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의 자취를 찾아 떠난 전북 부안 줄포 답사기

“이완용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었나요?”
이번 주말(7일) 답사는 한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이 잘못된 사실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다. 대개 독립운동가들은 영남 출신이 많고, 호남에 유독 친일파들이 많다고 말씀하셨단다. ‘보수의 본향’이라는 대구와 경북 사람들의 긍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땅이라는 자존심에 기인한다고 설명하시더란다.
나름의 수긍 가는 논리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는 여전히 농업의 경제적 비중이 절대적이었던 때였다.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등 너른 들이 펼쳐진 호남은 지역의 토호와 권세가들의 ‘먹잇감’이었다. 권력에서 밀려나 좌천되더라도 물산이 풍부한 호남으로 발령되길 바랐고, 그들에게 지역민에 대한 수탈은 일상이었다.
이완용이 호남 출신이라는 착각은 그와 관련된 자취가 서울 주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어서 생겨난 듯하다. 당장 그의 무덤이 전북 익산에 있었다. 지금은 직계 후손에 의해 파묘되어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다. 해방 직후부터 그의 무덤은 온 국민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파묘 당시 그의 유해가 담겼던 관 뚜껑이 한때 인근 대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그조차 지금은 사라졌다. 그와 먼 친척뻘이었던 역사학자 이병도가 친일 잔재 청산을 주장하며 박물관에서 꺼내어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다.
친일 잔재 청산의 대의를 강조했지만, 우봉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조상의 행적을 지우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병도 자신도 지난 2009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 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 하긴 친일파가 친일 잔재 청산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세탁하려는 행태는 우리 현대사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이완용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한 주역이었다. 독립협회의 2대 회장을 역임하며 만민공동회의 개최를 지원하는 등 정부의 개혁을 촉구하는 데 앞장섰다. 유능한 개화파 관료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독립협회가 조정과 갈등을 빚는 와중에 지금의 도지사 격인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어 내려왔다.
전북 관찰사로 재직한 시기는 반년에 불과할 만큼 짧았지만, 그동안 인근의 토지를 사들이는 데에 지위를 활용했다. 이완용의 땅을 발 딛지 않고서는 전북의 들녘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방대한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좌절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 증빙할 사료가 사라지면서, 그가 소유한 땅 대부분은 국가로 환수되지 못했다.
당대 명필로 손꼽히던 이완용의 친필 유묵도 과거엔 군산 근대 역사관 등 전북의 몇몇 박물관에 자주 전시됐다고 한다. 워낙 다작인 데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 부문의 심사 위원으로 위촉될 만큼 수려한 필체를 자랑한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獨立門’도 그가 쓴 글씨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전북의 작은 외딴 어촌 마을에 이완용의 ‘휼민 선정비(恤民 善政碑)’가 남아있다고 해서 부안군 줄포면을 찾았다. 전북 관찰사 시절, 그가 이곳 주민들에게 베푼 선정에 대한 보답으로 당시 부안군수가 세웠다고 전한다. 지금 실물은 줄포면사무소의 지하 창고에 보관 중이라 볼 수 없고, 비가 세워졌던 자리도 도로에 덮여 사라졌다.
그가 베푼 선정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남아있다. 그가 전북 관찰사로 부임한 직후 줄포에 큰 해일이 일었는데, 포구에 정박해 있던 배들이 파손되고 수많은 민가가 바닷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때 구휼미를 배급하고 제방을 중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지방의 행정 책임자로서 당연한 조치지만, 이완용이기에 특별해 보이는 느낌이다.
선정의 내용으로만 보면 비석을 그대로 세워둘 법도 하지만, 이완용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상 그냥 놓아둘 순 없었던 듯하다. 하루아침에 무덤이 파묘 당하고, 친필 유묵들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선정비가 뽑혀 치도곤당하는 건, 그의 ‘업보’다. 그의 이름은 우봉 이씨 가문의 족보에서도 지워졌다.


지금 줄포면에는 그를 떠올릴 만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가 지시해 쌓았다는 제방이 현재 면 소재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비석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되레 “굳이 왜 보려 하느냐”고 반문하는 면사무소 직원의 대응에도 이완용과 줄포가 묶인 끈을 끊어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느껴졌다. 참고로, 휼민 선정비 실물은 사전 신청하면 주중 근무 시간 중엔 관람이 가능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창고에 처박혀 있는 이완용의 ‘휼민 선정비’를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우면 좋겠다. 그의 자취를 없앤다고 그의 죄상이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비석을 통해 전북 관찰사 시절 그의 행각에 대해 찾아보고 공부하고 교훈 삼으면 될 일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요, 치욕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공교롭게도 이에 걸맞은 유적이 줄포면사무소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하나 있다. 부안 김상만 가옥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2대 부통령을 역임한 인촌 김성수의 아들인 일민 김상만이 태어난 곳이다. 선친의 유산을 물려받아 동아일보의 회장 자리에 올랐고, 고려대학교 등을 소유한 고려중앙학원을 경영한 인물이다.

몇 대째 거물급 정치인과 언론인을 배출한 고택인데도, 인적이 끊긴 듯 썰렁하기 이를 데 없고 언뜻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철로 된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관리자 연락처가 적힌 종이 팻말만 덩그러니 붙어 있다. 관리자의 도움을 받아 뒷문으로 들어가 퇴락한 고택을 한참 동안 거닐었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찾는 관광객도 없다 보니 마당의 공기마저 을씨년스럽다. 마루는 삐걱대고 곳곳에 거미줄이 내려앉았다. 번듯한 거라곤, 철 대문 너머 문간채 앞에 우뚝 선 김기중, 김경중 형제의 선정비와 김상만의 공적을 적은 안내판이 전부다. 참고로, 김경중은 김성수의 친부이니, 김상만의 조부가 된다. 그들 형제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역한 집안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어서 주민들 사이엔 존경은커녕 얼씬거리는 사람조차 없어. 문화재 관리인과 <동아일보> 직원들만 이따금 오가는 것 같더라고.”

굳게 잠긴 철 대문 앞에서 토박이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그는 김상만 집안을 두고 줄포가 항구로서 번창할 때 이사해 와서 큰돈을 벌어 서울로 떠난 이해에 밝은 장사치일 뿐이라며 흉을 봤다. 그는 옛집이라도 남아있으니, 그들이 친일파였고 독재정권의 부역자라는 걸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줄포면에서만 70여 년을 사셨다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면사무소 창고에 보관 중인 이완용의 ‘휼민 선정비’도 꺼내어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난 1994년 문민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비석이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이렇게 속삭이듯 답했다.
“비석을 부순다고 해서 친일 잔재가 청산되는 것도 아니고, 유물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는 득도 있긴 할 텐데, 그래도 이완용이라서…”
3.1운동 100주년이던 지난 2019년에도 이 비석의 보존 문제를 두고 지역 사회에서 갈등이 빚어졌다고 한다.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와 함께 지역의 이미지 훼손을 우려하는 주장도 제기됐다고 한다.
사족. 이완용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이다.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이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과잉 수사로 문제가 된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의 그 백현동 맞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전라도는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나 부패한 토호들의 탯자리가 아니라 그들이 탐학을 부리던 한 맺힌 수탈의 땅일 따름이다.
서부원 기자
<2026-03-0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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