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7. 영화 <아리랑> 개봉과 주제가 <아리랑>
1926년 10월 1일 금요일 저녁 7시, 서울 종로에 있는 극장 단성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했다. 원작·각색·연출·주연 등에서 나운규(羅雲奎)가 종횡무진 활약한 영화는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고, 한국 영화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작품으로 지금껏 평가되고 있다. 단성사 첫 상영은 불과 닷새 동안이었으나, <아리랑>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재상영되었다. 잡지 <삼천리> 1930년 7월호에 실린 나운규의 회고에 의하면 그때까지 평양 등지에서도 16회 상영이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정식 극장 상영 외에 각지 순업(巡業)까지 더하면 실제 상영 횟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조선 무성영화 중 첫손에 꼽히는 걸작으로 그토록 절찬을 받았던 <아리랑>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 영상을 볼 수가 없다. 해방 전에 제작된 무성영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아리랑> 역시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까지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필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아리랑>과 관련된 상실은 필름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분명치 않고 아쉬운 점들이 여전히 많다.
무성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했을 때 스크린 옆에는 변사가 앉아 관객들에게 영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또 <아리랑>에는 주제가가 있으므로, 극 중 노래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실제 가수가 등장해 악단 반주에 맞춰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단성사 첫 상영 당시 해설을 맡은 변사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였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신홍련(申紅蓮)이라는 이름으로 <아리랑>에 출연해 오늘날 ‘국민 여동생’ 격으로 각광을 받았던 배우 신일선(申一仙)은, 타계 몇 해 전 1980년대에 남긴 녹음을 통해 <아리랑>을 처음 해설했던 변사가 서상필(徐相弼)이고 주제가는 여성 가수가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아리랑>에 관한 상실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 대한 기억에도 있다. 주인공 여동생 역을 맡은 신일선은 1990년 6월에 세상을 떠났기에 한 시대의 스타로 나름 대우받으며 위와 같은 증언도 남길 수 있었고, 주연 나운규는 그보다 훨씬 앞서 1937년 8월에 32세로 요절하기는 했으나, <아리랑>을 대표하는 인물로 여전히 기려지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 아버지 역할을 맡았던 이규설(李圭卨), 주인공의 친구이자 여동생의 연인으로 출연했던 남궁운(南宮雲), 주인공과 대립하고 죽임을 당하는 인상적인 악역으로 등장했던 주인규(朱仁奎) 등은 <아리랑> 관련 인물로 오랫동안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이유는 해방과 분단 이후 그들의 행적 때문이라 할 수 있으니, 세 사람 모두 북한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영화 못지않게 인기를 얻은, 어쩌면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기까지 한 주제가 <아리랑>에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여럿 있다. 가사는 나운규가 어린 시절 고향 회령에서 들었던 노래를 정리하고 다듬어 만들었다고 본인이 밝힌 바 있지만, 곡조를 만든 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성사 음악대가 나운규의 부탁을 받아, 아마도 <구조 아리랑>(일명 <경기 자진아리랑>)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일단 정리되고는 있으나, 단성사 음악대 중 누가 작곡을 했는지, 혹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공동으로 창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제가 관련 자료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는 1929년 3월 간행 『조선영화소곡집』에 실려 있고, 가장 오래된 음반은 1930년 2월에 김연실(金蓮實)과 채동원(蔡東園), 즉 채규엽(蔡奎燁)의 녹음 두 가지로 발매되었다. 그중 악보와 김연실 녹음의 가사가 거의 일치하므로, 주제가 <아리랑> 가사의 초기 형태는 일단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아리랑>
