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해방 직후 이극로의 한글운동 전개와 좌우합작을 위한 중도 정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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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28]

해방 직후 이극로의 한글운동 전개와
좌우합작을 위한 중도 정치 행보

박광종 특임연구원

1. 한글운동 전개

조선어학회 재건

1945년 8월 17일 이극로(1893~1978)는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과 함께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2년 10월 체포되어 홍원경찰서로 압송되고 재판 끝에 징역 6년형을 받아 복역한 지 3년 만에 출옥한 것이다. 이극로 일행은 하루 속히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서울로 향했다.

1945년 8월 25일 이극로는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과 서울에 남아있던 김병제 김윤경 등을 소집하여 조선어학회 임시총회를 안국동 불교선학원에서 열었다. 여기서 임원진 선정과 함께 조선어학회의 당면 과업을 결의하였다. 임원진으로는 간사장에 이극로, 간사로 최현배(경리부) 김병제(서무부) 이희승(교양부) 정인승(출판부) 김윤경(도서부)이 뽑혔고, 당면과업으로 ① 한글교원 양성을 위한 한글강습회 개최 ② 초중등 한글교재 편찬 ③ 『한글』지 속간 ④ 한글사전편찬의 완결등을 내걸었다.

이렇듯 부서별 임원 배정과 사업계획 구상이 끝났으나 조선어학회가 입주할 보금자리와 각종 사업 실시를 위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 위해 이극로 간사장을 중심으로 각계 요로에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해방 직후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회관과 기금 마련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던 중 조선어학회에 서광이 비치는 희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곧 함남 풍산 출신의 실업가 이종회가 해방 전에 경성보육학교로 쓰이던 서울 종로구 청진동 188번지 2층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기부했다. 9월 11일 청진동 건물로 이전하여 조선어학회의 ‘청진동 시대’가 열렸다.

한편 김영세라는 전 총독부 직원이 50여 만원의 거금을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 이 돈은 해방 직전 총독부 산하의 조선인 관리 월급 중 국방헌금으로 떼어놓았던 돈인데 김영세가 보관해 놓았다가 민족사업에 써야겠다는 마음에서 조선어학회에 기부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찍부터 이극로 간사장과 알고 지내던 경북 의령 출신의 자산가 이우식이 100만 원 상당의 토지를 기탁해왔다. 9월 18일 조선어학회는 이러한 토지와 기부금을 기초로 조선어학회재단을 설립해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다.

『한글학회 100년사』(한글학회, 2009)에 따르면, 이극로가 간사장(1946년 2월 이사장으로 명칭 변경)으로 재직한 시기는 1945년 8월부터 1946년 2월까지다. 이극로는 6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일제의 탄압으로 거의 괴멸하다시피 한 조선어학회를 다시 추슬러 회원들을 모으고 회관과 재원을 마련해 한글 사전 편찬과 한글 보급 운동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굳건한 토대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후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대표자회의 참가, 7월 이사 사직 때까지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서무부 이사로서 또한 외부 단체와의 교섭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 했다.

『조선말 큰사전』 편찬

1942년 조선어사전의 원고가 완성되고 나서 조판 교정이 진행 중이었는데 그해 8월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전 편찬자 대부분이 체포, 구속되는 바람에 사전 편찬 업무가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조선어학회가 재건되고 사전 편찬 업무를 재개하고자 했으나 기존의 사전 원고가 재판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되고 나서 그 행방이 묘연해 우선 사전 원고를 찾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사전 원고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중에 9월 8일 우연히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사전 원고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400자 원고지로 10여 만 매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이에 힘입어 이극로 간사장의 지휘 아래 사전 편찬 조직을 꾸렸다.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편찬원 겸 간사장: 이극로                                편찬주무 겸 간사: 정인승
편찬원 겸 간사: 김병제 이중화 정태진 권승옥      편찬원; 한갑수 외 10명

