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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반쪽짜리 우리 땅, 용산에 가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용산 답사기

2018년 9월 27일 1278

내게 용산은 무척 친근한 동네다. 이웃 동네인 동작구에 살고 있는 탓에, 도심으로 나갈 때면 늘 거쳐 가야만 하는 동네인 까닭이다. 주말이면 영화 보러, 쇼핑 하러 자주 들르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렇듯 용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그저 놀고, 먹고 무언가를 소비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관 기념으로 용산 답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용산에 뭐가 남아있긴 할까’ 내심 의구심만 들었다. 그래도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호기심에 9월 1일과 8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1·2차 답사에 동행했다. 두 차례에 걸친 답사는 모두 토요일 오후에 진행됐다. 황금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하고 용산에 모였다. 답사의 진행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려 애쓰지 마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답사란 원래 여러 번에 걸쳐서 천천히 기억하는 과정이고, 한 번 왔을 때 공간에 대한 인상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마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답사에 임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해방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반도 남쪽에 상주한 미군은 일본군이 물러간 용산을 차지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병식을 통해 위용을 자랑했던 연병장은 미군기지로 옷만 바꿔 입었다. 그래서일까. 이순우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 촛불행동을 다녀와서

2018년 9월 27일 996

지난 8월 11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행사가 열렸다. 연구소가 ‘야스쿠니신사 반대공동행동’의 한국 사무국이고 올해로 13년째 열리는 행사인 만큼 연구소에서도 여러 상근자가 유족들을 모시고 참가했다. 먼저 다녀온 연구소 선배들의 경험담과 조언이 끊이질 않았는데, ‘하마터면 우익들이 휘두르는 흉기에 맞을 뻔 했다.’ ‘확 잡아 챌 수도 있으니 일행들과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등등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출국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지말까’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직접 보고 싶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전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외치고 있다고! 촛불행동에 참가하기 위해 8월 10일 오전 김포공항에 모였다.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유족분들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야스쿠니신사의 무단합사를 취소시키고 한일 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싶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걱정 안하려고 했으나 긴장한 모습이 보였는지 유족분들께서 별거 아니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연출되었다.   1시간 조금 넘는 비행 후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물리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심리적인 거리감이 너무나도 먼 일본이 낯설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마침 택시기사분이 재일동포였다. 일본의 연휴 첫날이었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차가 막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재일동포들이 일본 내에서 어떤 핍박과 차별을 받고 힘들게 살고

기증자료

2018년 9월 27일 1422

도쿄지회 덴사키 회원, 재일조선인 사진 등 자료 기증 도쿄지회(총무 조영숙) 덴사키 회원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덴사키 회원의 아버지 사진과 인터뷰 영상(30분)인데 조영숙 회원이 자료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메모를 첨부했다. 덴사키 회원은 일본인 속에서 혼자 ‘조선인’의 정체성을 알리지 않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삶에 큰 연민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2016년에 이어 지난 8월 11일에 오쿠무라 리쓰코(奥村律子)씨가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오쿠무라 리쓰코 씨는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에 참석하여 박물관에 기증할 자료를 찾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주요자료는 「朝鮮大戰爭之圖」, 「朝鮮暴動記」 등 니시키에(다색판화) 2점과 대륙전진병참기지 조선의 사진이 실린 <興亞國策と朝鮮>(1941)등이다.앞으로도식민지역사박물관에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겠다는 의사도 전달했다. 8월 4일 조노 도시유키(城野俊行) 씨가 ‘땅 속에서부터 인권의 평등을 말한다’ 리플렛과 ‘명치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우표’ 총 5점을 기증했다. 8월 8일 오카모토 아사야(岡本朝也) 씨가 <ミレパガイドブック(미래를 위한 역사 패널전 가이드북) 2018>1권을 기증했다. 8월 16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히로시마 관련 도록 4권과 리프린트 지도 6점을 기증했다. 8월 16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山友會 회원 사진, 조선영화, 국제교류회 관련 자료 등이다. 8월 5일 최재호(경북동부지부) 회원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부친이 사용했던 안경, 시계, 졸업증서, 상장 등 총 10점이다. 8월 22일 이건제 회원이 창작과 비평 등 소장 도서를 기증했다. 8월 29일 송영옥(충북지부) 회원이 1972년에 창립한 민학회 회보(34권)와 도록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흥행 행진

2018년 9월 27일 1166

육군본부가 창군 70주년을 기념해 기획안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가 9월 9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막을 올려 현재 흥행 중이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독립 전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담아낸 작품으로 제작단계부터 지창욱, 강하늘 등 인기 배우 출신 사병들이 캐스팅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실제로 지난 8월 진행된 티켓 오픈에서 예매율 1위를 석권하며 2018년 하반기 최고 화제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육군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뮤지컬 제작을 위해 지난해 2월 전 장병을 대상으로 소재 공모를 거쳤고 그 결과 300여 편의 응모 소재 중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최종 선정했다. 이 뮤지컬은 서울 공연 이후 연말까지 성남, 안동, 목포, 춘천, 울산, 전주, 대전, 강릉, 부산, 대구 등 13개 지역 전국투어가 진행된다. 윤경로 상임대표, 이항증 공동대표 등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임원진도 육군의 초대를 받아 9월 15일 뮤지컬을 관람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2018년 9월 27일 787

