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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이토 히로부미 후손이 日외무상? 마에하라 후임에 4대손 마쓰모토 물망… 동북아 외교갈등 우려

2011년 3월 8일 353

일본에서 정치자금 문제로 물러난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전 외무장관 후임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조선통감의 외고손자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일본의 행위에 대한 역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 외교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 외교에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유력한 차기 외무장관 후보 마쓰모토 다케아키(松本剛明)=간 총리가 7일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관방장관에게 당분간 외무장관을 겸임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쓰모토 다케아키(51·사진) 외무차관을 승격시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일본 언론이 이날 보도했다. 마쓰모토 외무차관은 일본의 초대 총리이기도 했던 이토 통감의 4대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이토 통감 둘째 딸의 손녀이다. 그는 아버지 마츠모토 주로(松本十朗)가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고, 이종사촌형 후지사키 이치로(藤崎一朗)가 현재 주미 일본대사로 재직하는 등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은행을 다니다가 방위청 장관이 된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자민당 소속이던 아버지와 달리 민주당 소속으로 입후보해 2000년 중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단체국회도서관 운영을 총괄하는 중의원 운영위원장을 맡았을 때 한국의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추진단의 요청으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현안이 산적한 외교의 연속성을 위해 그의 외무장관 승격을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할 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 내 여론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야당, 간 총리에 의회 해산 요구 압박=야당은 간 나오토(菅直人) 내각 사퇴 및 의회 해산을 요구하며 공세의 고삐를

제주 4·3 학살희생자 48명 신원 추가 확인

2011년 3월 8일 508

제주 4·3과 한국전쟁 예비검속 때 집단학살돼 제주공항에 암매장됐던 희생자 48명의 신원이 50여년 만에 확인됐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과 관련해 이처럼 많은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처음이다. 제주도는 7일 제주대에서 ‘4·3 희생자 유해 발굴 및 감식 보고회’를 열어 2008년 9월부터 제주공항 활주로 근처에서 발굴한 유해 가운데서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48명의 신원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 1949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주민들이다. 이날 확인된 48명을 포함해 2006년 이후 제주공항 등에서 발굴한 유해 396구 가운데 모두 71명의 신원이 최종 확인됐다. 제주도는 ‘4·3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을 위해 2006년부터 제주4·3연구소에 맡겨, 제주시 화북지역과 제주공항,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 등에서 네 차례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다. 이번 제주공항 유해 발굴 작업은 한국공항관리공단이 2007년 남북활주로 일대를 정비하는 기간에 이뤄졌다. 제주대·서울대 법의학교실 연구팀은 유해의 성별·연령, 외상 여부 등을 조사하는 법의인류학적 감식과 유전자 감식을 하고, 행방불명자 유가족 667명에게서 채혈해 유해들의 유전자와 대조했다. 하지만 유해 325구는 유전자 정보가 확인되지 않거나 비교 대상 유가족이 없어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강현욱 제주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유해의 신원을 모두 확인하지 못해 많은 유가족께 죄스러운 심정”이라고 말했다. 전 제주4·3연구소 소장 박찬식 박사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자의 신원을 대규모로 확인한 것은 최초”라며 “이번 작업은 과거사 해결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신원 확인에서도 제주공항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왜 친일문학을 선택했는가"

2004년 3월 30일 1610

[친일문학 새로 보기]그들은 왜 친일문학을 선택했는가   박수연 _ 문학평론가 qkrtk@chollian.net 친일문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제기되어야 할 문제 중에 하나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관련 양상이다. 특히, 한국근대문학사를 볼 때 일제말기에 친일문학의 길로 나아간 문인들 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그 길을 긍정했던 부류가 1920년대의 국민문학파였고 이들이 강조했던 것은 민족의 오랜 문화적 전통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살펴보는 일은 더욱 필요해진다고 하겠다. 1920년대의 국민문학파가 프로문학에 맞서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이 프로문학에 맞서는 하나의 운동으로서 존재했었다는 점과 함께 이들 이전부터 심정적인 국민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일은 한국에서 근대의 출발과 전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문제 하나를 제기한다. 국민주의가 민족에 대한 국가주의적 전유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제시대의 국민주의는 좌파의 이념과 대립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상상과 함께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상상된 것이라면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1920년대의 국민문학파는 민족모순의 해결을 ‘국민’의 형성에서 찾는 경우였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 일본 국민문학의 형성이다. 일본에서 국민문학이 하나의 경향으로 형성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경과하면서부터이다. 수가 히데미는 나스메 소세키, 시마자키 도손, 구니키다 돗포를 이 시기에 국민문학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대표적 문인으로 꼽고 이들에 의해 대내적으로는 국민이, 대외적으로는 민족이 표상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이때 ‘국민’은 국민 상호간의 평등화(시민화)를 함축하지만 ‘민족’은 타자와의 차이=차별의

