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경성고학당 출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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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24]

경성고학당 출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박광종 특임연구원

1. 경성고학당의 8년간 고투(苦鬪)

고학당의 설립은 이준열의 자발적인 교육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공업전문학교의 조선인 자치조직인 공우회(工友會) 회장이었던 이준열은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그해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공전(工專) 동창생 최의창을 만나 대중적 교육사업에 의기투합했고 지방 출장 중에 우연히 대한광복회 박상진 열사의 아들 박응수한테서 당시 3만원 가치의 산야를 기증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학비를 전액 면제하는 고학당(苦學堂) 설립안을 구체화했다.

최근 신문을 의거하건대 고학생 구제방법에 대하여 박응수, 이준열, 최의창 등 제씨의 고심한 결과로 고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고학당을 설립하려고 획책중인 바 그 학당에 입학하는 학생은 중등 정도의 교육을 5년간에 완전히 졸업하도록 교수할 터이라 한다(『조선일보』 1923.2.23).

고학당은 무산자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을 표방했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교육자들의 자발적 지원이 있었기에 각 교과별로 적정한 교사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교사들은 과거 경력에 따라 ① 경성공업전문학교 동창 ② 현직 교사들 및 교육사업가 ③ 해외 유학생 출신으로 분류된다. 설립 초기에는 공업전문학교 동창인 최의창, 김용현, 이대우, 최성옥이 교사진에 참여했고(『매일신보』 1923.4.6), 이후 다른 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중견 교사와 교육사업가들이 결합하였다.

1923년 5월 개교 당시 교사진은 다음과 같다. 배재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권진규가 고학당에 출강하였으며, 박형남이 한문 역사 과목을 담당하고, 타학교 교원이었던 조종환이 수학을, 남상목이 영어, 최성옥이 체조, 그리고 설립자 이준열은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신 과목을 가르쳤다. ‘고학의 성공사례’로 유명한 동세현 씨도 학교 운영에 참여했다.

역대 고학당 교사진 명단

출처: 남신동(2011), 「최초 사회주의 학교의 등장: 경성고학당(1923~1931)」). 관련자료에 근거해 일부 수정 및 보충

이렇게 교사진을 확보한 후 1923년 5월 1일 훈정동 한모퉁이 헌집을 빌려서 개교했다. 하지만 개교한 지 세 달도 못 되어 그 헌집이 한일은행에 저당 잡혀 쫓겨나게 되자 일단 1개월의 기한부로 시천교 교당 일부를 빌려 썼다. 이후 다시 교사를 옮기게 되는데 동대문 밖 신설리에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인 동물사육장으로 소와 말, 토끼 등 온갖 짐승을 사육하고 도축하던 곳이었다.

개교 후 맞닥뜨린 당면 문제는 학생들의 숙식를 해결하고 학교운영비를 조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학교 재정사업을 전담할 기구로 ‘고학당협회’가 5월 12일에 발족해 각종 재정사업을 관장했다. 협회 구성원은 대다수가 교사였고, 학우회를 매개로 학생들 또한 학교 재정 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재정사업의 일환으로 그해 6월부터 공평동 인근에 야시장을 개장했으나 운영 미숙과 도난 사고, 여름 장마로 인해 오히려 재정 마련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편 고학당 설립 취지가 널리 알려지자 동정 여론이 크게 일어 귀족, 사회단체나 작은 점포, 일반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금품이 답지했다. 민영휘 자작이 100원, 신종당 시계포에서 괘종시계, 중앙예배당 여자부에서 10원 등등 각계각층의 후원이 있었다. 그해 10월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고학당을 시찰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밖에 종로청년회관에서 고학생음악회를 열고 그 입장료를 모아 기부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 지원이 일시적인 것이어서 고학당 측에서는 항상 운영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24년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학당 학생을 중심으로 한 아마추어 극단인 고학당 순회극단을 조직하여 전국 55군을 순회하며 동정금을 모금했다.

