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자료관 8]
경성유람버스(京城遊覽バス) 탑승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바야흐로 시절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거리에 넘쳐나고, 인천항에는 세계유람기선이 드나들며, 또 하늘에는 공중산보객(空中散步客)이라고 하는 유람비행이 막 성행하기 시작하던 1931년의 일이었다. 때마침 친일귀족 민영휘(閔泳徽) 자작이 몸소 여의도 조선비행학교를 방문하여 원기왕성하게 비행기에 올라 고령자로서는 처음 경성의 푸른 하늘을 날으며 경성시가지를 유쾌하게 부감하였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에 게재되기도 했다.
하늘과 바다에서 이처럼 유람의 바람이 일게 되자 아니나 다를까 그러한 변화가 땅 위에서도 시도되고 있었다. 이른바 ‘경성유람버스(일종의 시티투어버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머지않아 ‘만주사변’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요긴한 새로운 문명의 편의시설로만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동아일보』 1931년 2월 14일자와 6월 21일자의 지면에는 경성유람버스의 운영이 곧 개시된다는 소식을 각각 이렇게 알렸다.
[1] 시내 욱정(旭町) 노노무라 켄조(野野村兼三; 경성택시 운영주)는 금 13일 오전중에 경기도경찰부 보안과(保安課)에 경성유람버스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동(同) 유람버스는 지방사람이나 또는 외국사람들이 경성 유람을 올 때에 동 유람객을 자동차에 싣고 시내 유명한 건물과 창경원, 신사 등과 유명한 백화점을 자동차로 안내하기로 된 것이다. 요금은 2원 20전이라는데 보안과에서는 동 원서를 접수하고 고려중이라 한다.
[2] 경성의 명소 등을 소개할 목적으로 이미 계획중에 있던 경성명소유람승합자동차(京城名所遊覽乘合自動車)는 오는 22일부터 운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동(同) 자동차는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1시의 2회를 운전하는 바 시내 장곡천정 ‘경성택시’ 앞에서 승차하고 조선신궁, 창경원, 경복궁, 기타 14개소를 하차하여 구경일주하는 것이라 한다. 소요 시간은 4시간 반이오, 부인 안내자가 동승하여 일일이 안내한다는 바 승차임은 2원 20전이오, 정원은 16명이라 한다.
이러한 유람버스를 운행하자면 마땅히 가이드를 해줄 사람이 필요할 텐데, 자료를 뒤져보니 곧잘 ‘경성유람버스 부인(婦人)안내인 모집광고’가 수록되곤 했던 것이 눈에 띈다. 연령은 17세에서 23세까지이고, 모집대상은 ‘내선인(內鮮人)을 불문’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용객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구경을 온 관광객이다 보니 그들의 왜곡된 시선으로 조선의 명소를 소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 1932년 5월 7일자에 수된 「[사카리바(盛り場, 번화가)의 청춘(靑春)(6)] 한양(漢陽)의 도(都, 도읍)를 도는 유람버스(遊覽バス)의 이키지비키(生字引, 걸어다니는 사전), K 택시(Kタクシー) 이갑준 양(李甲俊孃)의 일」 제하의 글도 소개할 만하다고 판단하였으나, 지면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부득이 기사제목만 여기에 적어두기로 한다.
그 대신에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 1933년 5월호, 73~75쪽을 보면 쿠치키 쥰(朽木 淳)이라는 일본인이 남겨놓은 「[경성명물(京城名物)] 안내양(案內孃)의 혀(舌)」라는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부 옮겨서 소개하기로 한다.
사쿠라 꽃봉오리가 윙크를 보내면 파라솔은 에로틱하게 화려한 꽃을 반겨 맞아 도시인의 춘정(春情)을 불러일으킨다. 그 위에 경성에는 여행자(旅行者, 에트랑제)의 안주인들이 명주 돈지갑을 손에 쥐고 찾아든다.