과거사청산 입법관련 걸림돌과 디딤돌의원 선정

2004년 3월 29일 1481

과거사청산 입법관련 걸림돌과 디딤돌의원 선정 발표 일시 : 2004년 3월 29일 장소 : 철학카페 느티나무 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 친일진상규명법범국민추진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1. 기자회견 취지  16대국회에서 과거사 관련 4대법안(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안(이하 강제동원진상규명법),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이하 친일진상규명법), 동학농민혁명군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안(이하 동학명예회복법), 6.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법률안(이하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이 발의되어 지난한 심의를 거쳐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안을 제외한 과거사 3법이 제정되었다.   이미 제정된 과거사 3법(강제동원진상규명법, 친일진상규명법, 동학명예회복법)은 심의과정에서 일부 주요조항이 삭제되거나 심하게 수정되어 개악의 수준에까지 이르렀고,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안은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부결되어 그 희생자 유족들은 참담한 심경에 처해 있다. 16대국회를 마감하면서 과거사 관련 4대 법안 심의과정에서 과거사청산에 기여한 디딤돌의원과 과거사청산을 가로막은 걸림돌의원을 선정하여 공포함으로써, 디딤돌의원에게는 더욱 분발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고수한 걸림돌의원들은 역사와 국민 앞에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고자 한다. 또한 17대국회에서는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이 조속히 제정되고, 이미 제정된 과거사 3법이 법안발의취지에 맞도록 개정되길 촉구하기 위해 ‘4대 과거사특별법 추진단체 공동기자회견’을 개최하게 되었다.  2. 걸림돌과 디딤돌의원 선정기준     16대국회는 역대 국회 중 최악의 국회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과거사 청산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6대 국회에서는 동학명예회복법, 강제동원진상규명법, 친일진상규명법,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이 발의되어 민간인희생명예회복법안을 제외한 과거사 3법이 제정되었다. 어찌 보면 역사청산의 전기를 마련한 국회로 자부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16대 국회는 스스로 이러한 영예를 저버리고 반역사적 국회라는 오명을 짊어지고 말았다. 통과된 과거사 법안도 심의과정에서 수구적인 일부 국회의원들에 의해 법안의

日서 ‘독도 문신’ 퍼포먼스 이랑씨

2011년 3월 8일 476

日서 ‘독도 문신’ 퍼포먼스 이랑씨 (서울=연합뉴스) 서울 홍익대 일대에서 문신 퍼포먼스를 하는 이랑씨가 지난 3.1절 일본 대마도를 찾아 몸에 독도 그림을 문신으로 새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씨는 “독도 문제에 무관심한 젊은 층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지금 독도를 둘러싸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 타투(문신)를 매개로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부 기사 참고. 이랑씨 제공>> 2011.3.7 pulse@yna.co.kr 日서 ‘독도 문신’ 퍼포먼스 이랑씨 (서울=연합뉴스) 서울 홍익대 일대에서 문신 퍼포먼스를 하는 이랑씨가 지난 3.1절 일본 대마도를 찾아 몸에 독도 그림을 문신으로 새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씨는 “독도 문제에 무관심한 젊은 층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지금 독도를 둘러싸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 타투(문신)를 매개로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부 기사 참고. 이랑씨 제공>> 2011.3.7 pulse@yna.co.kr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독도 문제에 무관심한 젊은 층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지금 독도를 둘러싸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 타투(문신)를 매개로 알리고 싶었습니다.”서울 홍익대 일대에서 문신 퍼포먼스 활동을 하는 타투이스트 이랑(36)씨는 지난 삼일절 일본 대마도를 찾았다. 일본 땅에서 독도를 몸에 새기는 공개 퍼포먼스를 통해 독도 문제의 심각성을 일본인들에게 알리려는 취지였다고 한다.   이씨는 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도 문제를 두고 유명인들은 말이든 뭐든 할 수 있지만 나 같은 소시민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문신이 독도 문제를 알리는 데 좋은 도구가 되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 후기 항일 의병장이었던 최익현(1833~1906) 선생 순국비가

