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인의 나라사랑 전통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스로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나라를 사랑했다. 그들의 나라사랑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했고 국권을 수호하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나라사랑의 본질은 같았지만 나라사랑의 방식과 표현은 시대마다 달랐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사명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을 그 시대가 안고 있는 시대적인 과제와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그 과제란, 수용당시에는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 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건설해야 하는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해방 초기의 식민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 민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구성원으로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다.
아래에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한말 사회개혁 운동
한말 봉건사회의 모순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들은 봉건사회의 실정과 모순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매관매직으로 인해 인사상의 난맥과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철종조에 들어서는 임술년(1862) 한 해 동안에 37건의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권위를 재건하고자 일종의 개혁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왕비족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어느 사회에나 한파당의 전횡이 있는 곳에 독재나 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독립신문의 기사다.
“혁파하라신 잡세를 여전히 무는 것은 관장들의 탐학하는 까닭이요, 돈 많은 부자들을 무단히 불효부제(不孝不悌)한다고 잡아가두는 것은 그 부자가 다른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모은 것이 죄가 됨이요 한 동리 사람은 아무가 불효부제인줄 모르되 먼 데 있는 관찰사와 군수들이 먼저 아는 것은 그 관원들이 다른 탁이한 문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야탁(晝思夜度)이 다만 돈 먹을 생각뿐인고로 동녹슬밝은 눈이 먼 데 있는 돈구멍을 능히 밝게 봄이라.”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의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는 영향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서울의 승동교회에서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이 장로로 되었고, 그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이 되어 한 때는 모교에서 가르치기까지 했다. 기독교는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동시에 직업관도 바뀌어졌고, 봉사와 희생을 기독교적 실천덕목으로 강조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의 교훈은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이 되었고 이를 교훈 받은 자들이 섬겼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개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의 콜레라 퇴치를 위한 헌신 봉사는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물론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한말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능력을 배양해 갔다. 기독교인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항거는, 오로지 복종만 강요당해 온 백성들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관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기독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더러 생겨나게 되었다. 관장의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의 말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가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자고 했는데, 황성신문이 백성들이 외국교에 떼지어 들어가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에 고통받아 그 화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한말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전통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한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지방 수령 중에는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투옥시키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들의 항거 때문에 지방수령으로 발령받은 일부 양반들은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항일 국권수호 운동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반외세 국가자주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양자는 표리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반봉건운동에 나서게 되는 때가 1890년대 후반인데 바로 그 무렵부터 기독교인들의 국가자주운동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1896년경부터 우선 왕의 탄신일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충군애국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참석하여 민권신장을 통한 국가자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독립협회 운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도부(윤치호 서재필)를 비롯하여 중간지도층(남궁억․이상재는 아직 기독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뒷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 밖에 주시경 이승만 등)과 대중동원층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 만민공동회에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연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노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고 일본의 배타적인 한국간섭이 노골화되어가자 기독교인들의 반외세 국가자주운동은 거의 항일운동으로 집약되었다. 한국교회의 항일운동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기도회 등에서 나타났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하자 1905년 9월에 모인 제 5회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해 11월 감사절 익일부터 7일간 전국교회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을사조약이 늑약된 후 정순만 전덕기 등이 그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상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연일 수천명이 모였고, 순종 황제 서순(西巡) 때에도 환영예식을 거행한 후 교당에 회집해서 ‘나라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이 때 평양 교회 김 장로의 증언에는 “교중에서 왕왕히 나라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라 위한 기도회’의 전통은 그 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전후해서는 새벽기도회가 점차 활발하게 전개되어 뒤에 전국화하게 되었다.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懿法靑年會)는 상소운동을 벌였다. 진남포 교회 엡웟청년회의 총무였던 김구도 이 철폐운동에 참가했다. 을사늑약 후 기독교인인 최재학 이시영 등은 평양에서 올라와 조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하다가 70여일간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또 예수교인 김하원 이기범 김홍식 차병수 등도 ‘이천만동포에게 경고하는 글’을 뿌리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격렬한 연설을 하다가, 일본 현병들과 충돌,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기독교인 우국지사 중에서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영효 귀국환영 및 궁내부장관 취임 축연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한 이등박문이 나오지 않자 그를 제거하려고 준비했던 정재홍이 목숨을 끊었는가 하면, 고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대한문 앞에서 자결한 예수교인 홍태순 등의 예도 있다.