전망이 좋은 전면 유리창으로 5월의 태양을 흠뻑 쬐며, 신경성명물(新京城名物)인 유람버스(遊覽バス)는 이 “여행할 때는 부끄러움도 내팽개치는” 인종(人種)을 태우고 봄바람 화창하게 현대판 야지키타[彌次喜多; 짓펜샤 잇쿠(十返舎一九)가 지은 『동해도 도보여행(東海道中膝栗毛)』의 주인공 야지 로베에(彌次郞兵衛)와 키타 하치(喜多八)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즐거운 유람여행’을 뜻하는 말]의 행로를 계속한다.
봄의 에스프리를 주워 담고자 필자(筆者)는 연필 끝을 갈아서, 이 자동차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차 안에는 남녀 합해 15명, 완전히 일본지도를 펼쳐놓을 것이나 다름없이 지방색에 지방 사투리의 칵테일이다. 맨 앞 칸에는 큐슈 하카타(九州 博多)에서 온 부부 동반, 남자 쪽의 나이는 오십 중반으로 보이는데, 부인 쪽은 아직 난숙기의 서른을 넘긴 요염함이 보이니까 후처살이라고 하는 부류? 객지의 하늘은 허전한 듯 보이지만, 신혼의 꿈을 좇고 있음인지 어깨를 맞대고 나비처럼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그 왼쪽에는 저 멀리 카라후토(樺太, 사할린)에서부터 선만여행(鮮滿旅行)을 구상했다는 마흔 줄에 가까운 뚱뚱한 중역형(重役型)의 신사, 상상컨대 투기주(投機株)에라도 횡재한 것이 아닐까? 중간쯤의 자리에는 오사카말씨(大阪辯)의 예순 티가 물씬 나는 부인과 동행 두 사람, 그 뒤에는 모 신문사가 초빙한 동경(東京) S대학 권투부 선수(챔피온) 일행 다섯 명에 교사가 한 명, 작은 새처럼 양기 있고 쾌활하게 언제나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떨고 있다. 그 뒤로 조선측 선수가 한 명이 안내격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참으로 제국승합선(諸國乘合船)이라 하면 딱 들어맞을 이야기이다.
오후 한 시, 모던하고 아리따운 가이드‧걸(ガイド‧ガール)의 시원시원한 신호 소리와 더불어 현대판 ‘야지키타차’는 장곡천정(長谷川町, 하세가와쵸) 경성택시 본사(京城ダクシー本社) 앞을 출발한다.
── 왼쪽에 보이는 적연와(赤煉瓦) 건물은 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로 2층은 공회당(公會堂)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른편 건물은 조선호텔로 이전에는 만철(滿鐵)이 경영하던 것이지만, 지금은 철도국이 직영하고 있으며, 후원에는 원구단 육각당(圜丘壇 六角堂)이 있는데, 고려시대 목멱성(木覓城)의 흔적이라 하고, 문록역(文祿役, 임진왜란)에 우키타 히데이에(浮田秀家)가 이 부근에 진을 쳤다고 전해지며, 또 이왕 즉위(李王 卽位) 장소입니다.
계속하여 오른쪽 흰 건물이 경성부의 살림집인 부청(府廳)이고, 왼쪽이 덕수궁(德壽宮)으로 유명한 석조전(石造殿)은 이 안에 있습니다. 붉은 문을 대한문(大漢門)이라고 부릅니다.
왼편 언덕에 보이는 JODK는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이곳은 역시 문록역 때 우키타 사쿄스케(浮田左京介)가 진을 친 자리이고, 그 앞의 적연와 건물은 내지인측(內地人側)의 기독교청년회(基督 敎靑年會)입니다.
태평통(太平通)에서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올라가기 전에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미술품제작소(美術品製作所)인데, 이전에는 이왕직(李王職) 경영이었으나 지금은 주식회사 경영으로 되어 조선미술 품을 제작 판매하는 물품진열소가 되어 있습니다.
