남산 부근에 산재한 약 60여만 평의 경성부의 유일한 자원인 부유지를 활용코자 하는 계획에서 개척하는 특설도로인데 이 부근은 또한 지력이 전부 풍광명미한 관계로 신축가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8월부터 금 11월까지의 신축가옥을 조사해 보건대 이태원정(梨泰院町)에 17호를 비롯하여 삼각지와 신당정에 4개월 간에 132호이다. 건축물을 보건대 대개가 이층 문화주택과 상점 건물로 그중 조선 사람의 집은 이태원정에 불과 16호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전부가 내지인의 소유이다. 그리고 이 틈바귀에 있던 세민들은 할 수 없이 집을 팔고 부외로 뚝 떨어져 속속 이주하는 정경에 있는 것이 많다 한다.

그러고 보면 망우리공원에 남아 있는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는 일제가 새로운 문화주택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재정결핍을 해소하려는 방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 재원이란 것이 모두 죽은 이들의 안식처를 파헤친 대가로 나온 것이니만큼 — 좀 억지스럽게 말하자면 —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백골징포(白骨徵布)’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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