사전 원고 대부분을 찾았으나 변해버린 시대상황 탓에 원고를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 검열을 피하기 위해 표제어로 삼지 못한 단어와 풀이를 보완해야 했고, 그사이 달라진 한글 표기법도 반영해야 했다. 2년간 편찬원들이 밤낮없이 사전 편찬 작업에 몰두해 1권 분량의 원고를 탈고하였다. 1947년 한글날에 맞추어 첫 권을 내기로 하고 출판사를 물색하였다.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수익성을 장담하기 어려웠던 터라 선뜻 맡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다. 그러자 이극로 이사가 동료와 함께 직접 을유문화사를 찾아가 담판을 짓기에 이르렀다.

이극로, 김병제, 이희승이 세 번째로 을유문화사를 찾았다. 삼고초려가 따로 없었다.
이날 이극로는 원고 뭉치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 놈들한테나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은 일이겠소?” 이극로의 한탄과 호소는 마침내 을유문화사 중역진의 마음을 움직였고, 일단 1권만이라도 간행하기로 하고, 그다음 일에 대해서는 또다시 대책을 수립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해 5월 13일 조선어학회와 을유문화사는 『큰사전』 출판 계약을 체결하였고,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 간행하였다. B5판(4×6배판) 600면에 특가 1200원이었다.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2013), 412쪽

1947년 10월 9일 종로구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한글날 기념식에서 『조선말 큰사전』의 발간식도 함께 거행되어 이극로가 자신이 직접 쓴 큰사전 ‘발행사’를 낭독하였다. 1929년 이극로가 주도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족 이래 20여 년이나 걸린 “고심(苦心)의 혈작(血作)”이 드디어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이후 3년간의 전란과 물자 부족이란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도 제2권(1949.5.5), 제3권(1950.6.1), 제4권(1957.8.30), 제5권(1957.6.30), 그리고 1957년 511돌 한글날에 제6권까지 『큰사전』이 모두 완간되었다.

한자폐지회와 한글전용운동

이극로는 최현배, 정인승 등과 함께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해방 공간의 언어·문화적 기틀을 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한자 사용을 폐지하고 한글전용을 이뤄내는 것을 국어 교육 확립의 핵심 과제로 보았다.

이극로는 한자폐지와 한글전용의 이상(理想)이 이미 500년 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서 비롯되었으며, 50년 전 유길준의 국문순용론, 40년 전 지석영의 한자폐지 실행운동으로 이어져 왔음을 강조했다. 그는 “500년 전의 생각, 50년 전의 이상, 40년 전의 실행운동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한다면 과연 언제가 적절한 때란 말인가”라며, 이때야말로 한자폐지를 즉시 실행해야 할 적절한 기회임을 피력했다. 아울러 세계에서 자국 문자와 타국 문자를 섞어쓰는 ‘이종문자 혼용’을 하는 민족은 오직 조선과 일본뿐이며 한자를 고집하는 것은 한자에 익숙한 극소수의 기득권층이 누리는 일시적 편의 때문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아울러 방대한 한문 서적을 하루속히 한글로 번역해야 하므로 한문학자의 사명이 중차대하다고 강조했다.(「한자폐지에 대하여」, 『한글문화』 창간호, 1946.3 ; 「한자폐지의 贊否(3): 새 문화건설은 한자폐지로부터」, 『신조선보』 1945.12.24)

이극로는 이러한 정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945년 11월 한자폐지회2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한자폐지회는 각계각층 1,171명의 서명을 받아 미군정청 학무당국에 초·중등 교과서의 한자폐지와 한글전용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 건의로 말미암아 1945년 12월 조선교육심의회 전체 회의에서 초·중등 교과서의 한글전용 결의안이 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미군정이 이 결의안을 즉시 승인하여 한글전용이 남한의 공식 언어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1948년 10월 제헌국회에서 ‘한글전용법’3이 공포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극로는 1946년 6월 미군정청 문교부4의 국어정화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어 연구와 심의에 참여했다. 국어정화위원회는 11차례의 회의 끝에 942개의 일본어 단어를 선정하고 이에 대한 우리말 순화어를 확정했다. 이 안은 전체 회의를 거쳐 1948년 2월 문교부에서 공식 공포되었으며, 그해 6월 『우리말 도로찾기』 책자가 60만 부가량 발행되어 전국 학교와 일반대중에 보급되었다.

