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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

2022년 12월 16일 946

[초점]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기념하기 위한 ‘약산 김원봉과 함께’가 10월 26일 우리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발기인대회를 연 데 이어 11월 10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 출범했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경과보고,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의 김원봉 선생 약력보고 후 약산의 연설 모습이 담긴 영상이 방영됐다. 이어서 김언호 창립준비위원장의 사회로 ‘약산 김원봉과 함께’ 기념사업회 ‘정관(안) 심의와 의결’, ‘임원·집행부 선임’, ‘사업계획(안) 심의와 의결’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임원·집행부 선임’에서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를 상임대표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공동대표로, 장완익 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감사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을 집행위원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이날 안영민 ‘평화의 길’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총회에는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 함세웅 연구소 이사장, 임헌영 소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약산 김원봉과 함께’는 시민들의 힘과 자발적 참여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앞으로 △김원봉의 독립운동과 사상에 대한 학술연구사업 △김원봉의 독립정신을 구현하는 기획‧홍보사업 △민주사회 건설과 평화통일을 위한 사업 △김원봉 서훈 추진 등 현창사업 등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 첫 사업으로 ‘조선혁명선언’ 발표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역사기행’을 기획하고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연구소가 기획한 “사라지는 목소리들” 강제동원 특별전 열려

2022년 12월 16일 717

[초점] 연구소가 기획한 “사라지는 목소리들” 강제동원 특별전 열려 11월 1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사라지는 목소리들, 석탄과 철에 은폐된 역사 그리고 희생자의 이야기” 특별전이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 외면하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피해자의 목소리로 재구성하였다.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선전하는 일본 근대화의 성공스토리에 은폐된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드러내고, 세계시민이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의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기 위한 자리이다. 개막식은 전시를 주최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심규선 이사장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윤경로 관장의 축사에 이어 사도광산 피해유족 김광선 님이 부친의 강제동원 피해를 더 기록하고 남기지 못한 점이 아쉽다는 소감을 밝혀 이 전시의 소중함과 함께 숙연함을 더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군함도 등 일제의 산업시설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한국인 피해자, 중국인‧연합군 포로, 사도광산 피해자의 증언과 강제동원의 실태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전시되었다. 사도광산강제동원의 역사는 이번 전시로 처음으로 공개되는 내용과 자료들이다. 2부에서는 일본산업유산 등재 논란 속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전하는 이야기와 다른 나라의 ‘부정적 세계유산’ 전시사례를 함께 전시했다. 이번 전시에는 피해자 유족과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강제동원 관련 소장사료들을 출품하였고, 일본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POW연구회,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등의 일본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협조로 모두 190여 점의 사료와 사진자료 등이 전시되었다.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소장유물과 증언영상, 일제 산업유산 관련 사료 이미지 등도 다수출품되었다. 특히 5개의 영상부스에서 소개되는 증언영상은 강제동원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학술심포지엄

2022년 12월 16일 775

[초점]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학술심포지엄 한중수교 30주년과 한중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해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10월 28일(금) 오전 10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학술심포지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강북구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일제 침략기 한중 항일세력의 협력과 공동대응을 시기별, 지역별, 분야별로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기조 발제와 제1부 독립전쟁과 한중연대, 제2부 문화예술로 보는 항일연대,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기조 발제를 맡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이란 제목으로 한중수교 이후 독립운동사 인식의 변화를 개관하고, 일제 침략기 한중 항일세력 상호 간의 연대와 영향을 분석했다. 손염홍 건국대 교수(중국측)는 「중국 공문서를 통해 본 한국광복군 창설과 한중협력」 발표에서 한국광복군 창설과정에서 일어난 교섭과 협력, 갈등을 중국 쪽 사료를 활용해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문미라 충북대 연구교수의 「조선의용대(군)의 항일연극 활동과 한중연대」 논고는 조선의용대(군)의 항일투쟁 방략으로서 연극활동을 조명했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의 한·중 연대투쟁」을 주제로 발표했다.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단재 신채호와 중국인 지우들의 항일문학 활동」을 아나키즘운동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그 문학적 성과를 조명했다.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항일음악에 나타난 한중연대를 「공연활동과 음악을 통한 한중연대」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홍성후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은 「장진광의 연안 항일투쟁과 미술활동」을 통해 남쪽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술가 장진광의 항일운동을 추적했다. 남기웅 아주대 강사는 「상하이안 커넥션 : 조선 영화인과 중국전영인(電影人)의 영화 교류」라는 발표문에서 1920~1930년대