1924년 연말에 고학당에 낭보가 들려왔다. 재력가 백인기가 신설동에 ‘서울고무공사’를 지어 고학생들은 채용하고 그 제조품을 판매해 학생들의 생활비를 보충한다고 했다. 실제로 이 공장이 지어져 학생들에게 보탬이 되기는 했으나 고학당의 상시적인 재정 부족이 해소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25년에 제3기 입학생이 들어오면서 학생 수가 200~300명에 달하자 기존 교실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고학당협회는 새 교사 건립사업을 추진해 독지가의 후원으로 숭인동에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비 모금을 위해 1925년 7월부터 8월까지 전국순회강연회를 열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1926년에 드디어 새 교사가 완공되었다.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만한 방 12칸과 식당, 변소 등이 구비된 건평 80평 기숙사와 교실 6개와 사무실 1칸, 부속실 2칸 도합 건평 100여 평의 큰 터였다. 고학당의 자체적 노력으로 신 교사 완공이라는 성과를 보이자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1927년 3월 ‘고학당유지회’가 발족되어 전국 유지 13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고학당의 재정지원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 무렵 고학당의 재학생들은 여전히 밤에는 만두장사, 날품팔이, 야경꾼 등 고된 노동으로 힘들었지만 향후 사회에 진출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일보』 1927년 12월 11일자에 실린 고학당 재학생 김유연(金有淵)의 「만주(만두)장사」라는 시에서 잘 나타난다. 다음은 「만주장사」 전문이다.

만주장사
나는 만주장사이다/캄캄한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이며 목청껏 외우치는/만주장사이다
“만주나 호야호야”/이 골목에서도 저 골목에서도/“만주나 호야호야”
귀먹은 상안아 들리지 않느냐/열에 한 놈 대답이 없고나!
오! 그러나 나는/붉은 햇살이 이 거리를/뒤덮을 때까지
맘껏 힘껏 외우칠란다/외우쳐 큰 것을 나을란다!

고학당은 새 교사 완공 이후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했다. 그런 의미에서 1928년은 아주 중요한 해였다. 1923년 첫 입학생이 5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해였기 때문이다. 2월 25일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어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그 자리에서 정관진과 이학종이 우등생으로 표창받았다.

이후 초대 교장 이준열이 2선으로 물러나고 일어를 가르치던 연학년이 제2대 교장에 취임했다. 연학년 교장은 학생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이전에도 학생들이 야시장 운영, 순회강연회·연극회 개최, 인쇄소 운영 등 학교운영에 능동적으로 참여했으나 1928년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어 고학당의 교양과 운동, 서무, 재무의 각 부서가 전적으로 학생들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또한 고학당은 교육 목표와 활동에 있어서도 전면 쇄신하여 “무산자운동의 엄정 확립”의 취지로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했다.

“무산자운동의 엄정 확립”의 취지에 따라 교육 목표도 바뀌어 “모든 일은 학생군의 힘으로”라는 표어 아래 ‘자치적 교양방법’을 도입했다. 자치적 교양방법은 ①사회과학 학습 ②토론회 ③좌담회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구현되었다. 사회과학 학습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과학의 지식을 연구 토론하는 과정이고, 토론회는 반 단위의 조사부를 꾸려 매일매일 사회에서 발생하는 실제문제를 조사하여 토론하는 활동이고, 좌담회는 각종 학급운영이나 학생간 친목도모를 위한 모임이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재학생들은 반제국주의 사상과 계급의식을 배양하고, 구체적인 사회활동으로 표출하였다.

당시 재학생들이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그 대의에 공명하고 있었음은 1930년 고학당에 입학한 이종의 회고록 「독방의 시인 이종」과 1931년 당시 3학년이었던 김삼룡이 심문조사 과정에서 했던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낮에는 학과공부를 하고 밤에는 밥벌이를 했다. 틈을 내어 『사회주의 대의』나 『자본주의의 모순』 등의 사회과학 서적을 돌려보면서 토론모임도 가졌다. 기쁘고 행복했다. 가출을 반복하며 쌓였던 응어리진 한이 풀리는 것 같은 즐겁고 신명나는 시기였다. 몸은 힘들고 시간은 모자라 어려웠지만 새로운 사람과 사상을 만나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길 바 아니었다. ‘혁명을 꿈꾸는 자는 행복하다!’—「독방의 시인 이종」

나(김삼룡)는 1925년 9월부터 『마르크스주의 진상』 『사회주의 대의』 『사회주의학설 대요』 『무산청년에게 준다』 『유물사관 대요』 등을 읽고 현재 사회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대립하여 항상 불행한 삶을 지속하고 있다. … 그런 까닭에 다수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제도를 폐기하고 재산을 평등하게 분배하여 공산제도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김삼룡 판결문」(경성복심법원 형사부, 1931.3.19)

1929년에 들어서자 전 교장 이준열이 책임비서로서 공산당재건운동을 주도하다가 6월에 검거되었고, 새로 부임한 이종률 선생이 학생맹휴옹호동맹에 연류되어 구속되었으며, 학생전위동맹 주도자인 정관진 이학종 김태래 등이 수배되었고, 고학당 학생 이병직 이민형 등이 체포되는 등 고학당 관련자들이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 당국은 1931년 4월경 사립학교규칙에 의거해 고학당을 폐쇄시키겠다고 최종 통고했다.