한글 보급 운동

조선어학회 재건 직후, 학회의 최우선 당면 과제로 한글교원 양성을 위한 한글강습회 개최와 초중등 한글교재 편찬이 제시되었다. 당시 한국인의 문맹률이 거의 80%에 이르렀고5 한글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도 극히 부족한 상태였다. 이는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공공장소와 일상생활에서 우리말 사용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는 9월 11일부터 우리말 교수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한글사범강습회를 열기로 하고 조선어학회 소속 교원을 각도에 파견 이 교사로 하여금 각도를 단위로 한 지도교사를 양성하며 각군·읍·면에 이르도록 했다. 또한 9월 3일에는 이극로 간사장과 최현배 등이 교육 관계자들과 함께 교재편찬위원회를 열고 우리말 입문(일반인 대상)과 초중등학교 국어교재를 편찬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45년말 조선어학회가 지은 『한글 첫걸음』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교본』 등이 미군정청 학무국 발행으로 30만 부 이상 제작되어 전국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어학회는 재건 직후부터 소규모 인원으로 한글사전과 한글 교재 편찬, 각종 한글 강습회 개최 등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의 산하 단체를 두어 한글 보급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고자 하였다.

먼저 1945년 9월 한글문화보급회를 조직했다. 명예회장 이희승, 회장 정열모였고, 이극로 최현배 장지영 등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이 고문으로 참여했다. 한글문화보급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는 도지부 군무회를 두어 조선어학회 지도를 받아 강연회와 강습회, 기관지와 출판물을 통하여 한글을 보급시켰다. 1946년 3월 기관지 『한글문화』을 창간했는데 여기에 이극로 고문의 「한자폐지에 대하여」가 실렸다. 또한 1945년 12월 조선어학회 사범부 강습회 수료생 500명이 “우리들은 단합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을 강력하게 추진시키자”고 결의하고 ‘조선어학회 동학회(同學會)’를 결성했다. 동학회 회장에 이극로가 취임했고 이성재와 김호련이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총무부 재무부 사업부 등 각 부서를 두어 체계적으로 활동했다.

2. 좌우합작을 위한 중도 정치 행보

통일정부 수립 모색과 좌우익 양 기구 탈퇴 선언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1946년 1월부터 남한 정국은 신탁통치 반대를 내세운 우익 진영과 3상회의 결정 지지를 내건 좌익 진영으로 갈라졌다. 김구·이승만 및 한국민주당 중심의 우익은 강렬한 반탁운동을 펼치는 한편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정국을 주도하려 했다. 반면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인민당 등 좌익은 모스크바 결정의 본질이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완전 독립에 있다고 보고 찬탁 노선으로 전환한 가운데 좌파 사회단체까지 총망라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다.

이극로, 이우식, 민병두, 배성룡 등 비정치 인사들은 1월 31일 통일정권촉성회(統一政權促成會)를 조직해 좌우 진영의 즉각적인 합작을 바라는 동시에 정쟁 즉시 중지 및 정당의 자발적 해산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이극로 등은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 모두 참석하여 통일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월 10일에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불교계, 천도교계 등 6개 단체와 함께 ‘통일정권수립 기본조건’을 제시해 양 진영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월 15일 이극로는 “민족분열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며 조선어학회 대표 자격으로 좌우익 양 기구에서 모두 탈퇴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건민회 창설과 단선·단정 반대

이극로는 1946년 6월 16일 민족의식을 앙양하여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기하며 민족문화의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선건민회(朝鮮健民會)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권동진 윤세복을 고문으로 두고 부위원장은 이경석 윤치형이 맡았으며, 사무소는 서울시 수송동에 마련했다.

