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SBS 뉴스, 연구소가 발굴·조사한 일제 잔재 연속 보도
[초점] SBS 뉴스, 연구소가 발굴·조사한 일제 잔재 연속 보도 SBS 뉴스는 8월 25일, 26일 이틀에 걸쳐 ‘전범기업 마크가 교표? 학교에 남은 일본 잔재’, ‘유관순 기념탑도 일제식, 곳곳에 남은 일본 잔재’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의 주요 내용은 전범기업 미쓰이(三井)의 로고를 학교 교표로 사용하고 있는 부천 삼정초등학교 사례를 비롯해 일장기와 욱일기 모양의 교표를 사용하고 있는 학교를 지적하였다. 또한 유관순, 손병희 등 독립운동가 관련 표석은 물론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송덕비, 충혼탑 모양도 일제의 묘비석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라서 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SBS의 보도는 연구소의 자료 제공과 자문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연구소는 2020년 경기도의 의뢰를 받아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수행하면서 경기도 소재 초·중·고등학교 약 2,400개의 교표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과정에서 부천 삼정초등학교 사례를 발견하였다. 또한 이순우 책임연 구원은 <민족사랑> 2021년 11월호에 ‘일제의 잔존 기념물 가운데 유독 사각뿔 모양이 많은 이유는? 사각주(四角柱)에 방추형(方錐形)인 일본군 묘비석 양식의 기원’이라는 글에서 1879년12월 26일에 제정된 일본 해군의 「하사졸묘표촌법(下士卒墓標寸法)의 건(件)」이라는문건이 사각기둥에 사각뿔 형태의 일본군 묘지석 양식의 기원임을 밝힌 바 있다. 방송 이후 연구소 부천지부는 교육청 등 지역의 관련단체들과 함께 부천 삼정초등학교 교표 개정을 위해 움직일 예정이라고 밝혀왔다.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1] 식민통치의 시각적 선전 –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매년 사회 전 분야를 조사하여 <통계연보> 를 발행했다. 통치 주체인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조선에 도로, 전기, 철도 등 근대적 시설이 마련되었고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 등을 실시하여 근대적 등기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숫자로 작성한 통계는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지표인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통계연보> 작성에 그치지 않고 성장지표를 그래프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 통계엽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시정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발행한 시정기념엽서 총 38매 중 7매가 농수산물의 증산과 기반시설 등의 통계를 비교한 근대화 관련 관제엽서로 조선의 산업화를 선전하고 있고, 이와 함께 ‘조선의 통계 朝鮮之統計’를 따로 제작하여 조선의 호구戶口, 무역, 재정, 농업, 광산, 수산, 교통, 교육, 토지의 증가를 그래프로 이미지화하여 발행하였다. 일제는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식민지 정부인 조선총독부가 대량 생산한 엽서는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컸으며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엽서에 새겨진 성장지표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논리였던 근대화 관련 이미지였다. 즉 근대화를 환상이 아닌 실제로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일제
멀쩡했던 교가(校歌)와 교표(校標)가 무더기로 개정된 연유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많은 사람들에게 좀 생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상황에서도 ‘조선어장려시험(朝鮮語獎勵試驗)’이란 것이 한창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관리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조선어 능력시험이 치러졌고 그 성적에 따라 장려수당(獎勵手當)까지 줬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일의 연원을 찾아보니까 무엇보다도 1921년 3월 9일에 제정된 칙령 제34호 「조선총독부 및 그 소속관서 직원의 조선어장려수당에 관한 건(件)」이 눈에 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내지인’ 판임관(判任官) 이하의 직원으로서 조선어(朝鮮語)가 통하는 자에게는 조선총독(朝鮮總督)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분간 월액(月額) 50원(圓) 이내의 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21년 5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 훈령 제28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조선어장려규정」이 정식으로 제정되어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에 속한 ‘내지인’ 판임관, 판임관대우, 고원에 대해 조선어장려시험에 합격하거나 또는 시험위원의 전형(銓衡)을 거쳐 학력(學力)을 인정받은 경우 그 종별등급(種別等級)에 따라 정해준 조선어장려수당(갑종은 4년간, 을종은 2년간)을 지급받도록” 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갑종시험은 “조선어의 통역(通譯)에 차질이 없는 정도”의 수준을 나타내며, 을종시험은 “보통의 조선어를 이해할 정도”의 여부를 측정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조선총독부가 이처럼 조선어능력을 습득할 것을 일본인 관리들에게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특별수당까지 지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매일신보> 1912년 5월 11일자에 수록된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방법(方法)」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었던 것이 눈에 띈다.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政務總監)은 각도청에
한국 경찰은 일제강점기, 독재 시기 민중의 편에 선 경찰 선배들을 사표로 삼아야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8월 16일 오후 1시 30분경 황운하 의원과 함께 3층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이 자리에 방학진 기획실장과 임무성 교육위원이 참석했다. 최근 행안부 내에 경찰국이 신설되어 경찰의 권력 시녀화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연구소 회원인 황운하 의원에게 검경 수사권 조정 등 사회적 현안과 경찰의 역사적 과오 반성 등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해법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 의원님이 2005년도 10월 3일 회원 가입을 해주었어요. 벌써 17년 되었는데 그 당시가 경찰청 수사권 조정팀장이었을 때입니다. 당시 어떤 가입의 동기가 있었을까요? ○ 기억이 생생한데, 2005년에 제가 경찰청 수사권 조정팀장을 했었습니다. 