통제와 규율로 가득한 교실

2022년 12월 16일 1082

[소장자료 톺아보기 43] 통제와 규율로 가득한 교실 – 식민지 학교 잿빛 색깔의 단단한 벽으로 지어진 건물. 옥상보다 더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일장기.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공터. 굳게 닫은 철문과 이어진 차가운 울타리. 마치 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풍경.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학교’다. 지식을 습득하고 동무들과 함께 뛰어노는 희망과 설렘의 공간을 왜 이렇게 두렵고 공포스럽게 지었을까?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면서 그들의 교육목표는 ‘내선일체’, ‘황국신민’ 따위의 슬로건을 내걸고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일본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학교 건물도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쉬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곧은 일직선 형태의 복도를 따라 교실이 이어져 배치되었다. 복도 한쪽 끝에 서 있으면 반대쪽 끝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통제기능을 담당하는 교장실과 교무실은 건물의 가장 중간에 배치된다. 교실의 벽면은 완전히 가리지 않는다. 허리 높이까지 벽돌로 쌓아 올리고 복도에서 항시 교실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눈높이 정도는 유리로 된 창으로 만든다. 밀폐된 곳은 학교의 최고 통제권자가 머무르는 교장실밖에 없다. 학교가 복층인 경우는 상층 중앙에 교장실을 배치하여 운동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마치 군대의 막사같이 위압적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교실 내부는 어떠한가. 교실 전면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칠판이 부착되어 있다. 교사가 학생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교단과 교탁이 중앙에 자리 잡는다. 칠판의 중앙 상단에는 일장기, 좌우에는

이육사 시의 실증적 고찰

2022년 11월 3일 1900

서울에서 안동까지의 길은 멀었다.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3시간 넘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이제 대구~안동간의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반시간 넘게 달리면 안동에 도착한다. 시내를 벗어나면 이제 퇴계의 본향답게 고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낙동강과 안동호가 보이고 다시 꼬불꼬불한 길을 산을 끼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원촌마을에 도착한다. 길의 오른편에 ‘청포도 농원’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면 거의 다 온 것이다. 시계를 보았다. 아침 9시에 출발을 하였는데 벌써 3시가 다 되어있다. 이옥비 여사는 많이도 기다렸을 것이다. 여사는 나에게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1927년에 광저우에 갔던 사람은 이육사가 아닌 내무부장관을 지낸 이호의 형, 무역협회장과 고려대학교의 이사장을 지낸 ‘목당 이활’ 임을 확인하여 주었다. 그는 광저우에 가서기남(曁南)대학을 나오고 다시 일본과 영국에 유학, 와세다(早稻田)대학과 런던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단정하고 깨끗하게 일생을 살다간 사람, 나는 이육사를 생각하면 글과 생각, 행동이 일치하는 시인이자 지사임을 느낀다. 그는 나이 마흔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일제에 열 일곱 번이나 투옥되었었다. 사실 시인의 문학적 성취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는 무관하지는 않으나 시인으로서의 평가는 그 작품에 먼저 두며 역사적 배경은 작품을 쓰게 되는 마이너한 요소로 고려될 것이다. 이육사가 저항시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뜻깊고 서정적인 많은 수의 그의 시들이 단순히 저항시의 대명사로 분류되어 버리고 마는 데서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알다시피 이육사는 이퇴계의 후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44년 북경감옥에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

