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기념사업

연보

881

1920

1929
경남 창녕 출생

1950

1952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입학
1959
《문학예술》誌에 시 <비(碑)>발표로 등단, 60년대 ‘사화집(詞華集)’ 동인으로 詩作 활동

1960

1965
굴욕적 한일회담을 계기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에 대한 연구 시작
1966
《친일문학론》《이상전집》 출간
1968
고려대학교 4학년 재입학
1969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70

1970
《발가벗고 온 총독》 출간(선문출판사)
1974
《한국문학의 사회사》출간(정음사)
1978
《醉漢들의 배》 출간(평화출판사)

1980

1980
《韓國社會風俗野史》 출간(서문당)
1981
《정신대 실록》 출간(일월서각)
1982
《일제침략과 親日派》 출간(청사)
1984
《밤의 일제침략사》 출간(한빛출판사)
1985
《일제하의 사상탄압》 출간(평화출판사)
1986
《한국문학의 민중사》 출간(실천문학사)
1987
《친일논설 選集》 출간(실천문학사)
1988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1》 출간(일월서각)
1989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2》 출간(일월서각)
  ‘친일파총사’ (전10권) 발간을 계획하고 저술 중 폐기종으로 타계

1990

1992
故 임종국 선생 제6회 심산상 수상 (수상저서 : ≪친일문학론≫≪일제침략과 친일파≫

2000

2003
KBS1TV 인물현대사 ‘임종국’편 방영(연출 김정중)
2005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회장 장병화) / 보관문화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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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12일 일제 하 친일 문제 연구로 유명한 평론가 임종국이 60세로 작고했다. 임종국은 경남 창녕 출신이다.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지만, 문학에 뜻을 두어 시와 문학 평론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해설을 곁들여 그가 엮은 ‘이상전집 (李箱全集) (1956)’은 이상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꼽힌다.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임종국의 글쓰기는 친일 문제를 중심으로 궤적을 그려나갔다. ‘친일문학론’(1966)으로 점화한 그의 친일 연구는 ‘일제 침략과 친일파’ (1982), ‘밤의 일제 침략사’(1984), ‘일제 하의 사상탄압’(1986), ‘친일 논설 선집’(1987), ‘일본군의 조선침략사’(1988) 등으로 이어지며, 친일파와 그의 친구들이 권력과 여론 시장을 틀어쥔 한국 사회에서 민족적 자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작업은, 일본제국주의의 법적 부정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면서도 실제로는 일제 협력자들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대한민국의 분열증적 상황을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노력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놀랍지 않게도, 언론계를 포함한 주류 사회는 임종국의 이 ‘위험한’ 작업을 백안시했다. 임종국의 유고 한 대목.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한국일보 03.11.12. ‘오늘’<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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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중조의 고금산책]누더기 된 친일규명법

임종국(林鍾國·1929 ~ 1989)의 유고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민족은 2000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 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정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일제잔재, 민족 가치관 학살
이토록 민족정기를 염원하는 그의 지론은 식민지 잔재 청산은 물론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파행은 끊이지를 않는다는 경구이기도 하다. 임종국, 그는 이 땅에 민족정기를 심어주기 위해 ‘친일문제 연구가’ 또는 ‘재야 사학자’로 우뚝 선 인물이었다. 그가 줄곧 기록해온 작업은 친일자체를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보다 더 큰 차원에서 민족자존의 지평을 열기위해 진실을 가린 휘장을 걷어내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고통스런 몸짓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늘날 친일진상규명의 단초를 제공한 이가 바로 임종국이라 하겠다. 그나마 민족정기의 햇살을 밝히는 기록의 선구자였기에 뒤틀린 현대사를 올곧게 조명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그의 삶의 궤적은 위대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그는 창녕에서 출생했다. 당대의 지식인이요 천도교 간부였던 아버지 임문호를 따라 상경했다. 그런데 한 기록(용마반세기 회지)에는 마산상고 24회생으로 나타나있어 마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았나 여겨진다. 1952년 고려대 정치과에 입학했으나 문학의 꿈을 살려 이상(李箱) 연구에 깊이 몰두하기도 했다. 1959년 <문학예술>지에 시 부문 <비(碑)>를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체결된 1965년 곧바로 ‘친일문제 연구가’로 변신했다. 1966년 명저인 <친일문학론>을 발간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금기의 성역화로 여겨온 문단의 거목들이 천황과 일제를 위해 바친 매국매족의 증거물을 단기필마로 고스란히 실어놓았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징병·징용·정신대 일제 침략사 등 전반에 걸쳐 자료발굴·조사분석·연구에 주력 <일제침략> <친일파> <친일논설선집> 등 14권의 저서에다 수백편의 논문을 남겨놓았다.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피를 말리는 각고의 작업으로 선보인 저서들이 출판될 때마다 그의 몸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져 환해에 끝내 이승을 하직하고 만 것이다. 그의 치열한 기록정신이 표출됐기 때문에 살아있는 역사의 표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가 하면 이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에 딴죽을 건 이가 하필이면 합천출신 김용균(한나라당) 의원이었다. 이런 점에서 같은 경남인으로 심사가 뒤틀린다. 한마디로 그는 민족자존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 아닌가. 친일파들과 그의 후손들은 국가 중추기관의 요직에 걸터앉아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았다. 본보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부친 김명수(가네미쓰 메이슈)는 1935 ~ 1945년 합천 용주면장을 지냈고, 또한 금융조합장도 맡았던 인물이었다. 임종국이 쓴 <실록친일파>에 ‘2대 국회(김명수가 당시 국회의원)에서는 대일협력자가 20명으로 개헌국회에 비해 2배 증가했는데 반민법 폐기의 영향이 컸다’는 대목을 놓칠 수 없다. 그렇다면 부자 2대가 친일관련법을 반대한 셈이 아닌가. 더욱이 김 의원은 부친의 친일협력 논란에 불만을 표시하며 친일파라기 보다 단순한 취업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임종국은 어떤가. 천도교 당수를 지낸 부친은 물론 은사인 유진오(전 고대총장) 그리고 부친의 친구 조연현, 조용만, 백철마저 친일로 몰아세우고 호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2대가 친일 관련법 반대한 셈 이에 반해 김 의원은 특별법을 석연찮은 이유를 들어 적극 저지해 누더기 법으로 만든 그의 행동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보라! 임종국의 유지를 받든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의 혼으로 부활하고 있잖은가. 앞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펴낼 산실이요, 민족정기를 심어줄 정신적 곳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따라서 친일청산이야말로 민족사의 순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진실성을 부여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끌고 갈 동력이 되리라 확신해 마지않는다.

홍중조 논설주간(경남도민일보 04.03.12 <홍중조의 고금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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