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민족사랑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 조선물산공진회

2018년 5월 28일 6102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몽매한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선전활동을 벌였다. 홍보영화나 가요, 라디오방송,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앞 다투어 홍보했는데, 박람회도 마찬가지로 조선의 발전상을 보여준다는 명목 아래 개최한 전시성 이벤트였다. 이러한 전시행사는 품평회, 물산회, 공진회, 박람회 등 다양한 명칭으로 수시로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1915),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조선박람회(1929), 신흥만몽박람회(1932), 조선대박람회(1940)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최초의 공식 박람회로서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약 50일간 개최되었고, 전시장소는 조선왕조 통치의 핵심공간인 ‘경복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게 되니 공진회장을 경복궁으로 선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각도의 물산품을 전시하여 시정 이래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목적과 아울러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조선을 일본에 홍보하여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이른바 ‘식민植民’의 선전장이었다. 주요 전시관은 제1진열관, 제2진열관, 미술관, 기계관, 근정전 회곽廻廓, 철도국 별관 등이며 전시물로는 각종 산업에 관한 물품을 망라하고 외국품도 조선의 산업상 필요하다 인정하는 물품을 출품하는데 각 부류를 통틀어 4,665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공진회장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무려 5,226평이며 경회루에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야간에도 개장하여 관람객의 입장을 자유롭게 하여 ‘경복궁’을 유흥

기증자료

2018년 5월 28일 943

  • 4월 1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5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광주수필문학회에서 발행한 <전남수필>(창간호~제32호)와여러협회에서받은 초청장, 원고 청탁서 등 다양한 편지를 기증했다.   • 3월 19일 박소영 님이 7차 교육과정(2002년)이 시행되고 배운 국사, 국어, 도덕 등 교과서 총 19권(국정 6권)을 기증했다.   • 3월 27일 박성식 작가가 19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을 기증했다. 사단법인 우리의 소원 하종구 상임이사와 같이 방문해 연구소에 지지와 연대의 뜻을 밝혔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동네책방 아저씨, 풀벌레 일꾼 은종복 회원 면담기

2018년 5월 28일 1791

지난 5월 2일 책방 ‘풀무질’ 대표 은종복 회원을 만났다. 처음에는 연구소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전날 밤 은회원의 새 책(『책방풀무질:동네서점아저씨은종복의25년 분투기』,한티재,2018)을읽고약속장소를서점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 장소를 조정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시간을 조정하다 결국 서점에서 만나 은회원의 어머님께서 싸주신 저녁 도시락을 함께 먹기로 했다. 은회원은 서울 명륜동에서 25년째 ‘인문사회과학 책방-풀무질’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풀무질 책놀이터 협동조합’이라는 마을공동체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동네책방이 살아야 마을이 살 맛 나는 곳이 되고 마을이 살아야 마을사람들도 서로 웃고 떠드는 정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점에 갔을 때도 달님, 토끼님과 주민 한분이 계셔, 서점 한 쪽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공동체 사람들은 ‘덧이름’을 쓴다). 책에 둘러싸여 처음 만난 사람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면담은 책방 계단 아래에 움푹 들어간 작은 공간에 마주앉아서 진행했다. 은회원이 책방을 지킨 긴 세월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았지만 우선 어린 시절 모습이 궁금했다. 부모님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종복 회원은 1965년 서울 휘경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경북 군위군 출신이다. 두 분은 1958년 무작정 서울로 오셨는데 “서울에 가면 머슴처럼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 왔다고 해서 쉽게 삶이 달라졌을까, 당시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많은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도시 빈민의 삶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이었다. 중랑천 뚝방길 판잣집에 살며 두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 기획, 서울자유시민대학 강좌

