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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야스쿠니 캠페인] “일본인 스스로 역사인식을 바꿔라”

2007년 11월 20일 480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야스쿠니신사는 지난 세기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을 긍정하는 신사다. 야스쿠니신사는 국가가 원하면 국민은 전쟁에 나가야 하고, 다른 나라를 공격해야 하며, 그 와중에 숨지는 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가르친다. 신사는 전쟁터에 끌려가 숨진 사람들을 일본을 지킨 ‘신’으로 현창(顯彰)하고, 그들이 벌인 일을 천황과 일본을 위한다는 명제 아래 정당화한다. 우경화된 미디어가 공범 그렇다면, 그런 신사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국·중국·일본·미국의 학자들이 11월8일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 모여 ‘인권·문명·평화의 눈으로 야스쿠니를 본다’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 11월8일,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참가자들은 야스쿠니신사 반대운동의 핵심은 평화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야스쿠니신사가 살아남게 된 것은 미국이 ‘천황제’를 남겨뒀기 때문이다. 마크 셸던 미국 코넬대학교 교수는 ‘미국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사령부는 일본 점령정책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일본의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천황제가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떠받치는 기둥인 야스쿠니신사도 그대로 남았다. 다만 신사의 성격이 국가시설에서 독립 종교법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관련기사 야스쿠니는 왜 태평양을 건넜나(한겨레21, 07.11.15)싸다 싸, 아름다운 동아시아(한겨레21, 07.10.11)지름신이여, 부디 이곳에 오소서(한겨레21, 07.09.13)바자회를 즐기는 두 가지 방법(한겨레21, 07.08.30)전몰자묘원은 대안인가(한겨레21, 07.08.23)대학생 평화유람단의 일본 기행(한겨레21, 07.08.16)잃어버린 아버지의 주검과 혼백(한겨레21, 07.08.16)야스쿠니를 보는 제3의 시선(한겨레21, 07.08.09)8월엔 ‘점프’를, 9월엔 쇼핑을(한겨레21, 07.08.02)이름 적은 영새부는 어디 있을까(한겨레21,

“친일인명사전, 이렇게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2007년 11월 19일 667

    민족문제연구소   11월 9일 6시 서울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내빈과 회원,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친일인명사전 편찬현황 대국민보고회’가 열렸다. 임헌영 소장은  개회사에서 “2005년도 1차 명단을 발표한 후 친일인명사전 출간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여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밝히면서 내년 8월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될 때까지 국민들의 계속적인 성원을 당부했다.   ▲ 소설가 조정래 선생(오른쪽), 언론인 주섭일 선생   이어 행사에 참석한 김희선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대표의원과  김원웅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은 과거사 관련법안 제정과정의 소회를 말하면서 사전편찬을 격려했다. 윤경로 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에서 전편찬작업의 지난한 과정을 설명하고  편찬위원과  집필위원,  편찬위 실무진의 부단한 노력으로 현재 60%의 작업공정을 보이고 있음을 보고했다.  윤경로 위원장은  내년 출간에 앞서  3월 최종 수록예정자 명단을 발표하게 된다고 밝히면서 어떤 정치적 외풍에도 굴하지 않고 반드시 민족사의 과제를 완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 인사말을 하고 있는 임헌영 소장   이어 연구소 영상팀이 준비한 동영상이 7분간 상영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선전뉴스영화와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대비시키면서 친일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발간 후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출범,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네티즌의 힘으로’ 기금조성 5억 달성, 역사바로세우기 시민운동 등 그간의 친일청산활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원호 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이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대학교수 1만인 선언, 2001년 12월 제1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출범, 2007년 10월 제25차 상임위원회

항일운동 다짐하는 의용군들

2009년 10월 26일 400

항일운동 다짐하는 의용군들(뉴시스, 09.10.23)

거사 다짐하는 안중근과 의용군

2009년 10월 26일 398

거사 다짐하는 안중근과 의용군(뉴시스, 09.10.23)

韓, UN에서 동해표기 팸플릿 배부- 日 고무라 외상 유감표명-닛케이신문(07.11.17)

2007년 11월 19일 380

韓, UN에서 동해표기 팸플릿 배부- 日 고무라 외상 유감표명 10월 24일에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반기문 UN사무총장 부처가 주최하는 콘서트에서 한국의 UN대표부가 일본해를 동해로 표기한 영문 팸플릿을 배부한 사실이 전해졌다. 고무라 마사히코 외상이 16일의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한 위에, 한국 측에 유감의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동해의 표기에 관해서는 UN 지명표준화 회의 등에서 한국은 동해, 북한은 조선해 등의 병기 등을 요구해 일본과 대립하고 있다.