이에 대해 고학당은 교수진, 졸업생, 재학생들이 이 폐쇄 조치에 맞설거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결국 1931년 7월 8일 연학년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무산학생 교양소로서 거의 존재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상황을 성토하며 8년간의 고투를 뒤로 한 채 고학당의 폐교를 선언했다.

2. 조선학생전위연맹 결성과 서울에서의 학생시위 주도

경성고학당 학생들이 주도한 조선학생전위연맹 결성

1927년 3월, 사회주의 운동의 전위 분자이자 당시 고학당에 재학 중이던 정관진, 이학종, 김태래 등은 고양군 안암리에 있는 고학당 교장인 이준열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선 혁명 운동에 주력할 핵심 인물을 양성하고자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직했다. 당시 이학종이 정치문화부, 정관진이 조직부, 김태래가 재무부의 책임을 맡아 목적 달성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며, 동맹원 확보와 사상 교양 및 선전 활동에 매진했다.

1928년 3월, 졸업기를 맞아 조직에 변화가 생기자 이들은 재동 93번지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했다. 투쟁 전선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단체 명칭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변경하고 조직를 개편했다. 이때 김태래가 책임비서, 한경석이 조직부장, 김순희(중앙고보 4년생)가 선전부장을 맡아 본격적인 지하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빈번하게 중앙부원회를 열어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연락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중앙·배재·경성제일·경성제이·중동·경신 등 각급 중등학교 내에 세포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게 하여 사회주의 선전과 목적 수행에 힘썼다.

1929년 11월, 김순희 집에서 제5회 중앙부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당시 발생한 광주학생시위에 대한 보고와 토의가 이루어졌다. 동맹원들은 이를 기회 삼아 전면에 나서 직접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전 조선의 학생들을 동원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격문을 인쇄하고 실제 행동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서의 마지막 활동인 동시에, 유례없는 규모로 번진 학생시위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조선학생전위동맹은 기본 강령 3개와 행동 강령 22개를 채택했는데 학생의 정치운동·사상운동의 자유 보장, 학생자치제 실시, 교육기회 평등 실현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아래는 기본 강령 3개조이다.

1. 우리는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교육에 항쟁한다.
2.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세포자 양성을 기(期)한다.
3. 우리는 조선학생의 당면문제를 과학적으로 자결(自決)하는 것과 동시에 공고한 조직을 기한다.

광주학생운동에의 개입과 서울에서의 대대적인 격문 살포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시위 소식이 들려오자 서울의 학생전위동맹과 조선공산청년회는 11월 7일 부건과 권유근을 광주로 급파해 광주지역 학생투쟁본부와 힘을 합쳐 학생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방도를 모색했다. 광주의 1차 시위 후 부건과 권유근은 전라도 책임자인 장석천과 장재성을 만나 전국 시위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 무렵 학생전위동맹과 공산청년회는 학생시위의 전국 확대를 위한 방침을 정했다. 11월 18일 공산청년회는 이항발의 숙소에서 중앙간부회를 열고 전국 시위를 결의했다. 아울러 신간회와 연대하는 한편 중앙청년동맹 등을 표면에 내세워 광주학생시위에 대한 지지여론을 조성하고, 학생전위동맹의 지도하에 서울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전개할 것과 격문을 전국 각처로 발송하여 지방학생들의 시위를 촉발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학생전위동맹은 정종근의 주도하에 학생 동원 및 격문 살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격문 작성은 김태래가 맡았고 김순희·정종근 등 간부진은 세포조직을 상대로 학생시위 계획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김태래가 작성한 격문을 2천여 매 인쇄하여 서울 시내 각 학교를 비롯하여 조선교육협회, 신간회, 천도교종리원,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각 신문사에 발송하였다.