수사권 조정업무라는 것은 크게 보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검사 주도 형사사법 체계, 또는 검찰 주도 형사사법 체계는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입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검사제도와 경찰제도가 들어온 것도 고종 임금 시절 조선의 식민지화를 준비하던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면서 경찰이 식민지배의 도구화가 되고, 검사제도도 일본의 형사소송법 제도를 그대로 모방해서 적용하였는데, 그만 광복 후의 우리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이 돼버렸습니다. 사실 군국주의 시절 일본의 형사사법체계에서는 경찰의 권한도 강했지만, 검찰의 권한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경찰에게 영장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감옥에 넣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소수의 검사가 경찰을 완전히 지휘할 수 있도록 해놨어요. 일왕의 입장에서는 검사만 장악하면 경찰까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강한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는 김동우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후원회원 마당]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는 김동우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남경록 후원회원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뚫어질것 같은 엄청난 빗소리. 왜 하필 민족문제연구소에 강의를 들으러 가는 날에?? 솔직히 5초 정도 망설였다. 갈까말까 하지만 그런 비를 이겨내고 남영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사진작가 김동우 님의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강의가 있는 날이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한 나는 그분이 출연하셨다던 ‘기아자동차 K9 CF’는 물론, ‘유키즈’라는 방송을 본 적도없다. 그래서 생소한 이름의 작가였다.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당시 세계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지구 반대편인 멕시코, 쿠바 등지에 그 후손분들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잘 몰랐었다. 김동우 작가님은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사비를 털어 멕시코, 쿠바, 인도, 중국, 미국, 일본 등에 가서 독립운동과 그 후손들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멕시코에서는 식당을 운영하여 독립운동에 거액을 기부한 김익주 선생, 지금은 엘 메르카도 시장이 되어버린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숭무학교 터, 우리에게 낯선 나라인 쿠바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신 유명한 임천택 선생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응원하셨던 이윤상 선생. 미국에서 만난 안창호 선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막내 아드님 이야기. 유관순 열사의 영어 선생인 프랭크 윌리엄 선생이 한국광복군과 멀고 먼 인도에서 만난 이야기. 중국의 독립군은신처인 동굴에 새겨져 있던 태극기와 4명의 독립군 이름.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악의 축’을 저격한 하얼빈역의 1번 플랫폼 이야기. 일본에서 윤봉길 의사의 흔적을 촬영하기
나의 8·15 회고
3천만이 한결같이 느낀 8·15의 감격은 또한 3천만이 제각기 별다르게 느낀 감격이기도 하다. 수만 리 이역에서 열혈의 전선에서 이날을 맞이한 이도 있으며 지옥의 철창 속에서 징용 일터에서 그 순간을 맞이한 이도 있고 온세상의 행복을 독차지한 듯한 기쁨과 용기와 정열로 맞이한 혁명기도 있는가 하면 눈앞이 캄캄하여 정신을 잃은 민족 반역자도 있다. 이제 세월은 흘러 만 1주년! 무지개 같은 희망도 아침이슬같이 사라져 차디찬 현실에 몸서리치는 사람, 천길만길의 몰락을 각오했었으나 두고 보니 그렇지 않다고 웃음 짓는 친일 반역배. 8·15 돌맞이의 기분도 역시 각인각색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선민족 전체가 가장 양심적이었던 순간이 곧 1년 전 그날이 아니었던가? 성스럽기까지도 하던 8·15 그날의 회고를 오늘에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 <자유신문> 편집자 드디어 옥문은 열리고 혁명동지들과 근로인 위한 새 설계 나의 8 ·15 회고(1) 전평(全評) 허성택(許成澤) 씨 나는 청주에 있는 사상범예방구금소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일제 항복의 방송은 듣지도 못했다. 간수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중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살았구나 했다. 왜적이 항복하되 9월이나 10월경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빨리 항복하리라고는 뜻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8월 17일 새벽 형무소 문앞에 몰려온 청주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와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철창문을 나서던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을 몸으로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은
국외독립운동사진전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 은평순회전 개최
[초점] 국외독립운동사진전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 은평순회전 개최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8월 2일(화)부터 15일(월)까지 2주간 은평 한옥마을 너나들이센터 1층 기획전시실에서 김동우 작가의 국외독립운동 사진전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가 열렸다. 이번 전시는 은평구의 후원으로 총 3회에 걸쳐 은평구에서 열리는 순회전시다. 1차 너나들이센터(8.2~15), 2차 은평한옥마을 갤러리이오 (8.24~ 9.8), 3차 은평문화예술회관 전시실(11.25~12.8)에서 열린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국외독립운동사적지와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인터뷰하며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일을 “뭉우리돌을 찾아서”란 이름의 프로젝트로 진행중이다. ‘뭉우리돌’이란 둥글둥글한 큰 돌을 뜻하는 말이다. ‘백범일지’에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에게 일본 순사는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큰소리를 치자 백범은 이 말을 되받아치면서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동우 작가는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번 <空의 지금-뭉우리돌을 찾아서> 전시는 은평구와 인연이 깊은 규운 윤기섭 선생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강습소 터를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방치되고 있는 비어있는 공간(空)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한편 연구소 8월 7일 ‘회원 초대의 날’ 행사로 서울서부 후원회원들이 방학진 기획실장의 안내로 국외독립운동 사진전을 관람하기도 했다.