나운규 작사, 단성사 음악대 작곡, 김연실 노래, 1930년 빅타(Victor) 49071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반복구)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요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대요/ 이 강산 우리 동리 풍년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 가건만/ 우리네 인생은 늙어지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하지만, 개봉 당시 주제가 <아리랑>이 위와 같은 4절 가사로 불렸다고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개봉을 앞두고 단성사에서 준비한 팸플릿에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상영 하루 전인 9월 30일에 공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팸플릿이 전부 압수되고 말았다. 악보나 음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사에는 특별히 문제 될 만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므로, 팸플릿 가사는 무언가 분명 달랐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압수 이후 그 실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가사가 그렇게 공안을 방해했는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여러 가지 불분명한 점들이 있기는 하나, 주제가 <아리랑>의 역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작곡자가 누구인지 확실치는 않아도 분명 새로 만들어진 곡조이므로, <아리랑>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첫 번째 창작 사례로 볼 수 있다. 1931년에는 전통음악계에서도 주제가 <아리랑> 음반이 나오기 시작 했으니, 창작 대중가요이면서 꽤 일찍부터 민요로 변신하기 시작한 점도 특이하다. 또 같은 해에는 일본에서도 번안곡 형태로 첫 번째 <아리랑> 음반이 발매되었으므로, 한반도 경계를 넘은 첫 대중가요 또한 이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면에서 최초로 기록되는 주제가 <아리랑>은 검열과 금지에서도 역시 첫 번째 대상이었다. 팸플릿 압수에 이어 1932년 연말쯤에는 앞서 본 채동원의 음반이 대중가요로서는 처음으로 압수되었고, 채규엽이 이명진(李明鎭)이라는 또 다른 예명으로 일본 가수 고사카 사치코(高阪幸子)와 함께 녹음한 <아리랑> 음반도 1932년 1월에 발표되었다가 1933년 8월에 발매 금지되었다. 모든 <아리랑> 음반이 그렇게 금지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제가 <아리랑>이 영화를 넘어 민족의 정한(情恨)이나 저항과도 연결된 데에는 이러한 금지 이력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을 것이다.
8. 김봉자‧노병운 정사 사건과 <봉자의 노래>
현생에서 이루지 못하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고자 남녀가 함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일러 정사(情死)라 한다. 예전에도 있었고 요즘도 있는 일이지만,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정사 사건에는 다른 시기의 경우와 다소 차이 나는 점들이 있었다. 이전과 달리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사람들 입에 그냥 오르내리는 정도를 넘어 대중문화 소재로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한 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예를 꼽자면 우선 1923년에 있었던 강명화(康明花)와 장병천(張炳天)의 정사를 들 수 있다. ‘단발 기생’으로 유명했던 강명화가 6월에 독약을 먹고 자살한 뒤 장병천도 10월에 뒤를 이어 음독해 세상을 떠났던 것인데, 장병천이 유력한 부잣집 아들이자 장택상(張澤相)의 조카이기도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 뒤 강명화의 죽음을 소재로 한 유행가 <강명화가> 음반이 1927년 11월에 발매되었고, 1936년 4월에는 강명화 이야기를 극으로 만든 <기생 강명화> 음반도 발매되었다. 그밖에 음반화되지 않고 창가집에만 실린 노래나 소설에도 강명화 정사를 다룬 예가 여럿 있다.
강명화의 뒤를 이어 1926년 8월에는 윤심덕(尹心悳)과 김우진(金祐鎭)의 죽음이 크게 보도되어 다시 또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 유서 <사의 찬미>가 사건 직후 음반으로 발매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1933년 12월에 발매된 극 음반 <천당과 지옥>에서도 윤심덕 이야기를 한 대목 등장시켰다. 두 사람이 정사를 감행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라 의문이 있기도 하지만, 윤심덕의 죽음 또한 대중적으로는 빠뜨릴 수 없는 정사로 기억되고 있다. 카
페 여급(女給) 김봉자(金峯子)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의사 노병운(盧炳雲)의 정사는 앞선 두 사건의 뒤를 이어 1930년대 전반에 큰 화제를 모았던 경우다. 1933년 9월 26일 밤 또는 27일 새벽 한강 인도교에서 김봉자가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27일 오후에는 다리 위 같은 장소에서 노병운 역시 몸을 던져 이튿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김봉자는 어린 딸이 있고 노병운도 처자식이 있었기에, 사회 통념상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사랑은 그렇게 정사로 끝을 맺었다.