명성황후 킬러 이두황 묘 발견, 잘먹고잘살다 갔다 (뉴시스 3.5)

2011년 3월 7일 1030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일본 낭인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여우사냥이 성공했다. 이제 조선은 우리것이 됐다’는 유명한 말이 남았다. 이 살인집단에는 조선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두황이다. 이 자의 묘를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길진이 찾아냈다. 전주 기린봉에 터를 잡은 이두황의 무덤은 비석높이만 2m가 넘는 호화판이다.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들의 이름은 묘비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조치다. 광복 직후 이완용을 위시한 친일파는 대부분은 부관참시 당했다. 이두황도 그리 될뻔했다. 앞서 1951년 차길진의 부친인 빨치산 토벌대 18대대장 차일혁은 독립투사 김지강과 함께 이두황의 묘를 추적해냈다. 이어 부관참시를 시도했다. 이미 서울 원남동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 사이가와 미와를 처단한 전력도 있는 강골들이다. 하지만 이두황 부관참시는 불가능했다. 당대로서는 드물게 화장을 해 묻은 탓이다. 아버지에 이어 이두황 뫼의 존재를 확인한 차길진은 “이두황의 시문 족자 2점을 얼마전 일본 궁내청을 통해 입수했다. 한학과 서예솜씨가 제법이다. 글에는 일본에서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녹아들어있다”고 혀를 차면서도 “동시에 잊고 지낸 친일매국노 이두황의 존재가 상기됐고, 모종의 도움(영능력)으로 그의 분묘로 향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이두황(1858~1916)은 서울의 가난한 상인(常人) 출신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 좌영 초관(哨官)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다 1894년 동학운동 진압에 투입된다. 이후부터는 승승장구다. 특히 1894년 11월 8~14일 동학농민군과 친일관군의 최대 격전지인 우금치에서 대학살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맹활약한다.능력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전문공개)

2004년 3월 26일 1565

법률    제     호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 제1조(목적) 이 법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일본제국주의를 위하여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항구적 자주민주국가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토벌하거나 토벌하도록 명령한 행위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3.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수뇌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5.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에 고용되어 행한 밀정행위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그 밖에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7.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8.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의원으로 활동한 행위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중좌(中佐)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13. 중앙의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태평양전쟁 한인 ‘포로감시원’ 전범처리 억울했다

2004년 3월 26일 899

태평양전쟁 한인 ‘포로감시원’ 전범처리 억울했다 △ 일제 침략전쟁에 강제동원된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의 모습. 태평양 전쟁에 포로 감시원으로 강제징용된 한인청년들이 지극히 형식적인 재판절차와 일제의 교묘한 책임전가 등으로 억울하게 전범으로 처벌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채영묵 국민대 연구교수는 국민대 한국학연구소가 26일 오전 10시 이 학교 본부관 3층 대회의실에서 ‘해방 후 해외 한인의 귀환과 정착’을 주제로 여는 학술심포지엄에서 ‘한인 포로감시원에 대한 B·C급 전범처리와 문제점’을 발표한다. 당시 전범재판기록 등을 토대로 포로감시원 문제에 실증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논문이다. 채 교수에 따르면, 일제의 침략전쟁에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한인 청년들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고학력 소유자이거나 지도급 인사였으나 당연히 숙지해야할 제네바조약은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애초에 제네바조약을 준수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일본은 국제적 문제가 될 만한 포로감시원의 임무를 일본인이 아닌 식민지국인 한국과 대만의 청년을 뽑아 수행시켰”기 때문이다. 전범재판 과정에서 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은 연합국 포로들에게 손가락으로 지목당하기만 하면 곧바로 전범으로 기소됐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군이 연합국 포로들에게 저지른 잔혹행위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했다. 실제로 일제 수뇌부는 단 28명이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이 중 7명만이 사형을 당한 반면, 동남아에 끌려갔던 한인 포로감시원들은 129명이 B·C급 전범으로 기소돼 22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채 교수는 “전범재판이 한인 포로감시원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도록 유도되고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이를 입증하는 사례로 △현지에서 유행한 ‘잔인한 행위를 한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소문

