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주요기사

2010년 2월 24일 453

<일제의 ‘3.1운동’ 탄압과 조선민중의 분노ㆍ기개>(연합뉴스, 10.02.24)

2010년 2월 24일 324

<친일재산 환수에 후손들 반발…법정공방 지속>(연합뉴스, 10.02.24)

친일반민족행위 언론인 1명 포함-미디어오늘(07.03.22)

2007년 3월 22일 361

친일반민족행위 언론인 1명 포함  1920∼30년대 시사평론 주필 지낸 김환씨  대통령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지난 1919년부터 1937년 사이 친일행위를 했던 중추원 참의, 법조인, 언론인 등 83명을 조사대상자로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공개된 조사대상자 중 언론인은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기자출신으로 시사평론 주필을 지낸 김환 씨 1명만이 포함됐다.이밖에도 학살사건 당시 발안주재소 순사보로 근무했던 조희창씨,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했다가 이후 귀국해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신응희씨 등이 조사대상자로 선정됐다.한편, 반민규명위는 올해 하반기에  2기(1919∼193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선정결과를 추가발표할 계획이며, 언론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1937년 이후 행위자에 대해서는 내년에 조사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민족대표 박희도 `소신친일파’ 분류”-연합뉴스(07.03.20)

2007년 3월 22일 713

“민족대표 박희도 `소신친일파’ 분류”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20일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으나 친일파로 변절한 박희도는 `민족을 위한 친일을 주장한 소신친일파’로 평가되는 이광수, 윤치호와 일맥 상통한다”고 주장했다.허 교수는 이날 민족대표33인유족회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5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에서 “박희도가 193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개인적 결함에서 친일의 이유를 찾는데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는 “1948년 민족정경연구소가 작성한 `친일파군상’이란 책을 보면 박희도는 일본의 패전은 예상 못 하고 친일을 통해 조선민족의 복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며 “신화화된 `민족’이나 `민중’의 이름으로 박희도를 심판할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친일’의 논리 구조를 파헤치고 공과를 균형있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조규태 한성대 교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ㆍ홍기조ㆍ임예환,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김병조ㆍ정춘수의 일생과 애국 활동을 재조명했다.

“안중근 드라마, KBS가 거부했다?” 시끌

2010년 2월 23일 294

“안중근 드라마, KBS가 거부했다?” 시끌(스타뉴스, 10.02.23)

[길을찾아서] 독립운동가 인정받지 못한 임정고문 동농

2010년 2월 23일 419

[길을찾아서] 독립운동가 인정받지 못한 임정고문 동농(한겨레신문, 10.02.22)

허허,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느냐-한겨레21(07.03.14)

2007년 3월 22일 498

허허,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느냐 유학자들이 친일로 기울 때 독립운동하다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아나키스트들과 의거를 일으키고 해방 뒤엔 이승만 정권에 맞서 싸우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국망(國亡)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879년 음력 7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서 유림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대유(大儒)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뒤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중추원에 보냈다.

이만열 전 국편위원장, “역사에 각인될 일 하지 말아야”

2007년 3월 22일 726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 글은 2007년 3월 9일 새문안교회(목사 이수영)에서  ‘한국교회와 나라사랑’이라는  주제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주최한 월례회에서 이만열 교수(초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전 국사편찬위원장)가 발표한 것으로, 전문 게재를 허락해준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한국 기독교인의 나라사랑 전통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스로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나라를 사랑했다. 그들의 나라사랑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했고 국권을 수호하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나라사랑의 본질은 같았지만 나라사랑의 방식과 표현은 시대마다 달랐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사명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을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시대적인 과제와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그 과제란, 수용당시에는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건설해야 하는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해방 초기의 식민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민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구성원으로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다. 아래에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한말 사회개혁 운동한말

친일, 득도… 종정 22명 일대기 담아

2010년 2월 23일 399

친일, 득도… 종정 22명 일대기 담아(부산일보, 10.02.20)

김장훈 “美 타임스퀘어 독도광고, 대박예감”

2010년 2월 23일 425

김장훈 “美 타임스퀘어 독도광고, 대박예감”(이데일리, 10.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