건민회는 “민생운동을 중심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통해 조선 국민의 국가생활의 중추를 세우려는 국민도량”을 표방하며 다음과 같은 강령을 내걸었다.

1. 우리는 민족의식을 앙양(昂揚)하여 완전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기(期)함
1.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에서 정계의 동향을 비판 건의하여 충실한 국민의 도를 지킴
1. 우리는 민족문화의 향상을 도모하여 세계문화 발전에 공헌함
1. 우리는 생존권 확보의 경제균등제도를 솔선 실천함
1. 우리는 동지의 총역량을 민중계몽운동에 집중함(이극로, 『고투 40년』, 89·90쪽)

6월 27일 긴급위원회를 개최해 사회 현안 문제를 다뤄 수해 및 방역 대책, 귀국 이재민 구제 대책을 결의하고 구체적 실천행동에 나섰다. 8월 1일에는 이극로 위원장이 남부지방의 콜레라 방역 상황과 동포들의 피해 실정을 현지 조사하기 위해 부산 등 경남 일대를 둘러보았다.

12월 5일 청우당·사민당 등 6개 단체 대표를 초청해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촉구하고 남북합작 독립촉진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대한 방책을 논의했다. 같은 달 25일에는 “재일동포 7만 명이 생존권을 절규하고 시위하는 중 일경 포위로 십수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차별에 항의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좌우 정파의 극렬한 대립을 비판하면서 그 원인을 “좌우익 정치인들의 저열한 정치도덕”에서 찾았고 건국방략으로는 소련의 신뢰를 받는 사람 1명, 미국의 신뢰를 받는 사람 1명, 조선민중의 신뢰를 받는 사람 1명 도합 3명이 나와서 로마시대의 삼두정치(三頭政治)처럼 하여 과도기의 정국을 수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경향신문』 1946.12.24)

1947년 10월 1일 중도 좌우세력을 일차적으로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좌우세력을 통합한 민족통일전선을 이룬다는 목표 아래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이극로는 김규식, 안재홍, 홍명희 등과 함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20일 전국 대의원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천도교 강당에서 민족자주연맹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연맹에는 4개 연합단체, 14개 정당, 25개 사회단체가 결합했는데 이극로의 건민회는 중도 우파로 분류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의 주요 목표는 민족자주에 기초한 완전독립과 좌우합작을 통한 민주주의의 성취였다. 이극로는 민족자주연맹의 선전국장, 정치위원, 대변인 등을 맡았다.

1947년 11월 제2차 유엔총회는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감독할 기구로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파견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1948년 1월 한국에 도착한 위원단의 이북 지역 진입을 소련 및 북한 당국이 거부했다. 이에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한 38선 이남 지역에 한하여 단독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건민회는 3월 10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우리는 이 결정에서 오는 단선(單選)·단정(單政)을 반대 배척하며 다만 앞으로 양군철퇴 남북통일 완전자유 독립전취를 위해서 투쟁할 것이다.”라고 발표하였다.

북한 측에서 3월 25일 밤 평양방송을 통해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할 것을 공식 제의했다. 남한의 김구, 김규식을 포함한 17개 정당·사회단체 및 기타 모든 단체를 초청 대상으로 했고, 예비회담의 개최 일자와 장소는 4월 14일 평양으로 정했다.