2022년 11월 3일 1025

[자료소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1) 호담강직(豪膽剛直)으로 일관, 유명한 인천탈옥기(상), 김구(金九)씨편 우리의 지도자 김구 선생을 수반으로 한 대한임시정부의 요인들은 해방의 환호소리가 3천리 금수강산에 차고 넘친 가운데 고국으로 23일 환국하였다. 기미년 만세 전후 피가 뛰는 젊은 혁명가들은 조국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해외와 해내에서 피로 엉킨 투쟁을 오늘까지 거듭해왔다. 처자와 가정과 형제를 버리고 오직 민족해방을 위하여 피를 뿌려 싸워왔다. 잡힌 목이 되면 악착한 극형도 달게 받았고 철창 속에서 쓰라린 고초도 견디고 참았으며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파옥(破獄) 혹은 살상도 감행하였다. 천신만고 역경 속에서 사선(死線)을 헤매기도 하였다. 자기 한몸의 목숨과 고생을 돌보지 않고 민족을 위하여 살고 죽었다. 이 모든 희생과 고통은 오늘의 광명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경과 가시덤불 속에서 청춘을 짓밟고 반생을 바쳐 싸워온 선생의 거대한 발자국에 방울방울 엉킨 혈루(血淚)의 기록을 더듬으려 한다. ◇ ◇ 우리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풍모와 성격을 먼저 말하다 (판독불가) 젊어서부터 기운이 장사이라 금년이 71세인데 (판독불가) 오셨다. 그러나 원래가 건장하기 때문에 지금도 40세 (판독불가) 과묵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반생의 혁명운동의 역사를 볼 때 의(義)를 위하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강파로우며 그 생활은 청렴강직하고 검소함을 위주로 하시었다. 자기 한 몸의 이로움을 위하여서는 아무 생각도 일도 안하는 것으로서 선생의 성격 전부를 대변할 수 있다. 선생은 해주 태생이시다. 극히 빈한한 농가에서 나셨다. 어려서부터 넉넉지

한강리(漢江里)가 느닷없이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둔갑한 까닭

2022년 11월 3일 2562

“청량리동(淸涼里洞), 상왕십리동(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下十里洞), 답십리동(踏十里洞), 염리동(鹽里洞) …….” 언젠가 서울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한 공부도 할 겸 법정동(法定洞) 명단을 쭉 살펴보다가 조금은 이색적인 이름을 지닌 동네 몇 군데를 골라본 적이 있다.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끝자리가 모두 “무슨 무슨 리동”인 경우에 속하는데, 이를 테면, 그냥 ‘청량동’이 아니고 구태여 ‘청량리동’이라고 하여 마을이라는 뜻글자가 두 번씩이나 겹쳐 있다. 그러자니 약간 시골 냄새가 나는 ‘리(里)’라는 이름을 지금껏 그대로 꿰차고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에 관한 흔적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며 훑어보았더니, <조선총독부관보> 193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개정)」의 ‘경성부(京城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리(里)’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동(町洞) 명칭 개정 내역(1936년 4월 1일 시행) 이들 가운데 ‘염리’가 ‘염정(鹽町, 염동)’으로 되지 않고 ‘염리정’으로 바뀐 것은 ‘정동(貞洞)’이 ‘정동정(貞洞町)’이 된 것처럼 세 글자로 맞추는 방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청량리정’이니 ‘왕십리정’이니 ‘답십리정’이니 하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구태여 ‘리(里)’라는 것을 남겨둔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경원선 철도의 개통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청량리정거장’과 ‘왕십리정거장’이라는 이름을 익숙하게 사용하던 상태이다 보니, 짐작컨대 아마도 이런 이유로 ‘청량리’와 ‘왕십리’라는 지명을 그냥 살려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답십리정’의 경우에는 기차역의 소재지와는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1) : 신흥무관학교 교가

