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어느 신입회원의 비효율적인 답사기
김선미 후원회원
‘현재’는 너무 천연덕스럽게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저에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에너지를 종종 가늠하지 못한다. 역사책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보며 항상 궁금했다. 그 당시를 살던 김 아무개와 최 아무개는 본인들이 어떤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지 체감했을까? 그들의 경험과 기억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씨앗이 되고 또 어떤 함정이 될지 자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조급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지점에 서 있나. 만약 내가 어떤 중요한 순간을 관통하는 중이라면,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아니,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누군가는 거창하게 굴지 말고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나 충실하게 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편이 더 안전하고 실속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질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호기심이 일기 시작하면 꼭 그것에 관한 경험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대지를 디디며, 몸으로 잘근잘근 씹어서 흡수해야만 비로소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비효율적인 태도. 나는 항상 그러한 태도에 마음이 끌렸다. 2026년 1월 21일, 연초의 정신없는 회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3박 5일의 답사를 덜컥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
‘중국 광동지역 항일유적 답사-아리랑 로드를 가다’는 나의 첫 번째 민문연 모임이다. 2025년 하반기에 후원회원이 되었던 터라 민족문제연구소를 민문연으로 줄여 부르는 것조차 익숙지 않았다. 그런 초짜 신입회원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심지어 며칠을 동고동락해야 하는 국외 답사 모임에 망설임 없이 신청하다니. 그 이유 중 8할은 ‘중국’이라는 나라와 ‘김산’이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답사 공지를 보자마자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이 나라와 그 인물에게 꽝 하고 부딪힌 경험이 되살아났다.
2008년 처음 만난 두 세계, 중국과 김산
나에게 중국은 얇은 가림막이 쳐진 나라였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몰라야 할 나라’로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외국 여행을 좋아했지만 중국은 늘 제외했다. 공중화장실에 문이 없다느니, 사람들이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무질서하다느니 하는 각종 소문도 어느새 내 안에 단단한 편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2008년, 재중국 현대기아자동차 잡지 편집장으로 일하며 서울과 베이징, 상하이를 오가는 생활을 시작했다. 통역해주는 직원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고, 호텔과 회사만 오가다 일정을 마치면 쏜살같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6개월쯤 흘렀을까. 어차피 가야 하는 중국이라면 제대로 들여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방어의 마음을 거두자, 처음으로 그 나라 언어가 궁금해졌다. HSK 3급을 따고, 출장 때마다 갤러리와 북카페를 찾아다녔다.
선입견을 거둔 뒤 만난 중국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곳이었다. 우리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공부해야 하는 나라였고, 축적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놀라운 속도를 만들어내는 사회였다. 중국에 관한 애정을 품은 채 8년간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을 이어갔다. 2018년에는 중국을 새롭게 바라보는 책 『베이징 도큐멘트』를 출간했다. 중국을 향한 나의 마음에 구체적인 형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김산(장지락). 처음 중국에 갔던 2008년, 아마도 겨울 즈음으로 기억된다. 한국의 근대사나 중국에 관한 책이라면 마구 사 모으던 그때.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아리랑』을 처음 읽었다. 중국이라는 배경 때문이었는지, 김산이라는 인물의 극적인 삶 때문이었는지, 나는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사가 교차했다. 혁명과 망명, 이상과 배신, 연대와 분열이 한 개인의 삶 안에서 뒤엉켜 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한 개인이 국가에 투사하고 있는 가치는 개인적인가, 정치적인가. 내 앞 사람들의 피와 살 위에 서 있는 나는 또 어떤 존재인가. 지금 내 옆에서 여전히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놓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책을 덮고도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김산은 피해가고 싶었던 본질적인 질문들을 정면으로 끌고오는 인물이었다.
민문연의 답사 공지를 보자마자 18년 전의 이 기억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중국의 화남 지역과,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김산의 흔적들을 내 눈과 내 발로 경험할 기회였다. 잡혀 있던 몇 개의 일정을 취소하고 답사를 준비했다. 이번 여정의 교재 역할을 할 김영범 교수님의 책 『김산 따라 아리랑 로드로』와, 18년 전 나를 깨운 『아리랑』을 캐리어 깊숙한 곳에 함께 챙겼다.