조선어학회 이사이자 건민회 회장인 이극로는 아래와 같이 이를 열렬히 환영하며 남북대표자 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한마디로 환영한다. 우리는 해방 직후부터 좌우합작과 3·8선을 없애는 남북합작을 병행하여 주장해온 것이다. 또 이는 민련(民聯: 민족자주연맹)의 정신이요 이번 소식은 이에 완전히 부합된 소식인 만큼 큰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추진에 노력하겠다. 회담 성공 여부는 미리 말할 수 없으나 우리는 비상한 노력을 해야 된다. 이때야말로 전 민중은 거족적으로 이를 추진할 필요가 있으며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해야 된다. 미소 양 주둔당국도 이 조선민족의 정신을 알아서 협력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독립신보』 1948.3.31)

4월 1일 이극로는 경교장을 방문해 김구, 김규식, 홍명희, 김붕준 등과 함께 요담(要談)을 갖고 평양 측에서 제안한 예비회의 일정과 절차, 연락원 인선 등을 놓고 장시간 협의하였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참가와 북한 잔류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김두봉의 사회로 연석회의 예비회의가 남북의 좌익 및 중도좌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회의에 김일성은 첫째 유엔조선위원단을 몰아내고 유엔총회 및 소총회의 결의를 무효로 돌릴 것, 둘째 단선단정을 반대할 것, 셋째 미·소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를 실현시킬 것, 넷째 양군 철수 후 선거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 4개항을 회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4월 21일 주영하가 연석회의 대표자 자격심사위원회 보고를 한 뒤,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를,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백남운이 「남조선의 현정치정세」를, 박헌영이 「남조선 정치정세」를 보고하였다. 모두 단선단정을 철저히 파탄시키고 외국 군대를 즉시 동시 철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투쟁의 결의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4월 22일 연석회의는 백남운의 사회로 토론에 들어갔다. 정오쯤에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김구·조소앙·조완구·이극로 등이 참석하였다. 김일성의 제의로 김구·조소앙·조완구·홍명희 등 4명이 주석단에 보선되었고, 김구와 조소앙·홍명희·이극로가 축사를 하였다.

동지 여러분!
나는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을 한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조선민족의 정치적 역량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현실이 증명하여 줍니다.
또 이 자리를 보십시오. 나는 이 자리가 우리 조선민족의 정치역량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한자리에 모여 우리 힘으로 우리 국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자주적 정치역량의 표현입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우리 정치역량이 더욱 힘차게 자라서 3천만 대중에게 새로운 행복을 주도록 분투합시다. 나는 역량은 없으나 이 회의의 성공을 위하여 미력을 다하려고 하며 간단히 소감을 말하는 바입니다.(이극로의 축사, 『북한관계사료집』Ⅵ)

4월 23일은 김원봉의 사회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여성대표들의 축하가 있은 뒤, 결정서 기초위원을 대표하여 홍명희가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를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민련의 이극로는 「전 조선동포들에게 격함」을 읽었고, 이와 함께 「사회주의 쏘베트연방공화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에 보내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의 요청서」도 채택되었다. 4일간에 걸쳐 진행된 연석회의를 통해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국제정세 및 남·북한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이 회의는 분단의 길목에서 남북의 정치인들이 이념적 대립에서 벗어나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여 합의를 이루었고 향후 남북정상회담의 귀감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가 끝난 후 이극로는 김원봉·홍명희 등과 함께 평양에 잔류하였다. 1948년 9월 12일 조선어학회에서는 정기총회가 개최되어 이극로의 이사 사임 및 명예이사 추대를 가결했다.

이제 북한에 잔류한 이극로의 행적을 간략히 정리해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과 함께 무임소상(~1953)에 임명되었다. 1948년 10월 교육성 안에 조선어문연구회가 설치되었는데, 그는 조선어문연구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1952년 10월과 1962년 7월에도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을 맡아 한글학자 정열모, 유열 등과 함께 북한의 국어학 연구, 말다듬기(문화어 운동의 전신), 사전 편찬 사업을 주도하였다.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및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6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향년 85세로 사망했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주요 저서로는 『고투 40년』(을유문화사, 1947), 『실험도해조선어음성학』(아문각, 1947), 『국어학논총』(정음사, 1948), 『조선어조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1966)등이 있다.

[참고문헌]
이극로, 『고투 40년』, 을유문화사, 1947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2009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 경인문화사, 2013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 책과함께, 2005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호,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2009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Ⅵ(1945~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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