한말 기독교인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항일운동을 들 수 있는데, ‘시장세반대투쟁’과 ‘납세거부투쟁’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잘알려진 내용이다. 선교사와 그 조사들은 “예수교도들에게는 특권상 폭자(暴者)의 학대와 압박들을 면하고 문명적인 교의에 기초하여 생명 재산 등에 관한 권리를 얻었기 때문에 전제적 정치의 법령과 인도(人道)에 반하는 금제(禁制) 및 가세(苛稅)에는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미 통감부 지배하의 한국정부에 대한 조세저항까지 정당화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폭력적인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정재홍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나, 안중근과 뜻을 같이했던 우연준이 기독교도였다는 사실,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이 기독신자였다는 데서 우선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재명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이완용과 이용구를 처단하려 한 경우를 보면, 이재명 자신이 기독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 행동대원 중에는 이학필이라는 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기독신자였다. 이것은 뒷날 나타나고 있는 의열투쟁의 형태와 비슷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이 1920년대에 적극화된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한말 기독교인들의 의열투쟁은 매우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한말의 이 같은 기독교인의 의열투쟁은 일제 강점기에는 강우규 김상옥 편강열 같은 기독신자들의 의열투쟁으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한말 이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반침략적인 항일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일찍부터 애국교육을 시켰던 것이 그 중요한 요인이라고생각된다. 이 점은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일제의 침략적 만행을 폭로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서술했던 매켄지(F.A.Mckenzie)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아크 햄프던 및 조오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絶滅)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한말 항일운동의 큰 두 흐름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인들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한말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개별적 비조직적인 의열투쟁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만, 조직적인 의병투쟁에서는 괄목할 만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의병의 지휘부에 기독교인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과 관련, 구연영 구정서 부자와 우동선 등이 기독교인으로서 의병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기독교는 의병운동에 소극적이었다.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에는 3 1운동 같은 거족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 후에 항일민족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서는 임시정부운동과 외교운동, 무장투쟁과 공산(사회)주의운동, 국내의 실력양성운동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항일독립운동상의 여러 흐름과 세력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갖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하의 기독교인이 관여한 민족운동은 3.1운동에서 그 역량을 발휘한 이래, 더러 준비론 혹은 개량주의로 흐르는 부류가 없진 않지만, 임시정부운동과 외교투쟁, 무장투쟁과 공산주의운동, 무실역행운동과 절제운동 농촌운동 사회운동 독립운동자금 지원 및 기도회운동과 신사참배반대투쟁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족운동으로서의 신사참배반대투쟁에는 기독교인만이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가 남긴 민족운동이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주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들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적인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 민족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이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니고 그들의 민족운동이 기독교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기독교계의 의사표시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일제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체 한국인의 극소수라고 하여 한국에 독립운동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보이는 기독교 이념과의 연관성 문제다.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일반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의식과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기가 힘들지만 전혀 무시할 수 없다. 가령 3 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관련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3 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보며 기도하면서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사실 등은 이 점을 어렴풋이 나타내 준다. 또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기독교적인 이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기독교인과 개량주의와의 관련성 문제와 기독교 민족운동의 투쟁의 강도문제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굴절한 인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부터 보여준 타계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갖는 화해적 성격이 타협적인 것으로 비친 데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타협과 굴절이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느냐고 변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의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을 타협일변도로 치부할 수 없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식민잔재 청산과 민주화 운동
해방 후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과제의 하나는 부일협력자를 포함한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한 정의로운 새 질서의 확립보다는 일제로부터 떠안은 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있는 관료와 무조건 충성할 수 있는 경찰 등의 권력의 도구가 필요했다. 해방 후 혼란상태는 일련의 ‘정신도 줏대도 없는’ 기능인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적어도 지배층 상호간에는 일제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북쪽에서 부일협력자를 신속하게 처리한 것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으로 각처에서 분란이 야기되자 오히려 부일협력자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분단상황이 결국 친일파를 온존시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 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 신장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지적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부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했고 새 질서를 바탕으로한 조국을 건설하는 일에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한 결과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분열을 가져왔다. 일제강점기에 비해서 해방직후 기독교계는 민족운동다운 민족운동을 펼치지 못했다. 다만 통일국가 건설운동에서 김구 김규식 같은 평신도 지도자와 몇몇 목회자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해방 후 정치 관료 법조 지식인 사회에서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하고 이들을 온존시킨 결과 사회전반에 정의감이 상실되고 역사허무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으며 기회주의자와 보신주의자를 양산하게되어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교회대로 교권주의적 권력지향적 세력이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일제청산을 주장하는 개혁적인 세력은 주류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기독교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은 1960년 4.19와 그 이듬해 5.16군사 쿠테타를 계기로 해서 자기반성이 일어나면서부터다. 