일제 경찰은 격문 제작 및 발송의 주모자를 찾기 위해 광범위한 수색작업에 나서 12월 8일 고학당의 한경석, 중동학교의 김인배·윤영순, 경신학교의 정종근·유축운 등 학생전위동맹과 조선공산청년회 간부들을 검거해 서울 학생시위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자 학생전위동맹은 책임비서 김순희 체제 아래 조직을 정비하여 당초의 계획대로 학생시위를 진행했다. 시위 지도부 대다수가 체포되었지만 이미 학생전위동맹이나 독서회의 조직기반을 통해 서울시내 각 학교에 의거계획이 차질없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지역 학생시위는 12월 5일 경성제이고보를 시작으로 13일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학교 단위로 전개된 학생시위는 9일부터 학교 간의 연합시위로 발전되었다. 13일까지 계속된 대시위와 맹휴투쟁에는 연인원 1만 2천여 명의 서울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제당국이 서둘러 12월 13일 겨울방학을 단행함으로써 점차 시위가 수그러들었다.

서울의 학생시위에서 뿌려진 격문은 대체로 10여 종에 달했는데, 각 격문의 내용은 광주학생들에 대한 호응과 지원, ‘타도 일본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치안유지법 및 기타 악법 즉시 철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획득, 일제의 군사경찰정치·총독정치 반대 등으로 대체로 비슷했다.

1931년 4월 서울 학생시위를 계획 지도하고 불온한 격문을 제작, 배포한 조선학생전위동맹 지도부 총 17명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을 걸어 징역 1년에서 5년까지 선고하였다. 고학당 학생인 정관진, 한경석, 이학종에게 중형인 징역 4, 5년이 언도되었음을 볼 때 고학당 출신자들의 역할이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선고 내용을 다음과 같다(밑줄 친 이들이 고학당 출신).

징역 5년: 정관진 한경석 김순희
징역 4년: 이학종
징역 3년: 정종근
징역 2년: 조성택 정윤필 이능종 차재정 황대용 곽양훈 김인배 유축운 윤영순
징역 1년: 이원봉 김종원(5년간 집행유예)

3. 경성고학당 출신 주요 인물의 활동

조선학생전위동맹 창설자

1930년 2월 체포 당시의 정관진. ⓒ국사편찬위원회

정관진(鄭寬鎭, 1902~1931)은 황해도 연백 태생으로 서울 재동보통학교와 어의동 공립공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고학당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 경성노동청년회 위원으로 선임되고 고려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며 활동 폭을 넓혔다. 고학당 4학년이던 1927년 초에는 이학종(李學鍾), 김태래(金泰來) 등과 함께 조국 독립과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조선학생혁명당을 결성하였고, 조직부 책임을 맡아 동지들을 규합했다. 1928년 3월 고학당 제1회 졸업식에서 이학종과 함께 우등생으로 표창받았다. 고학당 졸업 후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에서 청년운동부를 담당했으며, 경성노동총동맹과 서울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3월에는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허정숙(許貞淑) 등과 함께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된 공산당 재건을 위해 진력했다. 1930년 1월, 지병인 결핵으로 병원에 입원 중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93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며, 고등법원까지 상고했으나 최종 기각되었다. 투옥 중 폐병이 악화되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1년 10월 19일 2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30년 전후 서울의 대규모 학생시위를 계획하고 조직해

1930. 12. 17. 서대문형무소에서 한경석 ⓒ국사편찬위원회

한경석(韓慶錫, 1909~1951)은 충남 아산 태생으로 1927년 10월, 고학당 학생인 정관진의 권유로 비밀결사인 조선학생혁명당에 가입하며 학생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1929년 3월, 조직이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편되자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한경석은 관훈동 자택을 거점으로 수차례 중앙부원회를 개최하며 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하였다. 즉 각급 학교 내에 세포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투쟁 표어를 결정하고, 각 학교에서 새롭게 규합한 동지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 조직을 공고히 다졌다.

1929년 11월, 전남 광주에서 학생의거가 발발하자 이를 서울지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제5회 중앙부원회에서 서울 내 중등 이상의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한 격문 작성과 인쇄 및 살포를 결의하였고, 12월에는 실제 동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1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특히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던 도중에도 “조선민족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했고, 이로 인해 보안법 위반이 추가되어 총 5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근우회, 신간회, 적색노동조합 등 다방면에서 맹활약한 여성 활동가

1930. 12. 12.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원봉 ⓒ국사편찬위원회

경북 김천 출신인 이원봉(李元鳳·李元奉)은 1927년 서울로 상경하여 고학당에 입학한 후, 학생 및 여성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고학당 재학 시절부터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 집행위원장, 근우회 경동지회 상무집행위원, 신간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여성과 학생들의 권익 보호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앞장섰다.

