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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파 의거’ 70년 만에 재현
민족문제硏 24일 의거 현장서 무료공연 일제 패망 직전 민족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부민관(府民館) 폭파 의거’가 연극을 통해 70년 만에 재현된다. ▲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인 고 조문기(가운데) 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강윤국(왼쪽) 선생, 유만수 선생의 청년 시절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1935년 건립된 부민관은 1954년 국회의사당으로 바뀌었다가 1991년부터 현재의 서울시의회 건물이 됐다. 사진은 1950년대 국회의사당 때의 모습.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이 거사는 1945년 7월 24일 3명의 독립투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친일파와 일본 고위관료들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는 24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세종대로의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부민관 폭파 의거를 기념하는 무료 연극공연을 한다고 12일 밝혔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은 당시 ‘부민관’이란 이름의 극장이었다. 조문기·유만수·강윤국 등 독립투사들은 민족반역자 박춘금이 조직한 친일단체 ‘대의당’이 부민관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皇民化)를 앞세운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열자 이를 막기 위해 현장에서 폭탄 2개를 투척했다. 주인공은 젊은 연극배우들이 연기하고 세 독립투사의 후손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유만수 열사의 차남 유세종(51·성북청소년오케스트라 지휘자)씨와 조문기 열사의 외손녀 김슬샘씨가 연극에 앞서 각각 클라리넷과 기타 연주를 한다. 유씨는 “의거가 이뤄지고 20여일 만에 광복이 도래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안중근 의사를 다룬 뮤지컬 ‘영웅’처럼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연극 또는 뮤지컬의 소재로 많이 발굴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일제강점기 때 서울지역 안에서 일어난 의거 중에 현장이
세월호 충북대책위, 동네방네 리본공작소 운영
(아시아뉴스통신=김종혁 기자) 세월호 희생자 추모 및 진실규명 충북범도민대책위원회(이하 세월호 충북대책위)가 ‘세월호 기억과 행동’ 7월 프로그램으로 ‘동네방네 리본공작소’를 운영한다. 동네방네 리본공작소 프로그램은 13일부터 오는 17일까지 세월호의 진실규명에 함께하는 단체들이 릴레이로 세월호 리본을 직접 제작해 만든 세월호 리본을 청주 곳곳에 있는 우리동네 리본가게를 통해서 시민에게 배포한다. 먼저 13일에는 청주대학교 총학생회 주관으로 본관에서, 14일은 청주청년회 주관으로 공단입구 작은도서관 청춘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시내 하늘북에서,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용암동 초롱이네 도서관에서 각각 진행한다. 이어 오는 15일에는 충북민주노동연대가 공단입구 사무실에서, 16일에는 청주KYC 산남동 사무실에서, 청주노동인권센터는 분평4거리 사무실에서 진행하며 17일에는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주최로 충북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열린다. 세월호 충북대책위 관계자는 “모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동시에 피해자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요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며 “이를 위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제정을 요구했고 더 이상 세월호 참사와 같은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안전한 사회가 될수 있도록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고 밝혔다. <2015-07-13> 아시아뉴스통신 ☞기사원문: 세월호 충북대책위, 동네방네 리본공작소 운영
[재판으로 본 현대사](40)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上)
ㆍ‘사형’ 받아야 할 국사범 전두환·노태우, 검찰 “반란죄 성립하지만…” 기소유예 ■ ‘12·12사태’에 이은 집권 각본에 따라 이른바 ‘12·12’와 ‘5·18’ 사태는 전두환이 이 나라의 국권을 찬탈하려는 역모 범죄였던가? 본인은 물론 부인했다. 1989년의 세칭 ‘5공 청문회’에서 그는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라고 잡아떼며, 12·12사태도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1980년 초에는 “나는 정치에 소질도 없고, 취미도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적도 있다(이도성, <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사, 1993). 이런 발언은 전에도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았고, 그 뒤의 일련의 거짓말 쇼도 선명한 기시감을 주는 한 편의 연속극이었다.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1979년 10·26 직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과도기의 실세로 급부상한다. 그 여세로 그는 직속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총격전 끝에 체포 연행하는 ‘12·12사태’를 일으킨다. 이로써 군 내부의 실권을 장악한 다음, 현역 군인의 신분이면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해 이 나라 양대 정보수사기관을 한 손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다음으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 등 많은 민주인사들을 내란음모사건으로 연행(5·17) 구속한 데 이어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다. 그는 또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에서 선출된(1979·12·6) 대통령 최규하 정부로 하여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케 하고(1980·5·31) 자신은 그 상임위원장이 되어 사실상 국정의 전권을 독점한다. 