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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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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3
– 조선인의 원기를 회복하기 위한 아동예술교육 강조 –

이정아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1.9.~1931.7.23.)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아동교육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어린이들의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아동예술교육을 교육의 내용으로서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의 원기를 회복하는데도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소파는 1921년 개벽사 동경특파원 자격으로 동경에 있었고, 도요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 청강생으로 지내면서 아동예술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필자는 소파 방정환에 관한 세 번째 교육적 단상을 이어가고자 한다.

1. 개벽사 동경특파원 활동과 도요대학 문화학과 청강생

식민지기 일본유학생은 1910년대에는 대략 500-700명 사이였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가 시행되면서, 외형적으로는 식민지 본국과 조선의 교육시스템을 일치시켰다. 이에 조선의 일본유학생은 1920년부터 급성장하였고, 1930년대 중반까지는 3천에서 5천명 정도였다. 이 시기 천도교에서도 종단적 차원에서 다수의 유학생을 일본으로 보내 선진문물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방정환 또한 처음에는 개벽사 동경특파원 신분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유학생은 1923년에 급감하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유학생이 국내로 귀국하거나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유한준의 연구에 의하면, 방정환의 도요대학 시절을 철학과에 진학하여 부전공으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전공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방정환의 〈도요대학생도학적부(東洋大學生徒學籍簿)〉를 근거로 볼 때 사실이 아니다. 방정환은 도요대학 철학과에 정식으로 입학하진 않았으며, 문화학과에 청강생으로 있었다. 나카무라 오사무(仲村修)의 연구에 의하면, 다이쇼 10년(1921년) 문화학과 입학자의 학적부를 살펴보면 조선인 입학자가 청강생에 몰려 있었는데, 40명이나 입학자가 있었다. 조선인 입학자 중에서 청강생 한 명이 방정환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참고로 2018년 도요대학 방문을 통해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방정환의 학적부는 문화학과 명부에 포함되어 있다.

2. 방정환의 아동예술교육활동의 구현과 색동회 조직

방정환은 정서함양에 알맞은 교육의 내용으로 예술교육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는 ‘반찬을 예술’에 비유하여, “밥만 먹고 살 수 있느냐, 반찬도 먹고 살아야 비로소 몸에 유익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예술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공부에 있어 “밥”은 “수신과 산술”로 보았고, 완전하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반찬, 즉 아름다운 예술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술이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여러분에게는 대단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입니다만, 듣기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동요를 짓는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좋은 소설을 짓거나 읽는다든지 좋은 동화나 동화극을 생각한다든지 그런 것들이 모두 ‘예술’이라는 세상의 것입니다. 모두 여러분의 예술입니다.

반면에 어린이들의 원기를 키울 수 있는 아동예술교육활동으로 동화, 동요, 그림 등을 제시하였다. 예컨대 방정환은 “어린이들은 동요를 짓고 부르며, 그림을 그린다든지, 좋은 소설을 짓거나 읽고, 동화극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을 ‘예술’로 본 것이다. 이러한 아동예술교육활동을 통해 소파는 가장 헐벗고 굶주린 어린이들이 조선인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러한 그의 확신은 일본 유학 경험을 통해 선진문물에 대한 이론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소파는 단순하게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게 아니라 예술성을 추구하되 낭만주의적 자유예술운동의 흐름을 조선에 맞게 각색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컨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방정환은 일본의 근대적 아동예술장르를 벤치마킹하였고, 조선의 상황에 적합하게 동화, 동요, 그림으로 아동예술교육활동을 구현하였다.

그리고 위와 같은 아동예술교육활동은 ‘조선 최초의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를 조직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색동회 회원들은 1923년 5월 1일 3시 색동회 발회식에서 만세이바시역(萬世橋驛)에 집합하여 수루가다이(駿河台)에 있는 미와(三輪)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색동회 사진은 아랫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위쪽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이다.

색동회는 1923년 3월 16일 발족하여 1923년 5월 1일 일본 동경에서 방정환을 중심으로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진장섭, 정병기, 강영호, 조준기, 조재호, 윤극영 등이 창립하고, 뒤에 최진순, 마해송, 정인섭, 이헌구 등이 가입하였다. 색동회 멤버들은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다양한 전공을 하고 있는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색동회 멤버들은 근대적 아동예술장르에 대한 이론적인 탐색을 하고 나름의 예술성을 추구하면 서 실천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다만 초기에 조직되었을 당시와 다르게 색동회 멤버들 개개인의 추후 활동에 관한 역사적 평가는 재고가 필요한 부분이다.

3. 조선인의 원기 회복을 위한 우리말 동요의 필요성

방정환은 동화, 동요, 그림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특별히 우리말 동요의 필요성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였다. 그가 번안한 동요 중에서 1920년 8월에 발표한「어린이노래-불 켜는 이」(『개벽』제1권 제3호)가 있는데, 이때 방정환은‘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어린이노래-불 켜는 이」는 방정환 스스로 처음‘어린이’라는 단어를 썼기에 중요하다. 사실 우리가 지금 대체로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어린이’라는 말은 육당 최남선이 1908년 잡지『소년』창간호 서언에서 먼저 사용하였고, 1914년 잡지 『청춘』 창간호에서 ‘어린이의 꿈’이라는 시가를 번역해 소개하면서 썼다고 한다. 최초의 사용자를 방정환으로 보긴 어렵지만, 최남선이 사용한 ‘어린이’는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어린이’라기보다는 개념상‘청년’에 더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 1920년대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어린이’라는 말을 정착시키고 확산시켰던 이는 방정환으로 볼 수 있다.

방정환이 아동예술교육을 강조한 점은 예술교육이 갖는 속성 즉,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사실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동예술교육은 비록 식민지 시기의 피지배적인 상황에서, 조선의 어린이들이 외부의 압박을 자신의 힘으로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예컨대 방정환은 어린이들이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우리말 동요를 짓고 부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아동예술교육은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이 조선인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 내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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