버스는 광화문통의 좌우 일대 관아가(官衙街)로 나아가 법학전문학교(法學專門學校)와 체신국(遞信局), 경기도청(京畿道廳) 앞을 지나 박물관(博物館) 앞에 멈춘다. 이곳에서 승객은 차에서 내려 경복궁 안의 견학에 들어간다.
── 광화문은 총독부청사 건설로 인해 7만 원의 예산으로 이곳에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실제 경비는 4만 원이면 족했을 거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3만 원은 허공에 떠있는 상태입니다.
가이드‧걸 씨는 시종 미소를 띠면서 철철 흘러넘칠 듯한 애교로 서비스의 극치를 다하면, “여행지의 창피를 홀랑 벗어 던진” 족속들은 흐트러짐 없이 수긍하는 신호를 보낸다.
일행은 근정전(勤政殿)으로 빨려 들어간다. 내정(內庭)은 전부 돌이 깔려있고, 뜰 앞에는 좌우에 정일품(正一品)에서 구품(九品)까지 각자를 넣은 돌기둥이 있는 것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참렬할 위치를 표시해놓은 것으로서 이곳에서 당시 공의대전(公儀大典)의 예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유식자들을 양반(兩班)이라 일컫는 것은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정전의 가운데 옥좌(玉座)를 배관했고, 천장 위 용(龍)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 한바탕.
── 종래 조선은 봉황(鳳凰)이 정문(定紋, 정해진 문양)이었으나, 일청역(日淸役, 청일전쟁) 후에 독립을 의미하는 고로 이 용(龍)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경회루(慶會樓)인데 군신 향연의 장소로 중층(重層)으로 이뤄졌으며, 이리모야(入母屋, 팔작지붕)의 큰 누각에 아래쪽은 취발(吹拔, 후키누키) 48개 돌기둥으로 받치고 위층은 매우 채색이 화려한 것입니다만, 일반에는 관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박물관은 삼국시대, 신라통일시대의 불상, 공예품, 고려시대, 이조시대의 발굴물(發掘物)에서 서화 등 천고(千古)에 빛나는 고전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백악전(白堊殿) 총독부청사(總督府廳舍)로, 르네상스식 철근 콘크리트, 화강암의 5층 건물로 연건평 9천 6백여 평이며, 중앙탑 높이가 180척, 약 10년의 세월과 70만 원의 거금을 들여 건설되었던 것인데, 내부의 홀은 조선산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장려함의 극치를 이루었고, 더욱이 와다 산조 화백(和田三� 畵伯)이 붓을 들어 미호(三保)의 마츠바라(松原) 하고로모(羽衣)의 전설과 금강산(金剛山)의 동일한 전설을 묘사한 벽화는 내선융화(內鮮融和)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가 10만 원에 이른다고 전합니다.
이것으로 경복궁 내의 설명은 마치겠습니다만, 한 번 더 경복궁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태조 1년에 창설되어 문록의 역(임진왜란)에 불타버린 것을 이태왕(李太王, 고종) 2년에 섭정 대원군이 국비(國費)를 쏟아 부흥사업을 일으켜 동 7년에 완성했고, 남북 약 1킬로에 걸쳐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입니다.
다시 일행은 버스에 올라 조선인측의 동맥선(動脈線)인 종로통(鍾路通)으로 나서는데, 안내양의 혀는 차바퀴의 회전과 동시에 점점 아주 세심한 데까지 미쳐, 어쩌다 가벼운 유모어(ユーマア)에 잇트[イット; 클라라 보(Clara Bow, 1905~1965) 주연의 1928년 국내 개봉영화 「그것(It)」에서 비롯된 유행어로 ‘성적매력’ 또는 ‘추파’를 뜻하는 말]를 발산하는 설명을 하면 승객도 긴장이 풀려 콧노래를 부르며 얘깃거리를 찾아내어 옆자리와 얘기가 시작된다. 권투선수는 어젯밤의 연회에서 골라잡은 미급(美給)에 대한 비평을 늘어놓고, 응원가의 일절을 부르며 잠깐 서로 융합을 이룬다. 차는 안국동(安國洞)을 거쳐 종로통으로 나왔다.
