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동지冬至에 만난 동지同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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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동지冬至에 만난 동지同志들
– 남태령 대첩의 빛나는 밤 –

김수빈 후원회원

저녁 8시. 우린 명동에서 남태령으로 가는 4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12월 21일, 동지(冬至)였다.

이날은 나와 내 친구가 함께 시위를 3탕 뛴 날이었다. 오전 11시 대통령 관저 앞 시위, 오후 3시 광화문, 그리고 저녁 8시 이후 남태령에서의 밤샘 시위. 광화문 시위가 끝나고 다리와 목이 너무 아파 잠시 머물렀던 카페 안에서 남태령에 발이 묶인 전봉준투쟁단의 소식을 접했다. 친구가 “지금 남태령에 사람들 계속 모이고 있대. 이거 봐봐” 하며 보여준 사진에는 농민들의 트랙터와 경찰 버스가 어둠 속에서 대치하고 있고, 그 뒤로 빛나는 야광봉 대열이 늘어선 광경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짐을 다시 챙겼다. 명동에서 남태령으로 가는 4호선 안에서 ‘2024년의 우금치, 남태령’으로 와 달라는 전봉준투쟁단의 다급한 호소문을 읽었다. 1894년의 우금치, 끝내 넘을 수 없었던 그 고개가 2024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유효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고 오로지 백남기 농민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딱 광화문 집회까지만 예상하고 온 터라 밤을 새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핫팩도, 보조 배터리도, 담요도 없고 물도 부족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백남기 농민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경찰의 물대포로 돌아가신 농민 백남기. 그리고 무엇보다 ‘펄펄 타오르는 젊음’이 있었다. 가서 몸으로라도 때우자. 연설문을 준비해 놓고 너무 떨려 자유발언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쫄보인 내가,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머릿수라도 채우자. 경찰이 농민을 진압하려 한다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서 막아서자. 드러눕자. 그리고 마침내 경찰이 비켜서면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와 함께 한남동까지 걸어가자. 뛰어가자, 경찰이 다시는 막지 못하게.

남태령, 처음 들어보는 역 이름이었다. 담벼락인 줄로만 알았던 3번 출구 앞 철책 너머에 수방사가 있고,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인 곳이라는 사실은 남태령에서 발언하시는 농민의 말씀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남태령으로 가는 길 내내 오늘 밤 안으로 경찰이 길을 열고 농민을 보내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으나, 그 희망은 우리가 남태령역에 내리자마자 무너졌다. 2번 출구로 나갈지, 3번 출구로 나갈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2번 출구에서 내려오던 여성 두 분께서 “여기 경찰이 막았어요, 3출로 나가야 해요.”라고 말해주셨다. ‘경찰이 지하철 출입구를 막았다고?’라는 의문을 품고 지상으로 올라가서야 현장을 마주했다. 대충 세어봐도 주차되어있는 경찰 버스만 20여 대 이상이었다. 경찰 버스 20여 대가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었고, 트랙터와 경찰 버스가 대치한 곳까지 50m 정도 올라가니 경찰 버스가 5대 더 있었다. 그 5대가 남태령의 양방향 도로를 횡단한 모양으로 주차되어 있었다. “경찰 주차 개떡같이 해놨네.” “그러게. 누가 길을 막고 있다는 건지….”