박정희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립이 뚜렷해진 것은 1965년 일본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렇다 할 비판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강요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 기독교계는 이 때 분연히 일어나 굴욕외교에 항거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기독교계의 비판은 1964년 2월에서 시작, 1965년 6월 22일 조인을 앞둔 시기에는 영락교회의 연합기도회로 발전했으며, 이 열기는 7월까지도 계속되면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금식기도회로 모여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합동측의 승동교회와 평안교회 등이 움직인 것을 보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었다.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는 것은 1968년 박정희의 삼선개헌이 시도되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에는 권력에 대한 대응에서 견해차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김재준 박형규 함석헌 등 진보적 인사들이 ‘3선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 동 8월 15일에는 반대성명서를 냈다.그러나 그 해 9월 2일에는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측 인사 242명이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 함석헌 등의 성명서가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고, 그 사흘 뒤 9월 5일에는 앞서의 242명에 포함된 박형룡 김준곤 김윤찬 김장환 조용기 등이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명의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발표하고 3선개헌을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앞서 그들 자신이 주장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과도 상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계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서로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계의 인권․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유신정권기’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극단적인 인권탄압과 반민주적인 행태가 자행되고 있었다. 서슬퍼런 유신정권 아래서 누구도 인권과 민주화를 거론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를 박차고 나온 것이 기독교계였다. 이 때 한국 기독교회는 1973년 4월 22일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을 필두로 개헌청원운동, 민청학련사건, 오글 선교사의 추방, 3.1민주구국선언(1976), 도시산업선교 활동 및 기독자교수해직사건(1977) 등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 무렵 민주화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민중신학이었고 민중신학은 인권 민주화운동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민중신학은 또한 해방신학 등 일련의 정치신학과도 맥락을 닫고 있었다.
한국기독교계의 인권 민주화운동은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한국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비판세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군사정권 하에서 기독교계의 그런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희망이었고,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공감대와 지원세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인권 민주화운동이 갖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한국 기독교계가 이 문제로 말미암아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분열되었고 이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이나 신앙적인 고백을 조율하지 못하고 사회문제가 잇슈화될 때마다 거의 협력하지 못했다는 것, 더러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노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계급적 성향이나 지역성에서 편가르기를 노골화하게 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운동이 예언자적 순수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했던 것은 과거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사 중 그 뒤 소위 민주정권에 가담하여 정치적 중립성을 오류를 범한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인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기독교계는 이를 저해하는 세력의 논리가 ‘안보’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 안보논리는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 배경에는 바로 민족분단이라는 절벽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인권 민주화를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 막고 있는 분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인권 민주화운동과 표리의 관계를 갖고 전개된 한국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은 1960-70년대의 기독교 운동의 축적된 경험과 그 동안의 자기한계를 극복하려는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얻은 값진 결실이었다.
민족통일 운동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판하고 자극하며 더러는 선도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은, 군사통치 초기에는 인권, 민주화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통일운동에도 역점을 두게 되었다. 기독교 통일운동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1972년 ‘7 4남북공동성명’의 발표다. 이 때까지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기독교계는 그 뒤 유신체제의 정착으로 남북대화가 중단될 때까지 통일논의에 그런대로 적극성을 보였다.
통일문제는 종래 정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계는 통일문제를 민간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1974년 초,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약 3천여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린 후 가두데모를 감행하였다. 통일문제로 데모를 감행한 것이다. 1976년 3월 1일에는 ‘명동사건’에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선언서에서는 민족통일의 긴급성을 주장했고, 1978년 10월 17일에는 함석헌, 문익환, 윤보선, 이문영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재야인사 402명이 반독재 민주구국 투쟁과 민족염원인 통일을 지향하는 내용의 ‘10 17민주국민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기독교인들의 통일운동에 하나의 계기를 만든 것이 해외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이 북한동포를 만나 조국의 통일을 논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모임은 1차 1981년 11월 3일부터 시작, 1991년 1월 30일-2월 3일의 프랑크푸르트 회의까지 10차나 회합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대화는 됫날 남북 기독자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한편 한국 기독교회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한 것은, 1981년 6월 8일-10일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이란 주제와 ‘죄책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부제를 달고 <제4차 한 독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고. 이 협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26일 산하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 해 9월 16일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84년에는 ‘제3차 한 북미교회협의회’가 열려 미국이 한국을 분단시킨 나라라는 것과, 때문에 미국교회는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남겼다.