두 사람은 1932년 가을에서 1933년 봄 사이에 김봉자가 일하고 있던 종로2가 카페 엔젤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충청북도 옥천 출신인 김봉자의 본명은 김갑순(金甲順)이었고, 봉자라는 이름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일본식 이름 ‘미네코(峯子)’의 한자를 조선어로 읽은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던 김봉자는 이혼 또는 가출로 남편과 헤어진 뒤 어린 딸과 어머니까지 부양하기 위해 서울로 와서 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병원 간호부로 취직했지만 곧 벌이가 더 좋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 손님으로 만나 연인이 된 이가 노병운이었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 노병운은 1927년에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고, 김봉자를 처음 만나고 나서 얼마 안 된 무렵이었던 1933년 3월에 의학부를 졸업했다. 양정고보 시절 노병운은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고 하며, 어쩌면 교육열 높기로 유명했던 ‘북청 물장수’가 노병운 가족 중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병천이나 김우진처럼 노병운의 집안이 대단한 권세나 부를 누리지는 않았던 듯하지만, 의사 노병운과 여급 김봉자 사이에 분명한 계층적 차이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아쉬운 점 없어 보이는 의사와 여러모로 딱해 보이는 여급의 사랑과 정사는 세간의 이목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고, 이는 또 다양한 음반 제작으로 이어졌다. 우선 1934년 1월에 유행가 <봉자의 노래>가 먼저 발표되었고, 바로 이어 2월에는 <병운의 노래>도 나왔다. 두 곡 모두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노래했다.
<봉자의 노래>
유도순(劉道順) 작사, 이면상(李冕相) 작곡, 채규엽 노래, 1934년 콜럼비아(Columbia) 40488
사랑의 애달픔을 죽음에 두리/ 모든 것 잊고 잊고 내 홀로 가리
살아서 당신 아내 못 될 것이면/ 죽어서 당신 아내 되어지리다
당신의 그 이름을 목메어 찾고/ 또 한 번 당신 이름 부르고 가네
당신의 굳은 마음 내 알지마는/ 괴로운 사랑 속에 어이 살리오
내 사랑 한강 물에 두고 가오니/ 천만 년 한강 물에 흘러 살리다
조선인 작가들이 가사와 곡을 만든 <봉자의 노래>와 달리 <병운의 노래>는 일본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만든 다른 노래 곡조에 조선어 제목과 가사만 붙여서 만들어졌는데, 원작은 1933년 3월에 발표된 <初戀の唄(첫사랑의 노래)>다. 정사 주인공 두 사람의 이름을 내건 노래 두 곡에 이어 1934년 3월에는 두 사람의 입장을 가상의 독백 형식으로 꾸민 ‘정사애화(情死哀話)’ <저승에서 맺는 사랑>이 역시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되었고, 7월에는 콜럼비아레코드의 염가 상표인 리갈(Regal)레코드에서 ‘영화설명’ <봉자의 죽음> 음반도 나왔다. 표기상으로는 <봉자의 죽음>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런 영화가 실제 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김봉자의 죽음이 여느 정사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자살 이유가 사랑 아닌 다른 데에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 때문이기도 했다. 김봉자가 카페 동료 여급으로 친하게 지내던 김일선(金一仙)이 1933년 7월에 돌연 중국 상하이(上海)로 떠난 일이 있었는데, 실은 그가 특수 임무를 위해 서울로 파견된 공산당 요원이었다고 한다. 사라진 김일선의 행적을 조사하던 경찰은 김봉자의 연루를 의심했고, 8월에 그를 체포해 문초한 뒤 일단 석방했다. 그리고 정사 당일인 9월 26일 오후에 경찰이 다시 집까지 찾아와 수색하는 일이 벌어지자, 발각을 두려워 한 김봉자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력 일간지 가운데 <동아일보>는 그러한 의혹이 사실일 수 있다는 논조로 기사를 냈으나, <조선일보>는 그와 달리 보다 신중한 입장이었다. 김봉자가 정말 김일선에게 포섭되어 공산당 요원으로 활동했는지 여부는 이제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비극적 로맨스 이면에 첩보물을 연상케 하는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기에, 김봉자의 죽음이 또 그렇게 회자되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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