대장으로 진급(8·5)하고 나서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군부의 지도력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고, 새 세대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70년만에 그 자리서 연극으로 살아나는 ‘부민관 의거’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서 부민관 폭파 의거 70주년 기념연극 독립운동가 후손들 카메오 출연해 축하공연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은 일본강점기에는 항일투사의 마지막 폭탄 의거 장소인 극장 ‘부민관’이었다. 1945년 7월 24일 이 부민관에서 친일파와 일제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폭탄을 터뜨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부민관 폭파 의거’가 70년만에 연극으로 재연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4일 오후 7시 서울시의회 본관 본회의장에서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 연극 공연을 열 계획이라고 12일 밝혔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친일단체 ‘대의당’이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자 조문기 등 독립투사들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다. 이는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기 전 마지막 의열 투쟁으로 꼽힌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 의거 주인공들의 활약상을 젊은 연극배우들이 연기할 예정이다. 독립투사 후손 중 일부가 연극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연극에 앞서 유만수의 차남 유세종(51)씨와 조문기의 외손녀 김슬샘씨가 직접 각각 클라리넷과 기타를 연주해 행사를 빛낸다. 성북청소년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연주자인 유씨는 “부민관 폭파 의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안중근 의사를 다룬 뮤지컬 ‘영웅’이 있는 것처럼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연극 혹은 뮤지컬의 소재로 많이 발굴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씨는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전에는 교류가 없었는데 이런 자리를 통해 만날 수 있어 기쁘고 반갑다”며 “연극의 의미에 잘 어울리는 곡을 골라 더욱 뜻깊은 자리로 만들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극은
지독한 검열은 ‘먼 곳에의 그리움’을 부추기고…
1960년대 서울 장충단공원에 차려진 길거리 서점에서 어린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 사람들은 더 강렬하게 읽을 것을 원했다. 사진작가 한영수 작품집 <꿈결 같은 시절>에서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⑥ 독재정권시대 번역서 열기 ■ 1960년대 중후반의 독서문화 1964~6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로 정치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이 졸속적인 한-일 회담을 추진하자 학생·시민이 대규모 저항에 나섰다. 지금껏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독도나 위안부 문제 등에 관한 빌미가 대부분 이때 생겼다. 그러나 경제영역에서는 좀 달랐다. 경제개발 정책이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파급 효과는 출판계에도 닥쳤다. <출판연감> 1966년본은 “1965년은 한국 출판사상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한 해 발간된 책의 종수로 보면 그해의 실적은 해방기보다 9배, 그리고 전년에 비해 무려 2배로 신장했다. <출판연감>의 편자는 “해방 후 20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기획에서 장정, 그리고 제책에 이르기까지 장족의 발전”이 성취됐다고 환호했다. 거시적으로는 경제성장과 인구팽창, 독자층의 성장이 모두 함께 가던 한국 출판자본주의의 호시절이 본격화된 초입이었다. <주간한국>(1964) <창작과 비평>(1966) <선데이서울>(1968)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잡지가 성공하고, 삼성이 중앙일보사를 만들어 출판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성장하던 독자층의 요구는 단지 국산 출판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한국 현대문학과 독서문화는 항상 태평양 연안이나 유라시아 대륙의 출판 강국에서 나온 책들을 번역하거나 번안하거나, 또는 때로 몰래 수입하거나
“군포시, 친일작가 이무영 친일행적비 건립하라”
이무영친일행적비추진위 “군포에 있는 <이무영작품비>, 부끄럽다” ▲ 군포 능안공원에 있는 <이무영 작품비>. 1999뇬 12월, 군포시는 친일작가 이무영을 기리기 위해 작품비를 건립했다. ⓒ 유혜준 군포시가 건립한 <이무영 작품비>가 논란이 되고 있다. 군포시는 지난 1999년 12월, 능안공원에 친일 소설가 이무영을 기리기 위해 <이무영작품비>를 건립했다. 당시 군포시장은 김윤주 시장이었다. 군포시가 <이무영작품비>를 건립한 것은 그가 1939년부터 1950년까지 군포에서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무영은 1935년, 군포를 배경으로 한 <군포장 깍두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무영이 일제강점기에 문학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무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009년에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면서 그의 적나라한 친일행적이 공개됐다. 이무영은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민족진영 작가였지만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서 친일로 변절한 것이 아니라 성장과정부터 ‘철저한 친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꾸준한 문학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정책을 선전하면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이무영은 조선에서 최초로 일본어로 쓴 소설 <청기와집>을 발표,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그의 문학 활동을 짚어보면 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조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 전까지 추앙받는 농민문학가였다. 때문에 이무영의 출생지인 음성군은 오랫동안 다양하게 이무영 기념사업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음성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그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지원 중단을 요청하자 2012년부터 예산지원을 중단한 바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붙였던 도로 이름도 바꿨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공적 가로챈 혐의, 수사해 달라”