내 앞의 사람들
“국가를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시스템 안에서 뭉뚱그려져 있는 ‘개인’을 시스템 밖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산은 저에게 무척 문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경한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호기롭게 자기 소개를 했다. 40여 명의 답사 인원을 태운 버스가 중국 선전의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제주에서부터 서울, 상하이까지 다양한 지역, 다양한 직업,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김산을 따라 모였다. 100여 년 전 그가 걸었던 혁명의 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선전, 광저우, 하이펑, 홍콩에 이르는 아리랑 로드의 첫 답사지는 광저우에 자리 잡은 황포군관학교(육군군관학교)였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결과로 만들어진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군사학교다. 이번 아리랑 로드 답사 장소 중 유일하게 아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발행한 잡지 『삼천리』에서 황포군관학교 방문기(기자가 방문한 곳은 광저우가 아닌, 난징으로 옮긴 후의 학교)를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교장이었던 장제스는 ‘피압박민족 후원’의 일환으로 조선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조선 청년들은 신식 군사 교육과 새로운 사상들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는 한편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힘을 기르고자 했다. 김성숙, 오성륜 등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선혁명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12월에는 광저우 기의(광저우 코뮌)에도 참여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였을 것이다.
김산뿐 아니라 장성철, 이빈, 신악, 강섭무, 안경근 등 많은 조선인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학생, 교관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한복판에서 그들의 마음에 서렸을 비장함을 상상해 본다. 김원봉을 비롯한 황포군관학교 출신 의열단 간부들은 졸업 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어 조선인 군사간부를 양성했다. 이 노력들은 훗날 ‘조선의용대’의 토대가 된다.
황포군관학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중국과 교류하고, 조선 독립을 위한 군사적 기반을 만들었던 곳으로써 의미가 깊다. 다양한 사진과 기록들, 당시 학생들이 공부했던 교실, 생활관 등이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그 시대를 상상하며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우리에게는 정해진 일정이 있었고 40여 명이 단체로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답사 내내 민문연 광저우 지부 여러 선생님의 해설, 김영범 교수님의 밀도 높은 이야기들이 더해졌다. 하지만 들어오는 정보의 총량에 비해 내 안에서 처리되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런 규모와 방식의 답사가 처음이었던 터라 더 집중이 안 되었던 것도 같다. 그럼에도 책에서만 보던 역사적인 장소를 내 발로 디디고, 내 눈에 담는 것은 각별한 힘이 있었다. 이 감각을 휘발시키지 않는 방법은 선생님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단서 삼아 다시 공부하는 것뿐이다. 알면 알수록,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이 상하게도 모르는 게 더 많아져 공부할 거리가 늘어만 간다.
이번 답사에서도 느꼈지만 ‘실제의 것’은 힘이 세다. 복제 불가능한 고유한 아우라를 지녔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근대사에 관한 답사를 하다 보면 종종 허탈할 때가 있다. 보존보다는 개발을 미덕으로 치는 도시에서는 ‘무슨 무슨 건물이 있었던 옛터’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마저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실제의 것들을 만날 때에 활성화되는 분명한 감각들이 있다. 찢어진 깃발이나 사라진 건축물의 잔해라도 그때의 흔적이 꼭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 아우라를 다시금 느낀 건 황포군관학교 관람을 마치고 만난 낮은 묘비들에서였다. ‘동정진망열사능원’은 군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희생된 황포군관학교 학생과 간부 516명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묘역이다. 옅게 구름 덮인 회색빛 하늘을 배경 삼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다 보면 시간의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제각각 크기의 묘비들을 만난다. 그 속에 한국인 김근제(23세, 1904년생), 안태(28세, 1899년생) 지사의 묘비가 있다. 황포군관학교 학생으로 중국 혁명 과정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이다. 언젠가 맞게 될 조국의 독립을 그리며 중국 혁명의 한가운데로 나간 사람들. 황포군관학교 학생 명단에서 확인된 한인 인원만 73명. 우한 분교를 비롯한 여러 분교의 조선 청년들까지 합하면 200명이 넘는 숫자라고 한다. 조선의 독립만 바라보며 정진하던 젊은 청년들은 일부 중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또 일부는 광복과 분단을 겪으며 한국으로 북한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묘비에 선명하게 새겨진 ‘한국’이라는 한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세계 24개국에 약 1,032개소의 독립사적지가 있으며, 그중 약 47%인 483개소가 중국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근대사 안에서 중국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협력하고 연대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혁명의 기운 때문일까. 