2018년 5월 28일 1497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 기획, 서울자유시민대학 강좌 “광장과 민주주의의 역사 – ‘횃불’에서 ‘촛불’까지” 순조롭게 진행 중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이 기획하고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주관한 ‘2018 서울자유시민대학 대학연계 강좌’ “광장과 민주주의의 역사-‘횃불’에서 ‘촛불’까지”가 3월 28일부터 매주 수요일 총 10강으로 구성돼 진행 중이다. 이번 강좌는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직접민주주의 실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이를 통하여 한국사회가 나아갈 민주주의의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마련했다. 1강은 한상권 근현대사기념관장(덕성여자대학교 교수)이 ‘광장의 맹아’라는 제목으로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를 다루었다. 다음으로 김윤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가 ‘광장의 탄생’을 주제로 ‘신민’이 ‘시민’으로 거듭나는 사건이었던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3강에서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정 수립의 열망을 담은 3·1운동을 주제로 하여 혁명과 광장의 의미를 되새겼고, 5강에서는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주제로 청년·학생과 ‘광장의 힘’을 함께 확인하였으며 7강에서 해방 후 4·19혁명을 주제로 ‘광장에 바친 희생’을 다루었다. 한편 장원석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학예연구원은 해방 후 광장의 분열을 주제로 해방공간과 분출하는 민주주의의 열망을 다루었으며 풍부한 사진 자료로 수강생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앞으로 있을 8강에서 김승은 자료실장은 ‘동원과 광장 : 유신독재와 관제여론’을 주제로 그간 독립과 민주를 향한 광장의 힘과 다른 광장의 이면을 보여주고, 9강에서는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학살의 광장’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6월항쟁에서 촛불집회까지 30여 년의 현대사를 ‘다시 광장에서’라는 압축적인 제목으로 풀어내 강좌의 대미를 장식한다. 강좌에 빠짐없이 참석한 정미령 씨(근현대사기념관 전시해설가)는 이번

누구도 살지 않는 불가사의의 아방궁, 용산총독관저

2018년 4월 20일 5203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문화재수난사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이란 석조유물이 있다. 불교미술의 꽃이라는 일컫는 이 사리탑은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일찍이 1911년 여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절터를 벗어나 서울 명동과 일본 오사카 등지를 떠도는 통에 남다른 풍상을 겪었고, 1912년 12월경에 간신히 국내로 재반입된 이후 다시 총독부박물관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넘도록 경복궁 안에 오갈 데 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문화재이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포탄을 맞아 탑신이 크게 파손되는 악운이 겹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가 콘크리트로 겨우 외형이 복구되었고, 2016년 4월에 와서야 전면적인 해체 수리 복원을 위해 대전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사리탑이 애당초 원래의 절터에서 무단 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된 내력이나마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후지무라 도쿠이치(藤村德一)라는 일본인이 『거류민지석물어(居留民之昔物語) 제1편』(1927)라는 책에 남겨놓은 「현묘탑강탈시말(玄妙塔强奪始末)」이라는 글 덕분이다. 그는 통감부 시절에 ‘퇴한명령(退韓命令)’을 받은 전력이 있고,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으로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그의 책에는 「관헌의 횡포와 관리의 비상식」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이 자기네 위정자(爲政者)들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내용이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하세가와 원수(長谷川 元帥)와 아방궁(阿房宮)」이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된 글로 파악된다.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중에 러일전역비(러일전쟁비)의 잉여금 50만

‘천황’을 위해 조선 청년도 나서라

2018년 4월 20일 2467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에서 제작한 청년체력검사 실시에 관한 안내문이다. 침략전쟁이 장기화되자 일제는 조선 청년들도 전쟁에 직접 동원하기 위해 ‘육군특별지원병령’(1938), ‘해군특별지원병령’(1943), ‘학도특별지원병령’(1944) 등을 차례로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 8월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와 함께 조선에도 청년체력검사를 실시하였는데 체력검사에 관한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작성하여 애국반을 통해 회람하도록 만들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징병제 실시를 내선일체의 실현으로 미화하면서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징병을 독려하였는데 애국반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이었다. 전장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으며, 마을마다 역마다 죽음의 환송식이 애국부인회,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름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애국반 회람 청년체력검사 전 조선 일제히 실시 질문> 조선청년체력검사는 무슨 까닭으로 합니까? 답변> 아시는 바와 같이 대동아전쟁은 빛나는 전과를 내고 있으나 미영(米英)을 철저히 정토(征討) 격멸하여 광대한 대동아를 개발하고 경영하는데 매우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경우에 일본 인구의 1/4을 가지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힘에 응하여 맡은 직업에 힘을 다하는 것이 이번의 전쟁 완수에 기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실력이 어떠한 상황인지 알고자 이번의 체력검사를 행하는 바입니다. 질문> 검사의 범위는 답변> 조선인 남자로서 만 18세와 19세(대정11년(1922년) 3월 2일생에서 대정13년(1924년) 3월 1일생까지)의 전체 청년이올시다. 질문> 몇 시 어디에서 행합니까? 답변> 3월 상순에 각자가 거주하는 부군(府郡)에서 행합니다만 그 일시와 장소는 부읍면에서 애국반장의 손을 거쳐 2월 15일경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은 악질 친일경찰 계난수

