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한일 양국 정부는 모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에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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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정부는 모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에 나서라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2026년 1월 13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조세이(長生)탄광에서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을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양국 정부의 합의는 유족들의 절실한 염원에 응답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한일 시민사회가 양국 정부를 움직여 거둔 중요한 성과이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결성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아래 보추협)와 보추협의 사무국을 맡은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봉환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오랫동안 벌여왔다. 유족들은 돌아가신 가족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고 싶다는 일념으로 2000년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반환 청구 소송을 시작으로 2005년 일제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 1948년 한국으로 송환된 유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또한 두 단체는 2014년부터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가마후야’와 연대하여 일본 국회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교섭을 벌여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조사와 반환을 요구해왔다. 한일 시민단체는 2016년 아베 총리가 주도하여 추진한 ‘전몰자유골수집추진법’ 제정을 앞두고 조선인 희생자도 조사 대상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지만, 결국 조선인 희생자를 제외시킨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야당 의원의 질의를 통해 후생노동대신으로부터 한국 정부의 제안이 있으면 대응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답변을 끌어내기도 했다. 한일 시민사회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일본 정부는 DNA 감정 대상 기준을 확대했으며, 2023년에는 문재인 정부 당시에 확인했지만 코로나로 봉환하지 못한 한국인 희생자 한 분의 유해가 남태평양 타라와에서 드디어 유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인 희생자 조사를 회피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과 박근혜, 윤석열 정권의 무관심으로 수많은 강제동원 희생자에 대한 유해조사와 봉환은 좀처럼 진전이 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 반환에 합의했지만, 지금도 일본 전국의 사찰에는 1,700여 명이 넘는 희생자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2016년부터 일본 정부가 추진한 전사자 유해조사를 통해 유족의 품으로 돌아온 희생자는 불과 한 분에 불과하다.

2만 1천여 명의 조선인 군인·군속 희생자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이름으로 합사되어 있지만, 희생자 대부분의 유해는 아시아태평양 전역에 방치되거나 DNA 검사조차 거치지 않은 채 지금도 일본의 ‘치도리가후치 전몰자묘원’에 합장되고 있다.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를 조사하여 유족에게 돌려주는 일은 식민지 조선에서 희생자를 강제로 끌고 간 일본 정부가 국가의 책임으로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결국 과거를 봉인하려는 일본 정부를 움직인 것은 바다 밑의 진실을 세상으로 드러내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시민들이었다.

조세이 탄광은 1914년부터 석탄이 생산되기 시작한 해저 탄광으로 전성기에는 탄광 안팎에서 약 1천 명이 일했고, 연간 약 16만 톤의 석탄이 생산되었다. 당시 이곳 조세이 탄광은 ‘조선 탄광’이라고도 불렸다. 너무 위험하다는 소문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일하기를 꺼렸고, 그 대신 식민지에서 많은 조선 사람들이 동원된 것이다. 1942년 2월 3일 아침, 사고가 일어났다. 갱도가 무너진 것이다.

사흘 동안 바다에 우뚝 솟은 배기구 피야(pier)에서 물기둥과 거품이 끊이지 않고 솟아올랐다. 가족들이 바닷가에서 사흘 밤낮을 애타게 울부짖었지만, 회사는 탄광 입구를 막아버렸다.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 모두 183명의 노동자가 그날 이후로 차가운 바다에 그대로 잠들었다. 사고가 나기 며칠 전부터 물이 샌다는 노동자들의 보고가 있었지만, 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강요했다. 노동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날 죽음의 터널 해저 탄광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1991년 이 지역에서 재일조선인 지문날인 거부 운동을 지원해 온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아래 ‘모임’)’을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조세이 탄광의 비극을 밝히기 위해 애써 온 야마구치 다케노부(山口武信) 전 대표가 중심이 되어 한국의 유족을 찾기 시작했다. ‘집단도항명부’의 이름과 희생자들의 창씨명을 조사하여 호적의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받는 사람은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으니, 죽은 사람 앞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가족을 수십 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 온 고향의 유족들이 그 편지를 받았다. 모임이 찾은 유족들이 모여 1992년 한국유족회가 만들어졌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임은 유족들을 모시고 사고 현장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

2013년 모임은 희생자들의 창씨명이 아니라 본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웠다. 모두가 한숨을 돌리던 그때, 유족들은 아직도 차가운 바다 밑에 있는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고 싶다며 모임에 호소했다. 모임은 유해 발굴을 새로운 목표로 세우고 새로운 결의를 다져야만 했다. 바다 밑의 유해 발굴이라는 험난한 과제를 향해 누구도 가지 않은 길에 나선 것이다. 유해 발굴을 위해 모임이 갖은 노력을 다하는 동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해방 80년이 가까워 고령의 유족들도 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23년 12월 8일, 모임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회에서 교섭을 시작했지만, 일본 정부는 “유골의 깊이와 위치를 알 수 없어 조사가 어렵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아 협력할 수 없다.”라는 무책임한 답변만을 되풀이했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거부하니 시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모임은 육지 쪽의 갱도 입구를 찾기로 결의하고 시민모금을 시작했다. 2024년 9월 25일, 마침내 육지 쪽에서 들어가는 갱도의 입구를 찾았다. 갱구는 세로 160cm, 가로 220cm의 통로로 성인 남성이 허리를 굽혀 들어갈 수 있는 좁고 위험한 것이었다. 강제노동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사고로부터 82년 만에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뒤 모임은 다섯 차례의 잠수 조사와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계속해서 벌였다. 해저 유해 발굴이라는 어려운 조건 때문에 비록 유해는 찾지 못했지만, 미디어와 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 속에 벌어진 정부 교섭을 통해 커다란 성과를 얻기도 했다. 2025년 4월 7일 이시바 총리가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조세이 탄광 유해 수습을 “귀중한 일”이라고 언급하며 국가의 책임을 검토하겠다고 발언하면서 정부 대응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이제 유해를 찾아 일본 정부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보이면 된다. 2025년 8월 25일, 드디어 한국 잠수사들이 수심 43m 지점에서 희생자의 유해로 추정되는 3점의 유해를 발견했고 다음 날에는 두개골을 찾았다. 83년 만에 강제동원 희생자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2025년 8월 23일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한일정상회담이 열렸다. 해방 80년, 한일협정 60년을 맞은 뜻깊은 해인만큼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한 진전을 기대했지만, 역사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미래지향’을 선언한 회담에 많은 이들이 실망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아직도 이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희생자의 절절한 외침이 조세이 탄광의 바다 밑에서 이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결국 2026년 1월, 역사의 진실을 바닷속에서 끌어올린 시민들의 집요한 노력은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정상회담을 통해 그동안 이 문제를 외면해 온 일본 정부와 극우 다카이치 총리마저 움직이게 만들었다. 양국 정부는 이번 합의를 바탕으로 모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 조사와 봉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 『한국노총』 2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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