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 60]
육당 최남선에 대한 장준하의 인식은 대단히 왜곡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상계> 1957년 12월호에는 표지에 ‘육당 기념호’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육당’은 육당(六堂) 최남선을 말한다. 표지 맨 윗자리에 ‘육당기념 구고재록-백제 구강(舊疆)으로’란 최남선의 구고를 알리고, 권두논문으로 이 글을 실었다.
최남선의 글은 1926년 백운사에서 발간한 <심춘순례>에 이미 실렸던 글이다. 이 무렵 장준하는 친일문인 김동인의 문학상을 제정한데 이어 친일학자 최남선을 기리는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여 뜻 있는 분들의 분노와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12월호 <사상계>는 표지 안쪽에 “사상계 편집위원회는 뜻을 문화의 소장과 민족의 명운에 두는 모든 인사들과 더불어 충심으로 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추도하고 그 출중한 인격과 생전에 남기신 업적의 위대성을 명감(銘感)하여, 이를 영세에 전하고자 선생이 서거하신 이해 1957년 송년호를 육당 기념호로 삼가 재천(在天)의 영전에 드리나이다.” 라는 글을 고딕체로 박았다.
그리고 뒷 쪽에는 ‘육당 최남선 선생 유영(遺影)’이란 캡션과 함께 전면에 사진을 실었다. 장준하는 또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이란 권두언을 썼다.
우리는 이 해를 보내면서 돌이켜 생각할 때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한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뜻 있는 모든 인사들이 가장 애석하여 마지 않은 것은 육당 최남선 선생의 서거였다. 선생은 약관 18세에 이미 궤란을 기도에서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우선 민족의 명영을 영원히 부지하려는 원대한 의도 밑에 문화의 황무지를 개척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이래 종시일관하여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족의 재흥을 위하여 발분망식하였다. 선생이 우리 역사학에 전심하여 마침내 사학의 태두로 일세의 숭앙을 받기까지에 이른 근본연유도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상아탑의 일개 학구로 그치지 않고 실(實)에 즉하고 의(義)에 나아가 항상 민족사상의 고취에 힘썼고 3·1혁명에 가담하여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이어서 장시일의 옥고를 치른 후에도 한 길을 더듬어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육당 선생은 이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었고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그로 하여 민족의 생명은 싹을 부지하고 겨레는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추어 광복에 이른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 글의 필자가 장준하일까 의문이 간다. 하지만 권두언 끝에는 ‘장준하 근기(謹記)’라고 기명하여 필자임을 분명히 했다. 장준하는 일본 유학 시절 도쿄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일군에 지원하라는 최남선과 이광수의 강연을 듣고 분을 사기지 못해 했었다. 그리고 일군을 탈출하여 독립군이 되고, 해방 뒤에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자 하여 <사상계>를 발행했다.
그런 장준하가, 중추원참의가 되고 만주건국대학 교수가 되고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역사왜곡에 앞장섰던 최남선의 사망에 최대의 예우를 표하고, ‘추모의 밤’ 행사를 연데 이어, 그의 죄과에 대한 비판을 ‘요동부녀들에 대한 억설’이라고 매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뒷날 박정희와 싸우면서 “3천만 국민 모두 대통령이 되어도 일군출신 박정희만은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라고 사자후를 토했던 정신과는 크게 상치된다.
최남선은 해방 뒤 반민특위에 체포되고, 마포 형무소에서 자신의 친일죄상을 뉘우치는 ‘자열서(自列書)’를 쓸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반민족행위자였다. 이와 관련,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최남선전집> 6권을 낸 바 있는 김준엽은 한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시에 춘원과 육당을 얘기할 수 있었던 건, 장준하 형하고 나하고, 그것도 임시정부에 가 있었으니까 할 수 있었지, 만약에 우리가 그런 배경이 없었더라면, 저 사람들 친일한 사람들 비호한다고 욕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의 지식인 육당 최남선에 대한 장준하의 인식은 대단히 왜곡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삼웅 기자
<2025-06-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거두 ‘최남선기념호’ 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