2018년 4월 20일 20555

이번 호에 다룰 친일파는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고, 병합 후 헌병보조원으로 줄곧 있다가 3・1운동 이후 순사와 경부보를 거쳐 경부로 진급했고, 독립군 사이에서 평안북도의 ‘일등 창귀’(倀鬼 : 호랑이에 먹혀 죽은 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친 계난수이다. 1930년에는 참의부의 맹장 이응서를 체포한 공적에 힘입어 일제 경찰의 최고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은 조선인 경찰은 일제 치하 36년간 혜산 보천보전투 때 귀환하는 김일성의 항일부대를 추격하고 국내 동조자를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최령(崔鈴. 해방 후 최연崔燕으로 개명)과 의열단 폭탄반입사건 관련자를 체포한 김덕기(金悳基) 등 10여 명뿐이다. 이러한 공적에 비해 계난수의 개인사에 대한 자료를 매우 드물고 1941년 이후의 행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신문기사와 일제 문서를 근거로 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망라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그의 활약상(?)을 추적한다. 또한 만주로 건너간 이후 간도성 사무관 시절의 행적과 1940년경 동북항일연군 체포・귀순 공작 활동을 당시 시대상황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헌병보조원에서 경부가 되기까지 17년 걸려 계난수는 1890년 8월 1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06년 강계군 사립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7월 일본군 조선주차군 의주헌병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까지 12년간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다. 헌병보조원제도는 의병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1908년 6월 11일 한국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에 의거해 실시되었다.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하고, 그 복무에 대해서는

왕산 허위(1855~1908), 의병장

2018년 4월 20일 1725

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2018년 7월 16일 2209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3   이토를 찬양한 ‘매국배족’의 무리들   ❶ 조중응의 이토 히로부미 송별시 정미칠적 중 하나인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취운정 시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기 위하여 지은 시 ❷ 취운아집翠雲雅集 취운정에서 창화했던 시를 모아 간행한 것으로, 시책인 <선린창화善隣唱和>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 ❸ 경복궁후원원유회기념엽서 1909년 6월 15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겨주고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이토가 일본으로 가기 전 7월 1일 경복궁 후원에서 열린 신구통감 송영회 기념엽서이다.   취운정翠雲亭.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북촌길 고갯마루에 있던 정자다. 이곳은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내외정세를 토론한 장소로 유명하다. 특히 갑신정변 관련 혐의로 유폐된 유길준이 1887년 이후 이곳에 머물면서 1892년 11월 민영익의 주선으로 유폐가 풀릴 때까지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일·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많은 지사들이 우국의 심정을 토로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나철, 이기, 오기호 등은 1909년 2월 나라가 파괴되고 백성이 망하는 근본 원인을 사대주의에 기운 교육으로 민족의식이 가려진 데 있음을 통감하고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했다. 독립을 꿈꾸던 이들이 비밀리에 이곳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계획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7월 13일 오전 10시, 취운정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전현직 통감과 각부 대신, 조선의 고위 관민들이 모인 시회詩會가 열린 것이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방침’을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2018년 7월 16일 4173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2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 및 기술원 양성소 졸업생 사진,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행정·측량 분야의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전라남도 영암지역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 1911 1911년 작성된 전라남도 영암군 곤일종면 학송리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이다. 토지소유자는 대부분 목포와 해남에 거주하는 일본인 대지주들을 비롯한 부재지주였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 식민지 재정기반 확충과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지질 조사 등 사전준비를 해왔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일본인 기사를 초빙해 측량기술을 가르치면서 전면적인 지적조사에 대비했다. 한편 일본인 지주·자본가에 의한 토지매수는 통감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제정해 한국 내 일본인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개설했고 병합 후인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해 본격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다. 1910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2,400여 만 원의 경비를 들여 전국적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토지가격·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였다. 토지소유권 조사는 각 필지별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사정(査定)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기초 장부를 만드는 것이고, 토지가격조사는 전국의 땅값을 조사하여 지세(地稅)부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것이며, 지형·지모조사는 전국적으로 지형도를 작성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간도 매우 짧았다. 방법을 몰라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한 농민이 많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