[독립운동가 행적 진위논란⑬] 광복회대전충남연합 전 지부장 검찰고발 ▲ 광복회 대전충남연합 전 지부장이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을 위조해 다른 독립운동 후손이 받아야 할 각종 혜택을 가로챈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왼쪽부터 이순옥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시민공동조사단 공동대표, 김영진 광복회대전충남연합지부 감사,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김태원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 심규상 광복회 대전충남연합 전 지부장이 부친의 독립운동 공적을 위조해 다른 독립운동 후손이 받아야 할 각종 혜택을 가로챈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김영진 ‘광복회대전충남연합지부’ 감사와 홍경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김태원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이순옥 ‘독립운동가 김태원 공훈 의혹 진실규명시민공동조사단’ 공동대표는 9일 오후 대전지방검찰청에 독립운동가 김태원의 후손인 김아무개 전 광복회대전충남연합지부장을 고발했다고 10일 밝혔다. 이들은 고발장을 통해 “부친과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의 독립운동 공훈을 가로채 서훈을 받은 후 국가로부터 수많은 혜택과 보상금을 받았다”며 “이를 통해 진짜 독립운동가 후손의 권리를 빼앗고 국고를 손실시킨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1963년 벽창의용단원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돼 1926년 사형당한 ‘평북 출신 김태원’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도 평북 김태원 후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으로 일하던 김 전 지부장이 평북 김태원과 동명인 대전 출신인 자신의 부친을 평북 김태원과 같은 벽창의용단원으로 활동했던 것처럼 공적을 위조해 모친 명의로 유족등록 신청했다. 자신의 부친을 ‘평북 김태원’으로 둔갑시켜 지난해 4월까지 수십 년 동안 매월 지급되는 기백만 원 상당의 보훈연금을
이승만 일본 망명?… “도망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105] 전쟁 터지자 정신없이 피난 떠난 국가지도자의 행로 ▲ 이승만 대통령 부부. 금슬은 좋았지만 말년에 조국에서 쫒겨나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1950년 6월 27일 밤 7시 30분경, 6.25전쟁이 터지고 이틀 후에 정신없이 남쪽으로 도주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나타났다. 충남도지사 관사에 자리잡은 이승만은 난데없이 방송국 관계자를 찾았다. 서울에 버려둔 시민들에게 특별방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KBS대전방송국 유병헌 방송과장의 회고를 들어보자. “갑자기 초대형 고급 승용차가 대전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왔다. 나가 보니 키와 몸집이 큰 사람이 ‘나는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지시를 받고 온 김장흥이요’ 하고 악수를 청하였다. 나는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 ‘무슨 일로 어디까지 가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차는 얼마 후 충청남도 지사 관사 앞에 멈추었다. 김장흥을 따라 하차하니 이영진 충남지사가 현관에 서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응접실로 안내되었는데 방에 들어가니 이대통령과 부인이 선채로 귀속말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크고 두툼한 손으로 나에게 악수를 해 주었다. 잠시 후 대통령은 김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라는 지시를 했다. 문을 잠근 김장흥은 권총을 손에 꺼내 쥐고 나를 좌시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직접 나에게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여 전 국민이
KBS 이승만정부 망명설 단독보도 후 “굴욕적 반론”
기념사업회 찾아가 해명하고 이사회 소집까지…노조 “부당한 방송개입” KBS가 지난달 24일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의 망명설’을 보도한 후 안팎의 비난에 시달리다 결국 반론을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KBS 보도국 간부들이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을 직접 만나 해명했다. 친일 논란이 인 이인호 KBS 이사장은 관련 보도 경위를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하겠다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KBS는 지난 3일 <뉴스9> 12번째 리포트로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 망명 정부 요청설’ 부인> 제목의 리포트를 보도했다. 김민지 앵커는 “지난달 24일 KBS가 보도한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 정부 요청설과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측은 정부 공식 기록이 아니라며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며 “KBS는 앞서 충분한 반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밝혔다. KBS는 리포트에서 전쟁 발발 이틀만이라고 할 근거인 6월 27일이라는 날짜는 문서 내용에 없으며 이승만 정부가 난민 수용을 요청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승만기념사업회 측 반박을 그대로 내보냈다. ▲ KBS <뉴스9>는 지난 3일 이승만 전 대통령 측의 반론을 담은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 망명 정부 요청설’ 부인> 리포트에서 자사 단독 리포트에 유감을 표명했다. 앞서 KBS는 지난달 24일 방송된 <뉴스9>의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 리포트를 보도했다. 당시 리포트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 정부에 6만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장준하의 삶을 조명하다 Part 5 (2015.07.06)
7월 6일 보이는 라디오 ‘박한용의 백년전쟁’ 다시보기 <2015-07-06> 국민TV ☞기사원문: 장준하의 삶을 조명하다 Part 5. 유신 철폐 운동을 벌이는 장준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