경찰이 교통 혼잡을 이유로 미리 신고까지 마치고 법원도 승인한 농민들의 시위를 막아선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경찰이 농민을 향해 행사하는 폭력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남태령으로 모이는 행위는 미리 신고한 집회가 아니기에 혹시나 경찰이 꼬투리를 잡아 불법집회로 우릴 연행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찰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지하철 입구에서부터 ‘조금만 올라가시면 돼요.’라며 안내해 주시는 부모님 나이대의 농민분과 그에 ‘네에~’하고 대답하며 응원봉에 불빛을 켜는 2030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대장 트랙터를 몰고 광주에서 6일 동안 올라오셨다는 농민께서 우리 앞에 서서 시민께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걱정 어린 말씀을 하셨다. “사실 저희들이 오늘 여기서 날밤을 새서라도 지키자고 했지만, 여러분들이 지켜주지 않으면 언제 끌려 나갈지 모르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국민들과 윤석열을 잡으러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일 새벽이 되면 우리 농민들만 남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데 속에 뜨거운 뭔가가 올라왔다. 그래서인지 춥고 두려웠지만 떨리지 않았고, 화가 나는데 외롭지 않았다. 이 말씀을 들은 시민들은 “우리 기다리는 거 잘해요!”, “밤 샐 수 있어요!”, “계속 같이 있을게요!”를 연신 외쳤다.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이런 우리를 기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린 지켜지는 존재가 아니라 지켜내는 존재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세상은 우릴 투사로 키워내고 있는 중이다. 일상에서 2030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무시하던 경찰이, 우리가 연대하여 목소리를 내자 이제서야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개개인이 모두 교차되어 있었다. 이곳에 모인 나와 내 친구만 해도 손에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장애인 혹은 청소년일 것이며, 이주자일 것이다. 우리가 가진 약자성이 뭉치니 남태령의 농민들 앞에서는 강자가 되어 경찰이란 칼 앞에 방패로 섰다. 새벽에 시민들이 흩어지면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걱정하던 농민의 모습처럼, 이 긴 밤에 동지(同志)로 모인 우리들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약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연대, 대동, 서로 손을 맞잡고 거리 위에 서서 외치는 이 뜨거운 울림이 주는 힘을. 약자인 우리가 뭉쳐서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는 방패가 되었던 경험을.

22일 새벽 1시경에는 우리 대오 앞에서 한 남성 시민이 경찰에게 직접적으로 따지며 큰 제스처를 반복하자, 시민들이 만류하는 상황도 있었다. 혹시나 경찰과의 충돌이 일어날까봐 흔들던 응원봉을 멈추고 “같이 구호만 외쳐요!”, “싸우면 안되요!”를 외치며 시민과 경찰을 떼어놓고 화가 난 남성 시민을 다독이고 진정시켰다. 새벽 1시 반경에 경찰은 시민들을 트랙터와 분리시키기 위해 100m 정도 후퇴했다. 우린 이런 경찰의 태도가 ‘철수’인 줄로만 알고 환호하며 전진했다. 하지만, 다시 견고하게 ‘개떡같은’ 주차를 한 경찰 버스 앞에서 다시 “차빼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시위 앞쪽에서 한 여성분이 경찰의 무전을 듣고 다급하게 “무장인력이 진압하려 한대요!!”를 외쳤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는 뒤에 있는 시민들에게 소식을 전달했고, 경찰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새벽 1시 반경에 이미 과천 방향 차도까지 경찰이 모두 막고 있었고, 사당역에서 남태령역 방향으로 농민 강제진압을 위해 경찰이 대거 투입 태세를 갖춘 상황이었다고 한다. 시민과 농민들은 오고 가는 방향이 모두 막힌 채 체감온도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전봉준투쟁단은 긴급회의 끝에 다시 위로 올라가 함께 뭉쳐있자며 시민들을 인솔하셨고, 우린 경찰차벽을 뒤로하고 아까 서있던 자리로 돌아와 다시 도로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되었다. 남태령에 함께 있지는 못해도 유튜브 생방송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수많은 시민들이 방한용품과 식량, 보조 배터리, 심지어 어묵차와 난방을 가동 중인 전세버스를 보내주셔서 우린 거리 위에서 얼어 죽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경찰로 인해 시민을 위한 난방 버스는 방배역까지 걸어가야 이용할 수 있었고, 배달과 퀵도 경찰 도시락 배달을 핑계 대며 들어와야 간신히 포위망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집에 있는 보온병을 모두 꺼내 따뜻하고 진한 생강차를 담아 나누어주신 아주머니도 계셨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내장까지 떨리는 추위가 엄습했다. 손발은 진작에 얼어 있었지만, 골짜기 뒤에서 넘어오는 한기가 절정에 달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가 이렇게나 많다니’라는 생각할 틈도 없이 k-pop과 유쾌한 시민 발언이 쏟아졌다. 유튜브 생방송을 보다가 결국 현장으로 뛰쳐나오신 민중가수들이 즉석에서 공연을 해주셨다. 노래를 부르면서 간주가 나오거나 노랫말 사이사이에 계속 구호를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전 4시 45분이 되자 경찰이 200m가량 물러났다는 소식에 우린 모두 일어나 전진하였다. 우릴 인솔해 주는 차량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농민들의 트랙터가 하나둘씩 우리의 대오 앞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입김이 허옇게 뭉치도록 열렬히 환호했다.