── 십자로의 한 모퉁이에 있는 것은 보신각(普信閣)이라 부르는데, 태조 무렵에 창설된 종루(鐘樓)로 아침저녁으로 이를 울려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알렸던 것입니다. 조선 제일의 거종(巨鐘)으로 높이가 1장 2척 5촌, 구경이 7척 5촌 3푼, 이 종을 기념하여 종로(鍾路)라는 통칭(通稱)이 생겨났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파고다공원(パコダ公園), 보이는 대로의 소공원이지만, 대원각사(大圓覺寺)가 있던 곳으로 13층의 한수석탑(寒水石塔, 대리석탑)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즉 탑은 석조(石造)로 3층 기단 위에 10층 탑신을 세워 권형의장수법(權衡意匠手法)은 조선 제일의 걸작이라 칭해지며, 중종(中宗)의 불교배척 탓에 이전을 기도했었고,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기념품 삼아 갖고 가려 했다는 등의 전설로 유명합니다.
차는 여전히 순조선식 동네를 거쳐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간다.
── 이곳은 태조가 창설했던 현재 이왕궁전(李王宮殿)입니다.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개축되지 않은 점에 있어서 경성의 여러 문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입니다.
조선의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는 우선 다섯을 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남대문(南大門)에 돈화문(敦化門), 홍화문(弘化門), 여기에 창경원 내의 명정문(明政門)에 명정전(明政殿)으로, 모두가 구체(舊體)를 지켜오기를 7백 년을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차는 창덕궁의 일부인 창경원(昌慶苑)의 문 앞에 멈췄다. 여기서 다시 승객은 차에서 내려 이왕직(李王職) 소관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에 해방되었는데, 조선의 인식에 필사적인 것은 서로 고향집으로 가져갈 여행이야기로 삼을 심산인 듯하다.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 친절한 가이드‧걸의 혀끝에서 지식을 전수받고 차에 올라 경학원(經學院)으로 향한다.
이럭저럭 “여행지의 창피를 홀랑 벗어 던진” 무리들도 약간은 피로를 느끼기에 이른다.
── 문묘(文廟)를 중심으로 했던 유림(儒林)의 학당, 이태조가 건설했던 것으로 봄가을 두 번 상정일(上丁日)의 석전(釋典, 釋奠이라고도 함)에는 조선고악(朝鮮古樂)을 연주하여 장엄한 의식의 제례가 행하여집니다.
여기서도 안내양의 혀는 「유직고실(有職古實, 유소쿠 코지츠)」에 못 미치나 설명은 대학의 역사교수의 강의를 방불케 한다. 문지기가 고풍스런 자그마한 열쇠로 문을 열어준 것을 보니, 누구도 선미(禪味)가 있는 풍경이야 라고 잠깐씩 머리를 끄덕인다.
차는 학교가(學校街)인 고상(高商, 경성고등상업학교), 제대(帝大, 경성제국대학), 고공(高工, 경성고등공업학교), 의전(醫專, 경성의학전문학교) 앞을 지나 동대문(東大門)으로 나왔는데, 왼쪽에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와 경성그라운드(京城グラウンド, 동대문운동장)를 보고 오른쪽에 훈련원(訓練院)을 보며 단숨에 장충단공원(獎忠壇公園)으로 올라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에서 하차한다.
── 훌륭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춘무산 박문사(春畝山 搏文寺)는 조선 개발의 은인 이토공(伊藤公)을 제사지내는 보리사(菩提寺)인데, 23만 원의 예산으로 작년 10월 준공되었습니다. 그 옛날 장충단(獎忠壇)은 한국에 충렬(忠烈)을 다한 사람을 제사 지내는 장소로, 마치 내지(內地)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상당하는 곳입니다. 이토공도 이곳에 모시는 것은 인연이 깊은 것입니다.