이런 국제적인 모임을 배경으로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의 토잔소(東山莊)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주관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가 모여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 – 도잔소협의회의 보고와 건의안’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화해의 복음의 구체적 실천의 결과요 목표라는 점”과 “평화통일은 남한 교회만의 일방적 선교과제가 아니고 남북한 교회 쌍방의 공동과제라는 점”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단순히 남북한만이 아닌 세계 교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점” 등을 천명했다. 이 같은 결의로 말미암아 토잔소선언은 한국 기독교 통일운동사에서 뿐 만 아니라 한민족 통일운동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교회는 1986년부터 2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스위스 글리온에서 만나게 되었다. 남북교회의 만남은 1986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 신학적 기반’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뒤 제2차 회의는 1988년에, 제 3차 회의는 1990년에 각각 글리온에서 열렸다. 제 3차 회의에서 남북교회는 상호방문, 남북당국간 상호불가침선언 채택 촉구, 사업추진 실무기구 설치등 9개항에 달하는 ‘희년 5개년 공동작업계획’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남북관계의 경색은, 1995년 3월 교토(京都)회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조치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글리온 회의는 1995년을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설정하고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여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통일운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남북교회가 이렇게 만나고 있을 때 남측의 KNCC에서는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KNCC 통일선언’)이 선포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다만 이 선언은 “분단 반세기 동안에 남한 사회에서 민간부문에 의해 제출된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선언으로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혹은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되는가 하면, 이 선언이 제시한 통일원칙은 “지난 60년대 이후 남한교회의 진보세력이 주장해 온 통일의 기본원칙을 수용 집약한 것”이라고도 평가된다. 또한 이 선언은 민족통일운동에 종사해 온 한국교회가 교회내부의 통일론을 수렴하는 한편, “그간의 정부 당국에서 내어놓은 통일정책 선언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민간차원에서 공포한 최초의 통일선언이며” 따라서 이 선언으로 “통일논의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수위와 지향점을 결정케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따라서 이 선언으로 한국 기독교회는 종래 진행시켜 왔던 통일운동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 새롭게 전개시킬 통일운동의 이념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1980년대의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1989년의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을 거쳐 1990년대에는 새롭게 다양한 통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통일운동은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KNCC를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희년운동 흐름과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하고 있는 평화군축운동의 흐름, 남 북 해외의 범민족대회 흐름, 여성운동의 흐름 그리고 90년대 들어 새로운 운동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복음주의(보수주의)권의 흐름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1990년대의 통일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식량난이 겹치게 되어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이 북한돕기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과 북한돕기 운동에서 진보와 보수가 제휴하고 있다는 점,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한반도평화운동이 새로운 호소력을 가지고 자리잡아가고 있다는것 등을 들 수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민족을 개혁하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하나님의나라’는 이 땅에서 이렇게 확장되어 왔다.
한말에 수용된 기독교는 민족사가 전개되는 단계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단계마다 의식한 시대적 사명은 당시의 민족적인 과제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로 의식한 것이었다. 그것은 몇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한말 사회개혁 운동에서 시작하여 항일 국권수호 운동,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 그리고 군사정권 하의 인권 민주화운동을 거쳐 20세기 말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런 편년사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달리 정리될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이 이렇게 전개되었다고 해서, 기독교가 시대를 잘못 읽고 반역사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의 이런 민족운동이 기독교인만의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위의 민족운동 중에서는 기독교(인)가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도 있고 대세에 밀려서 따라간 것도 없지 않다. 한말의 사회개혁 운동과 항일의열투쟁은 선구적 내지는 독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일제 강점기의 전반적인 항일독립운동은 3 1운동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전개된 인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은 그 선진성과 적극성이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가 인간과 사회를 변화, 개혁시키고 ‘하나님의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그가 처한 민족과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그런 단계적인 소명을 의식하면서 자체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나라사항 운동에 노력해 왔다. 앞으로도 기독교는 자신의 영적 영역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실천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부과된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원고는 『한국기독교와 역사』제 1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2)에 발표된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개념화를 위한 시론>을 축약한 글이다. – 이만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