일제때 촬영 ‘궁예 석등’ 사진 찾았다-뉴시스(07.11.18)

2007년 11월 19일 1400

  【철원=뉴시스】 지금은 볼 수 없는 궁예도성과 국보급 석등의 모습이 담긴 일제때 촬영된 선명한 화질의 사진 4장이 최초로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원 철원군 홍원리, 중강리 풍천원 일대에 세워졌던 궁예도성은 한국전쟁의 격전지 한 가운데 놓여 있어 포화에 휩싸이는 비운을 겪었다. 휴전 후에는 비무장지대 내 지뢰밭 한 가운데 놓이게 돼 일반인의 출입은 물론 학술적인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전설 속의 성으로 남아 있다. 이번 사진 발견은 철원군의 요청으로 문화재청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뒤져 찾아낸 것으로 비록 흑백이지만 화질이 깨끗해 궁예도성과 석등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 속의 궁예도성은 외성의 일부로 추측되는데 천년 풍상을 겪으면서 흙이 무너져 내리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방치돼 있으며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모습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궁예궁전의 옛터가 동주(東州.철원의 옛 지명)의 북쪽 27리 풍천벌에 있으며 지금 그 위성의 둘레는 1만4421척(4370m)이요 내성의 둘레는 1905척(577m)인데 절반이나 무너졌으며 궁전의 터가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다"고 기록돼 있다. 궁예도성은 후 삼국시대인 904년 궁예가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해 건립한 태봉국의 왕궁을 호위하는 성으로 밑 부분은 석축으로, 상단 부분은 토축으로 건립됐다. 철원군은 지난해 2월 태봉국 철원정도 1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1억원을 들여 궁예도성의 400분의 1크기인 축소 복원모형을 제작해 군청로비에 전시해 놓았다. 석등은 도성의 남문에 높이 280cm의 화강암으로 제작됐으며 일제때인 1940년 7월30일 국보 제118호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인간 띠 잇기’ 행사

2009년 10월 26일 399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인간 띠 잇기’ 행사(뉴시스, 09.10.23)

안중근 처형전 사진ㆍ유품 전시

2009년 10월 23일 443

안중근 처형전 사진ㆍ유품 전시(아시아투데이, 09.10.23)

구한말 駐佛 외교관 일기 발견-세계일보(07.11.16)

2007년 11월 19일 447

구한말 駐佛 외교관 일기 발견   구한말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밝혀줄 외교 현장 기록이 발견됐다.선문대는 이 학교 양지욱(국어국문과 박사과정)씨가 최근 서울의 고서점에서 대한제국의 주불 공사를 역임한 김만수(1858∼?)의 일기(사진) 3권을 입수했다고 16일 밝혔다.1887년 한불 수교 이후 지금까지 프랑스 외교관이 한국에 와서 수집한 자료는 남아 있지만, 한국 외교관이 프랑스에 가서 남긴 자료는 처음이다.1901년 3월 16일 고종에게 프랑스공사 부임 명령을 받은 김만수가 출발일인 그해 4월 14일부터 1902년 2월 14일 귀국할 때까지의 활동 내역과 과정을 한문으로 기록한 이 일기는 ‘일록(日錄)’ ‘일기책(日記冊)’ ‘주법(駐法) 공사관 일기’ 등으로 이뤄져 있다.일기에는 그가 프랑스공사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하여 여러 국제지도자들을 만난 기록과 함께 당시의 국제정세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이 담겨 있다. 또 당시 해외에서 활동한 우리 외교관과 국내에서 활동한 외국 인사들의 동정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일본이 영국은행에서 차관을 빌렸다거나 우리나라가 프랑스 정부로 부터 총기와 탄환을 구입한 사실 등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양씨는 밝혔다.일기를 기록한 김만수는 1887년 문과에 급제한 뒤 규장각 대교, 성균간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거친 전형적인 양반 관료 출신 인물로, 한일합병 이후에도 총독부에 의해 중추원 찬의에 임명된 기록이 남아 있다.양씨는 “‘일록’과 ‘일기책’은 공적인 일과와 개인사를 상세히 기록한 일기이고, ‘주법 공사관 일기’는 이를 정리해 조정에 보고하려던 공식 문서로 보인다”면서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외교현장을 지켰던 우리

韓日신문은 교과서에 참견하지 말라-산케이(07.11.14)

-0001년 11월 30일 412

韓日신문은 교과서에 참견하지 말라    ‘반일’이 테마인 한국 언론의 논설위원들과 회의에 동석하면 집중공격을 당하게 될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얼마 전 한국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편집세미나에서의 일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예상대로, 본지 서울지국장인 쿠로다 카츠히로 기자가 말하는 야스쿠니, 역사교과서, 독도 3종 세트에서부터 일본 비판이 시작되었다.“야스쿠니 참배나 교과서문제만 보아도 일본사회와 신문의 우경화, 군국주의화의 경향은 뚜렷하다.” 한국 측 보고자에게 3번이나 언급된 산케이신문으로서는 가장 먼저 반론해야만 할 부분이다. 이 회의에서 전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 ‘한일의 상호이해는 환상이다. 그러니 상호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뿐이다. 이는 이번 회의가 44회째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3종 세트의 등장도 매번 있는 일이니 놀랍지도 않다. 10번 해도 상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몇 번 한 들 마찬가지다. 그러나 차이가 인식된다면 다음에는 얼마 안 되는 공통점을 찾게 될 것이다.이해할 수 없는 예로서 한국 노무현정부가 내건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의 재산 국가귀속에 대한 특별법을 들어보았다. “유교국가로서 친일의 피는 그 자손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러나 일본의 사생관이나 종교관은 다르다. 어떠한 선인이나 악인이라도 죽으면 그 혼은 모셔진다. 이 문제로 보이게 된 것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가 ‘다른 집의 혼’이니 경의를 표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야스쿠니 참배에 우경화나 군국주의화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논지는 츠쿠바대학의 후루타 히로시 교수에게 빌린 것이다.요미우리 편집위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원호가 있었다. “일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