춘무산에서 황금정(黃金町) 6정목(丁目), 영락정(永樂町)을 두르고 본정통(本町通)을 거쳐서 왜성대(倭城臺)에서 경성신사(京城神社)로 모던 야지키타차는 달린다.
── 여러분, 본정통입니다.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양측은 내지인의 상점들이 처마를 맞대어 1정목에서 5정목까지 이어져 있는 경성의 긴자(銀座)입니다.
여기에 필자가 잠깐 설명을 더해보면 이렇다.
자, 여러분! 여기가 유명한 본정통으로 밤이면 혼브라(本ブラ; 중심가를 공연히 들떠 돌아다니는 것)라고 하는 사악한 말에 매혹된 남, 남, 여, 여가 산보합니다. 불량소녀에 매음부, 모던한 장소에 스틱‧걸[ステッキ‧ガール; 긴자(銀座)와 같은 곳에서 지팡이처럼 사내와 동반하여 산책상대를 해주고 요금을 받았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도 나올 듯한 거리인데, 5정목에서 곧장 신마치(新町)가 이어지며 여기는 경성의 요시와라(吉原)로 제법 국제적인 곳입니다. 조선의 창기(娼妓)에다 일본 아가씨, 한창 때는 넘겼지만 백계러시아의 아가씨도 있다는 속세의 고루(高樓), 저기에 오색등이 가지각색으로 장식되어 있는 곳은 세간에서 말하는 네온불빛의 카페로 에로 서비스는 초저녁부터 개시됩니다. 누구든지 명주 돈지갑의 바닥을 털어 내어 에로(ヱロ)와 잇트(イット)를 만끽하시라! ── 서울에서 아주 좋은 아가씨가 있을 만큼 …….
과학관(科學館)으로부터 경성신사(京城神社),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일동 참배했고, 이 고대 (高臺)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경성의 거리에 대한 설명은 다시금 가이드‧걸의 혀를 굴리게 되어, “여행지의 창피를 홀랑 벗어 던진” 무리들도 거듭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끄덕.
이참도(裏參道, 우라산도)를 지나, 돌로 만든 토리이(鳥居)가 있는 표참도(表參道, 오모테산도)로 나와 옛 성벽을 끼고 내려가는 381단의 돌계단은 동양 제일이라고, 안내양은 나의 일이나 된 듯이 자랑스런 얼굴이 된다. 남대문 앞에서 잠깐 주차하여 다시 설명.
── 본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불렀으며 동양예술의 정화를 나타내기에 충분한데, 짜임새가 굉장한 것을 구경해보세요! 그 옛날 문록의 역(임진왜란)에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하루 늦어 이곳에 당도하였더니, 코니시의 병사가 이미 문을 장악한 것을 알고 도성진입의 선수를 빼앗긴 것에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성밖에 진지를 치고 성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전해져 옵니다.
풀어보니까 대중소설 같은 곳의, 아마도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 1891~1934)도 이 가이드 양에는 두 손을 다 들지 않을까?
차는 본정(本町, 혼마치) 입구인 미츠코시(三越) 앞에서 최후의 행정(行程)을 마친다.
── 다들 힘드셨을 겁니다. 여기가 마지막이 될 것이온데, 앞쪽이 경성우편국(京城郵便局), 왼쪽이 선은(鮮銀, 조선은행)입니다. 모두가 피곤하실 것입니다.
거듭하여 친절하게 위로하는 말에 고단함도 없이 그 차에서 해방되자, 일찍이 여행 기념물로 진즉에 간주되고 있던 잇트‧걸(イット‧ガール)은 차 안에서 손을 흔든다.
── 여러분, 잘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봄은 마차를 타고 …… 라고 누군가 말했다. 마차가 아니라 유람버스로 국제도시 “경성”을 탐방한 것은 “여행지의 창피를 홀랑 벗어 던진” 이들만은 아니다. 이 차 안에는 멋진 로맨스가 함께 타 있다고 말한다.
역시 차에 흔들리며 하는 행락은 한때의 스릴을 느끼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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