국내 강제동원도 보상받아야 한다 (한겨레. 3.4)

2011년 3월 7일 311

한-일 강제병합 101주년의 3·1절 직전인 지난 2월27일,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박아무개(군인)씨의 “국내 강제동원자에게 의료지원금을 지급하지 않는” 데 대한 헌법소원에 대해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결정의 골자는 정신적 고통으로 볼 때 고통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국외강제동원 피해자를 우선적으로 처우하는 것은 자의적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가. 한반도내 동원과 국외 동원은 차이가 있는가. 수년간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 “절대 그렇지 않다”이다.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은 일본 정부의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한 일제 전체의 틀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은 전시물자와 인적 동원의 중요한 기둥이었다. 한반도 내외를 구분하여 강제동원을 했지만, 중요성에서 차이를 둔 것은 아니었다. 일본으로 동원이 이뤄지는 한편 한반도에서는 미곡 생산과 중요 공장으로의 동원이 세부계획을 통해 실시되고 있었다. 도별 동원 할당은 조선외, 조선내(道外), 도내(道內)라고 구분되어 할당되어 일람표로 작성됐다. 이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일한 동원정책 속에 자리한다. 일제는 조선 내외의 강제동원에 대해 일본보다 조선내를 우대한 것은 아니다. 노동의 강제성, 민족차별, 노동임금·대우 차별 등 강제동원의 조건은 조선 내부나 일본 국내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조선 내부가 더 편했고 일본 본토가 가혹했던 것이 아니다. 조선내 동원도 힘들었다. 식량사정은 오히려 조선내가 더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본 외무성 외교자료관에는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동원상황 보고서(본방 노동법제 및 정책관계 잡건)가 소장되어 있다.

‘시민과 세계’, 세계화시대 민족담론 집중조명

2004년 3월 26일 724

학술지 `시민과 세계’, 세계화시대 민족담론 집중조명 △ 지난 1월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전세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국가의 국민’자리에 ‘세계의 시민을’ 세계화 시대의 국민국가, 탈민족 시대의 민족담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시대 인문사회학계 최대의 화두이자 논쟁거리다. “국경을 넘는 세계시장과 세계시민사회가 출현했다고 해서 국민국가와 국민사회가 종언을 고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참여사회연구소가 내는 반년간 학술지 <시민과 세계> 최근호(2004년 상반기)가 주제기획 ‘시민정치, 국민, 그리고 세계시민’에서 이 거대담론을 집중조명했다.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직시하면서 고수와 해체의 안이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을 모색해보자는 의도다. 다양한 소주제를 다룬 10편의 논문이 실려있지만 대안은 대체로 국가에 의해 호명된 ‘국민’의 자리에 개별적 다양성과 보편적 연대성이 조화된 세계사회의 ‘시민’을 위치지워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은 ‘민족과 서로주체성’이란 글에서 주체성 개념의 외연을 ‘개인’에서부터 ‘가족’, ‘민족국가’, 나아가 ‘세계시민’으로 확장시킨다. 그는 “민족주의란 특정한 이데올로기이기 이전에 그 속에서만 자기를 하나의 민족주체로 정립하게 되는 현실적 자기인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민족 주체성이 개인들의 주체성 실현이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참된 의미의 주체가 아니며, 민족 역시 개인을 노예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낱낱의 주체들이 자기주체성을 잃지 않는 공동체의식으로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개인을 수동적 객체로 전락시키는 현행 국정교과서의 민족주의와, 주체를 개인 차원에서만 국한해 사유하는 탈민족주의 담론은 서로주체성과 대립되는 홀로주체성의 극단적 양태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