1930년 3월,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된 조선학생전위동맹의 후계 결사를 조직하기 위해 서울 내 여자학교의 동지 규합 책임을 맡았다. 재조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1931년 4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후 1932년 6월 출옥하였다. 출옥 직후인 1932년 12월, 이재유(李載裕) 등과 함께 공산주의 결사 조직을 위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로 인해 1933년 1월 다시 검거되었으나, 같은 해 3월 조선반제동맹 사건과 관련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34년부터는 오리엔탈 고무공장 등에 직공으로 취업하여 현장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순금 등과 협력하여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메이데이 격문을 배포하거나 여공들의 동맹 파업을 모의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1935년 12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한번 옥고를 치른 후 1937년 6월 22일 만기 출옥하였다.

1930년대 노동계급 조직화에 뛰어났던 경성 트로이카의 1인

김삼룡(金三龍, 1910~1950.6.26)은 충북 충주군 엄정면에서 소작인의 6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용산리 공립보통학교(엄정초등학교의 전신)를 늦게 들어가 1928년에 19살 나이로 졸업하고 곧바로 상경해 고학당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배재고 김병선과 독서회를 조직·운영하다가 1930년 11월 치안유지법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구속돼 1년 2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이던 1931년 여름, 채석장에 나갔다가 훗날 경성콤그룹의 주역이 되는 이재유를 만났다.

1932년 2월 김삼룡은 만기 출소해 잠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귀향 4개월 뒤 인천으로 옮겨 부두 하역인부로 취업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33년 2월에는 이재유를 방문해 노동운동의 방향을 협의했다. 김삼룡은 인천, 이재유는 서울, 이관술은 영등포와 학생조직을 맡아 트로이카 방식으로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4년 1월 인천 적색운수노조 관련 정보가 노출되고 관련자들이 체포되었고 잇달아 그도 은신중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이재유·김삼룡 등의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경성그룹’ 구성원은 5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1937년 출옥한 후 다시 고향에 내려온 김삼룡은 이관술 등과 함께 조직 재건에 나섰고 박헌영을 책임자로 추대했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대창직물·경성전지·경성방직 등의 노동조합에 파고들어 민족해방과 계급투쟁 의식을 고양하는 교양사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조직화도 2년 만에 와해되었다. 1940년 12월 김삼룡을 비롯한 대다수의 조직원이 체포, 구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 조직국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남로당 중앙정치위원, 남로당 최고책임자를 역임하였고 1950년 3월 검거되어 6·25 직후 사형당했다.

고학당에서 계급의식에 눈뜨고 향리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

이종(李鍾, 1911~2011)은 1911년 충북 영동군에서 태어났으며, 11살 때 계산학원에서 신학문을 배우다가 조혼(早婚)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한문을 수학했다. 1930년 4월 상경해서 고학당에 입학해 1931년 7월 고학당 해산 때까지 기초 과목과 사회주의 이론을 익혔다. 일제가 고학당 폐교를 강요했을 때 상급생과 하급생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자는 상급생의 설득으로 결국 자진 폐교하게 되었다며 해산 당시의 경위를 회고했다. 고학당 해산 후 낙향하여 1931~1936년 사이 영동군 봉현리에서 동화학원을 세우고 야간부 교사로 활동하다가 1936년 사회주의 서적을 소지했다는 이유으로 체포되어 1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괴산의 청흥광산에서 줄곧 채광 감독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청주시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에 월북했고 6·25전쟁 후 정치공작원으로 남하했다. 1959년 간첩미수죄로 체포되어 10년간 수감되었다. 출소 후 1975년까지 날품팔이,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75년 사회보호법에 의해 재구금되었고 건강 악화로 1988년에 출소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는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생활했다. 1995년과 1997년 각각 시집 『독방』, 『독방2』를 펴냈다. 2000년 8월 김대중 정부 시절, 비전향 장기수 63명에 포함되어 북으로 올라갔다.

[참고문헌]
「폐쇄된 프로학교 고학당 고투 10년사 1~6」, 『조선일보』, 1931.7.14~19.
남신동, 「최초 사회주의 학교의 등장: 경성고학당(1923~1931)」, 『식민지 교육연구의 다변화』, 교육과학사, 2011
이종, 「독방의 시인 이종」, 『0.75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 도서출판 창, 2000
장석흥, 「조선학생전위동맹의 조직과 활동」, 『한국학논총 제22집』, 국민대학교, 2000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공훈록』 각년판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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