2022년 11월 2일 4442

2017년 연구소에서 발간한 노동은 선생님의 유작 <항일음악 330곡집>은 올해로 발간 5주년을 맞았다. <항일음악330곡집>에 다 담지 못했던 항일노래 이야기를 이번 달 <민족사랑>부터 싣는다.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던 시기의 역사적 사실, 관련 사건이나 단체·인물 등에 관한 내용과 함께 노래가 가진 음악적 특징 등을 소개하려 한다. 노동은선생님과 편찬 작업을 함께 했던 이명숙 선임연구원과 강태구 근대음악 연구가가 원고 집필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풍부해진 항일노래를 만나보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첫 주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다. 1911년 6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무려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독립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주요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앞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 부른 노래, 신흥관련 인물들이 학교 폐교 후 만든 노래 등을 <민족사랑> 지면에 소개하겠다. 내용은 본인이 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본 항일노래의 창작·공유·전승」(<역사와 현실> 124, 2022)을 위주로 할 것이며, 곡조에 대한 해설은 강태구 선생님이 맡아 주기로 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는 교가와 두 개의 신흥학우단가가 있으며, 최근에 한 곡을 추가로 발굴 「실락원」)해 총 4개가 되었다. 항일노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작사가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것이듯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들도 창작자 대부분을 알 수 없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전파과정이

어린이까지 예비 전사로 키우는 전시 교육

2022년 11월 3일 1157

침략전쟁의 파고는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다니고 새로운 지식을 배워 한 단계씩 성장해 가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덮쳐버렸다. 일제의 전시체제로 학교 교육은 오로지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을 기르고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목적을 두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9월 ‘천황제’와 전체주의를 합리화하는 「교육칙어」를 식민지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활용하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시행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을 앞세워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령을 통해 소학교의 명칭을 아예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지칭하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교체해 버렸다. 학교는 이러한 전쟁의 광기 속에서 마치 종교집단이 되어 갔다. 학교에 ‘천황’을 위해 기도하는 제단으로 가미다나神棚를 만들고 황국신민서사를 비치하여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애국일, 신사참배일, 메이지절 등 온갖 기념일이 되면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예비 소년전사로 육성하고자 오로지 한 사람, ‘천황’에게 기도하며 싸우러 나갈 것을 교육했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여 조금이라도 일찍 군인이 될 수 있게 제도화하였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의 목표는 강건한 병사양성이었고, 이를 위해 학생의 체력 단련과 군사훈련이 강제되었다. 1944년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전시교육비상조치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과 강제노동을 실시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군사교육을 받게 해 유사시 한반도 내에서 조선 학생들을 최후의 총알받이로 동원하려 했다. 학교가 ‘전쟁’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할 어린이들을 ‘천황’을 위한 ‘예비 전사’로

‘돌모루 동네배움터’ 5개월의 대장정 마쳐

2022년 11월 2일 559

[초점] ‘돌모루 동네배움터’ 5개월의 대장정 마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6월 13일부터 10월 24일까지 16주에 걸쳐 매주 월요일마다 돌모루 동네배움터를 진행하였다. 돌모루 동네배움터는 연구소와 박물관이 주민 참여와 소통을 이끌기 위해 마련한 강좌와 답사이다.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와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 제작사례’, ‘우리 동네 역사 문화 자원 활용하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등 다양한 주제의 행사를 진행했는데 일반 주민들과 후원회원들이 꾸준히 참여해주었다. 1강은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마을역사해설사 양성’으로 강동민, 안미정, 김슬기 연구원의 강의로 박물관 상설전시실의 유물과 기증 자료들을 직접 보면서 진행되었다. 유물 하나하나의 사연 속에 우리 민중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의 본질을 체득하게 한 ‘대한독립쌍륙 체험실습’은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낸 주요한 사례 중 하나였다. 2, 3강은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제작 사례’로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사들이 이끌었다. 최성욱 그라피티 작가, 김은총 위세임 대표(피규어 제작), 강효숙 디자인가안채 대표, 김동우 다큐사진 작가, 노관우 음악교사, 박찬우 일러스트레이터 등이다. 강사들은 구체적이고 상세한 문화콘텐츠 제작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참석자들과 적극 소통하였다. 친일청산과 독립운동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문화콘텐츠의 사례들을 보며 참석자들은 친일청산의 의지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4강 ‘우리 동네 역사 문화 자원 활용하기’는 실내 강의와 답사로 구성되었고,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았다. 답사 코스는 효창원에서 이봉창의사 집터, 옛 국군 보안사 서빙고 분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