8월 11일 도쿄의 한국YMCA에서는 ‘2018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이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2006년 8월 도쿄에서 “야스쿠니 반대! 합사 철회!”의 촛불을 들기 시작하여 올해 13회를 맞이했다. 연구소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의 한국사무국을 맡아왔는데, 매년 도쿄의 중심가에서 야스쿠니 반대의 촛불을 밝혀온 이 행사는 일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야스쿠니의 문제를 한국과 일본 사회에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올해의 심포지엄은 “‘메이지(明治)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아베 정권은 메이지유신 150년을 맞이하여 강제노동의 역사를 숨긴 채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을 비롯하여 메이지 영광의 부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를 달성하였다며 선전하는 메이지 시대는 오키나와, 타이완, 조선 등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의 영광에 가려진 일본의 침략사,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아베 정권의 평화헌법 개정 시도, 그리고 야스쿠니의 역할 등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는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이명구 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머나먼 남태평양의 팔라우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버린 자신의 지난했던 삶을 증언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에서 하루라도 빨리 빼내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하여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서 첫 해부터 촛불행동의 대미를 장식해

식민지 조선에도 난데없이 연합군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까닭은?

2018년 9월 7일 5715

흔히 ‘포로수용소’라고 하면 단연코 한국전쟁 당시의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제일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인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에 포로수용소가 엄연히 존재했으며, 더구나 그 위치가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은 다소간 이색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나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통해 경부선 철길의 서편 청파동 방향으로 나가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신광여자고등학교(청파동 3가 100번지; 1946년 8월 17일에 신광여자기예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다. 정식 명칭으로는 ‘조선부로수용소(朝鮮俘虜收容所, 1942년 7월 5일 개설)’이며, ‘부로’는 ‘포로’와 같은 뜻이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10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매일신보』1942년 2월 20일자에 수록된 「오늘은 포로수용소, 소남도(昭南島, 쇼난토) 동방 ‘쟝기’ 요새시찰기」 제하의 현지보도에 따르면, 싱가포르 함락 직후 포로수용소로 변한 ‘창이요새’에 이미 영국 본토군 1만 3천 명과 호주군 1만 5천 명이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오는 ‘소남도’는 “소화(昭和, 쇼와) 시대에 획득한 남쪽 섬”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식으로 작명한 ‘싱가포르’의 새 지명이다. 이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남방전선(南方前線)’에서 포로의 숫자가 20여 만 명 남짓으로 급증하게 되자 1942년 1월 14일에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해방 후 최초의 정치 테러인 현준혁 암살과 백의사(白衣社)

2018년 9월 6일 3922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주의 계열의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은 함경남도의 오기섭 주영하, 함경북도의 김채룡, 평양북도의 백용구 김인직, 황해도의 김덕영 송봉욱 등이었다. 개천 출신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던 현준혁(1904~1945)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활동가인 김용범, 이주연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고 최고 책임자인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만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자와의 연합전선 조직인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자 이에 합류하여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고, 이튿날 치스챠코프를 비롯한 소련군 수뇌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조만식과 현준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대표하여 치스챠스코프 대장을 찾아가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성격에 대해 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8월 29일 두 사람은 소련군 25군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각각 소련군이 온 목적과 평양 정세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앞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하였다. 이 무렵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내부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 분파별로 소련군과의 관계 설정과 정국 현안에 대한 시각 차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운명의 그날인 1945년 9월 3일, 조만식과 현준혁은 일제 트럭을 타고 평양시 교외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커브길에서 17,8세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트럭에 올라타 현준혁의 가슴에 권총을 발사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조만식의 증언) 며칠

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①

2018년 9월 6일 2320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회원은 7월 25일 연구소를 방문해 촛불시위 기간 틈틈히 수집한 촛불과 사위용품, 유인물 등 총 37점의 자료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민족사랑> 8월호 회원탐방 인터뷰이는 제1회 임종국상 수상자인 김경현 회원입니다. 김경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김경현 회원이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연구소에 기증했습니다. 과거에도 연구소에 자료를 기증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나요? 답 : 예전에 제가 소속되어 있는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차원에서 일문판 〈부산일보〉(복사본) 전량을 기증했고, 개인적으로는 한일과거사 관련 비디오 테이프 등 영상기록물과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펴낸 전시물 도록 및 제주4.3 관련 간행물 등을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것은 현장에서 제가 직접 수집한 1차 자료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문 : 촛불집회가 열리는 동안 줄곧 이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답 : 제 근무처가 광화문 옆에 있습니다. 퇴근 후에 광화문 광장 화단이나 길모퉁이에 떨어져 있는 전단지나 촛불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수집했습니다. 또한 주말에도 꼭

‘지원병’이란 미명 아래 침략전쟁에 내몰린 조선인 청년들의 운명

2018년 9월 6일 3347

조선인의 참정권 및 병역의무에 대하여는 당국자 간에 숙의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의 주장으로 일본관민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決)한 후 각국 정부에게 통첩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 의무」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언어 차이로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겉으로는 ‘내지인(內地人)’과 신분취급상 아무런 차별이 없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본질은 역시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육군병지원자훈련소(陸軍兵志願者訓練所)가 양주 공덕리에 이어 평양 신양정과 시흥 독산리에 잇따라 설치되었고 1944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통해 배출된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입소자들은 현역병 또는 제1보충역의 신분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전선으로 끌려갔다. 이와 아울러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이 별도로 제정되어 해군병지원자훈련소(海軍兵志願者訓練所)가 경남 창원(진해)에 설치되었다. 육군에 이어 해군에까지 지원병제도가 확장된 것은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해군병력의 조달이 시급한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2018년 8월 1일 3561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