광저우에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흔적들이 적지 않다. 그중 일제의 수색을 피해 광저우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8년 7월 22일부터 9월 19일까지 머물던 건물을 답사했다. 중국 광저우시 동산구 휼고원로 12호. 그동안 없어진 줄 알았다가 2017년에 이르러 강정애 박사와 주광저우 총영사관의 노력으로 청사의 소재지를 재확인한 곳이다. 우리역사연구회 대표인 강정애 박사는 중국 화남 지역 한인 독립운동사를 발굴·연구하면서 『황푸군관학교의 한인』을 출간한 분이다. 앞서 언급한 김근제, 안태 지사의 묘를 발견한 이기도 하다. 역사의 조각들은 이렇게 다양한 경로로 건져 올려진다. 중요한 독립운동의 흔적들이 국가 차원에서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과 동시에, 기록되지 못한 것들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현재로 소환하려는 시도가 민간 차원에서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의 사람들
이러한 민간 차원의 노력은 이번 답사 구성원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아리랑 로드 답사를 이끈 민문연 광저우지부 회원들과 우리역사연구회 사람들, 그리고 상하이에서 온 HERO 역사연구회 구성원들은 독립운동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중국에 관한 깊은 이해로 답사의 밀도를 높여주었다. 나머지 참가자들의 역사 인식과 관심사도 남달랐다. 지역의 역사와 인문학적인 가치를 연구하는 전직 역사 선생님. 국내 최초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단’의 가치와 의의를 일깨워준 회장님. 철학에 관한 우문에 현답을 내어준 전직 국민윤리 선생님. 청계피복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민문연 광저우 지부장님. ‘천제, 인제, 지제’의 가치를 알려준, 중학교 2학년 손자와 함께 답사에 참여한 원장님.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 활동한 전교조 안산지회장 선생님. 이들 모두 스스로 현대사의 어느 부분을 성실히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내 뒤의 사람들
“그 녀석은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뛰놀다가 지금은 미국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이 일본에서 드디어 번식을 시작했다.”
김산이 중국어로 발표한 소설 <기묘한 무기>의 첫 부분이다. 제국주의를 의인화한 그의 문장이 지금 봐도 쉽고 절묘하다. 1929년 중국공산당 베이핑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이 소설을 써 다음 해 중국어 잡지 『신동방』에 발표했다. 의열단원들이 1922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감행했던 일제 육군대장 암살미수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김산은 ‘옌광(炎光)’, ‘리옌광(黎炎光)’이란 필명으로 수필뿐 아니라 시, 평론, 소설, 희곡 등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했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 자신의 신념을 전하고,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애쓴 것. 참으로 지독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디 가서 쉬이 막내가 되지 않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확실히 내가 막내격이었다. 민문연 회원이라는 교집합 때문이었을까. 내 나이를 이미 거쳐간 분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고 또 흥미로울 수 있다니. 우리의 인문학적 수다는 호텔 방에서도, 식사 자리에서도,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세대를 막론함으로써 더 풍성해지는 대화. 내 머릿속, 오랫동안 꺼져 있던 전구에 반짝 불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온 중학교 2학년 손자와, 아버지와 함께 온 스무 살 아들은 이 여정을 자기 친구들에게 뭐라 설명할지 궁금해진다. 그 푸르른 친구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김산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내 앞의 사람들에게 전달받은 이 바통을 뒷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는 오랫동안 고민해야 할 숙제다.
스마트폰 클릭 한 번으로 모든 정보를 얻는 시대에 굳이 시간과 비용을 내어 먼 길을 떠나는 것은 ‘비효율’의 영역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비효율적 태도는 몸의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활성화한다. 고정된 인식에 실금을 내고, 그 틈 사이로 세계는 다시금 확장된다. 나는 비효율이 데려가는 세계를 믿는다.

3박 5일의 답사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 방학진 기획실장님이 불쑥 나에게 답사기를 부탁했다. 역사에 일가견이 있는 회원들을 두고 초짜 회원에게 부담을 지우다니. 지극히 사적인 답사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미리 이야기했으니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쓰는 중이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한 개인의 답사기다. 그날 아리랑 로드를 함께 떠났던 40여 명의 기억과 경험은 저마다 다른 결을 지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도 다시 들어보고 싶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체화하는 과정에서 멀게만 느껴지던 역사는 각자의 삶에 착 달라붙게 될 것이다.
아, 이번 답사에는 30년간 후원만 하다가 처음 오프라인 모임에 나온 회원도 있었다. 올해도 민문연에서 이런저런 답사계획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답사의 주제에 마음이 끌린다면 망설임 없이 그 여정에 함께 하시길. 어색해하는 당신 곁에는 아마도 (조금은 익숙해진) 내가 있을 확률이 높다.


![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history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