‘트랙터 진짜 멋있게 생겼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트랙터 앞에 달린 저 커다란 삽이 대한민국의 썩은 살점과 쌓인 오물들을 모두 퍼다 버리고 새로운 물꼬를 낼 것 같았다. 그러니 우린 지금 당장 저 트랙터가 갈 길을 터야 했다. 전봉준이 나아갈 길을 만들어야 했다. 새벽 4시에 시민들과 함께 부르면서 너무나 울컥한 가사가 있었다. “하지만 힘을 내 이만큼 왔잖아 이것쯤은 정말 별거 아냐 세상을 뒤집자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뿐인 복잡한 이 지구가 재밌는 그 이유는 하나 바로 너”

소녀시대의 ‘힘내!(Way to go)’라는 곡의 가사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뿐인’ 이 혼탁한 상황이 ‘정말 재밌는 이유’는 바로 이 긴 동지(冬至)의 밤을 함께 보낸 동지(同志)들 덕분이고, 나 역시 누군가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일으켰다. 이렇게 두 시간을 서서 노래를 부르다 새벽 6시 반이 넘어가고 첫차가 풀리니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도 동은 여전히 트지 않았다. 그러나, 긴 밤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나는 저체온증이 와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내 친구가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나를 끌고 남태령 지하철역으로 들어왔다. 차마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지하철역 벽에 널브러져서 덜덜 떨고 있는데, 눈에 속속들이 남태령에 도착하는 시민들의 대오가 보였다. 모두 중무장을 하고 두툼한 배낭을 맨 채 누군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손을 들어 올려 ‘투쟁!’을 외치기도 하고, 오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며 대동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나와 함께 있던 친구는 12월 8일 2차 계엄의 위기 속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시민 불침번을 섰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이번 남태령 대첩에서도 정원이는 시민들이 누가 지시를 한 것도 아니고 매뉴얼도 없는 상황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각자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경이롭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시위를 함께 이어가고,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버틸 수 있었다는 것에서 밀려오는 감동과 연대감이 그날 밤 우리 모두를 살린 것이다.

이날 나는 아침 8시경에 집에 도착해서 온몸이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전기장판 온도를 아무리 올려도 반동처럼 덜덜 떨며 선잠을 잤지만, 얕은 꿈속에서도 트랙터와 시민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도 계속 눈물이 나는데, 너무 많은 이유의 눈물이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 부당함에 저항하고, 시대 과제를 외면치 말고, 나와 같은 약자들과 연대하여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적극적인 태도. 남태령에서 본 청년들의 밝은 눈빛이, 분노하면서도 침착한 목소리가 마치 나의 고향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시위가 익숙해져 간다. 솔직히 말하면 시위라도 나가지 않으면 숨이 쉬어지지를 않는다. 나는 남들보다 추위를 3배는 더 타는 체질이라던 한의사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이제 추위에는 도가 텄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결국 다시 뭉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리라는 것은 역사가 안다. 죽은 자들이 돕는 산 자들을 과연 어느 악인이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끝으로 강우규 지사의 유언으로 이 글을 마친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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