77주년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
[초점] 77주년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7월 23일 오후 2시, 서울시의회 로비에서 77주년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식이 열렸다. 이번 기념식은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2년 만에 열린 기념식이다. 연구소에서 주최하고 서울특별시의회, 광복회 화성시지회가 후원하였다.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부민관폭파의거 소개 영상 시청, 애국지사 후손(차영조, 이호헌, 김성진, 김태욱) 소개, 기념사(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축사(윤대성 광복회 화성시지회장), 축하 연주(지휘 유세종), 격려사(윤경로 식민 지역사박물관 관장) 그리고 기념촬영 순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임헌영 소장은 기념사에서 의로운 거사를 기념하는 기념식에 대한 서울시의회의 무관심를 질타하면서 무엇보다 정치인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전하며 또한 “친일파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라고 기념사를 했다. 축하공연으로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 중 하나인 유만수 애국지사의 아들 유세종 지휘자와 성북청소년오케스트라(단장 정경화), 화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단장 최명란)가 협주했다. 처음 만난 두 오케스트라가 유세종 지휘자의 지휘로 독립군가, 핀란디아, 압록강행진곡 세곡을 연달아 연주했고, 참석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과 앵콜을 받았다. 끝으로 윤경로 관장은 매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부민관폭파의거 기념식을 준비하고 개최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관계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 같지만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애국지사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불굴의 의지와 용기다.”라고 마무 리 발언을 했다. 부민관 폭파의거란, 1945년 7월 24일 오후 9시경 경성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에 서 개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2차 가해
[후원회원 마당]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2차 가해 김순흥 광주지부장 한국 외교부가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해 일본기업의 국내 자산을 우리나라 법원이 강제 매각할 경우 ‘외교적 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걱정(?)하면서 해결방안을 찾는다는 구실로 ‘민관협의회’를 구성한 뒤 ‘대위변제’ 방안을 유력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피고기업들은 배상은커녕 사죄도 않고 사실관계조차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가해자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는데 한국정부가 나서서 (일본의 참여 없이) 우리국민들의 기부금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돈’을 주고 문제를 덮으려고 한다. 이미 외교적 마찰을 넘어 경제전쟁중인데 생뚱맞은 소리다. 이 건을 빌미로 아베정권은 2019년 무역전쟁을 시작했고 우리는 그 전쟁을 이겨내고 있다. 그런데, 이 정권이 굽히고 들어가니 일본정부는 한술 더 뜬다. 만약에 한국에 있는 일본기업 자산의 일부라도 손실이 있게 되면 2019년 수출규제와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보복조치를 취하겠다는 태도다. 뒤집으면, 일본정부가 속으로는 그만큼 다급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상표권과 특허권의 금액을 떠나 강제매각이라는 ‘법적 단죄의 현실화’로 입게 될 일본정부나 기업의 명예실추는 물론이고 일본정부가 그토록 부정해온 ‘역사적 죄악에 대한 정의의 평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기 때문이다.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마라 정부의 민관협의회에 미쓰비시 근로정신대소송 지원단체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소송 대리인단은 참가하지 않는다. 시민모임은 지난 7월 13일 강제동원 피해당사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의 의견을 들은 뒤, 14일 소송 대리인단과 긴급 좌담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피해자측에서는 정부의 입장이 ‘법원의 배상판결을 이행하자는 것이 아니라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소장자료 톺아보기 40] 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 대용식 빵 배급 홍보물 카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혹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오히려 빵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가정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밥’이라고 하면 주로 쌀과 국, 그리고 밑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연상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밥이 보약’이라는 말에서 보듯 쌀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약으로 여겨 제때 밥을 챙겨 먹는 생활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단지에 넣어 신神으로 모시기도 했고, 심지어 흩뿌려 점卜을 보기도 하는 등 쌀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귀한 식량이었다. 쌀이 이토록 중요한 식량이었지만, 봉건시대에는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은데다가 지배 계급의 수탈로 인하여 일반 백성들이 날마다 먹기는 힘든 양곡이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차지하였고, 그 땅을 일본인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했다.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전락한 조선은 수확량에 비해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만주, 북중국 등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의 식량수탈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식민지조선의 백성에게 ‘쌀밥’은 그야말로 먹기 힘든 ‘귀한 식량’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과 함께 공출에 심혈을 기울이다 전황이 악화되자, 양곡뿐만 아니라 주요 식료품의 수급도 원활하지 못해 소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