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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영화 배우 조진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위촉

2015년 8월 9일 1232

[보도자료] [다운로드] 영화 <암살> 배우 조진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위촉 ▲ 영화 <암살>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추상옥(일명: 속사포)으로 열연하는 조진웅 ⓒ 케이퍼필름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 동원을 앞둔 가운데 영화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추상옥 역을 맡은 배우 조진웅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홍보대사로 위촉된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무장투쟁 기지로서 3,500여 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김대락 등 항일애국지사들이 경술국치를 당한지 1년도 안된 1911년 6월 10일 중국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로 시작했다. 일제와 중국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강습소’란 이름을 달았지만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갖은 역경을 뚫고 1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전사들을 길러냄으로써 항일운동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겼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은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독립전쟁에서 기간요원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무훈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조선혁명군·의열단·한국독립군·고려혁명군·한국광복군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해방 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유지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1945. 9. 17 중경 연화지청사 앞에서) ⓒ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 관련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독립운동 전공 연구자들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높은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2011년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www.sh100th.org)는 최근 조진웅 씨가 영화 <암살>에서 혼신의 연기를 통해

‘암살’이 상기시켜준 친일영화 이야기

2015년 8월 9일 1111

  “해방될 줄 몰랐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들은 대사였다. 어떻게 변절할 수 있냐는 질문에 해방될 줄 몰랐으니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어르신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들어본 적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다고. 패전 소식은 충격이었다고. 물론 이러한 상황 판단이 반드시 영화 속 인물처럼 친일적 행보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필자가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어르신들은 1920년대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인데, 대부분 해방 직전 시기에 학생이었다. 그분들의 기억에 따르면 학교에서 늘 틀어주는 뉴스영화, 문화영화 등을 통해 전쟁 소식을 접했고, 뉴스 내용대로 당연히 이기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해외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통제 하에 제작되는 신문과 라디오 뉴스, 뉴스영화 등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일본의 승전을 예상하고, 동시에 해방은 점점 가망 없는 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 중인 영화들 중에는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들도 있다. VOD 서비스로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들을 보면, 일본군은 전쟁에서 점령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고, 온 국민들은 기꺼이 참전하거나 허리띠를 졸라 매며 동참하고 있다. 쌀과 금비녀 등을 기꺼이 내놓으면서. 오늘은 당시 영화, 영화인들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며 ‘친일 영화인’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41년 일본이 제2차

영화 “암살” 설민석의 스페셜 인강

2015년 8월 9일 734

☞2015. 8. 4. 영화 [암살] 설민석의 스페셜 인강 ☞2015. 8. 1 접속! 무비월드_기획: 〈암살〉 그 역사 속으로

“친일청산은 현재 진행형…광복은 통일로 완성해야”

2015년 8월 7일 750

[파워인터뷰]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권: 교수님 반갑습니다. 혹시 영화 <암살>을 보셨나요? 윤: 예. 봤습니다. 아주 잘 만들었더라고요. 최근에 자주 영화를 보진 못하지만 마침, <암살> 내용이 신흥무관학교와 관련 있다고 해서 그쪽에서 시사회에 참석을 청을 받아서 우리 같이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 신흥무관학교와 관련된 분들, 독립 유공자 분들, 후손들이죠. 이렇게 같이 봤습니다. 신흥무관학교, 3천여명의 독립군 양성 권: 지금 말씀하셨는데, 교수님께서는 신흥무관학교 기념 사업회 상임대표신데요, 영화 암살덕분에 이 학교가 유명해졌습니다. 신흥무관학교, 간단하게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윤: 우리가 1910년 8월에 일본에 병합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니깐 거기에 울분을 분개한 뜻 있는 애국자들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특별히 이회영 6형제, 이 분들은 서울에서 많은 재산들을 다 처분하고 만주로 독립운동 양성을 위해 갔고. 또 하나는 경상도 안동에 석주 이상룡선생을 중심으로 일가족, 친척들이 대거 망명을 합니다. 그래서 길림성 삼원보라는 곳에서 향후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을 위해서 학교를 세우는데, 처음에는 경학사라고 했다가 왜냐면 중국에서 처음부터 무장 독립군을 세운다고 하면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이 나중에 신흥 학교, 신흥 중학교 그랬다가 1919년 3·1운동이후 본격적으로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꿔서 당시 기록에 보면 3000-3500명의 항일 독립군을 양성을 했죠. 그 짧은 기간이었지만은 3개월, 6개월짜리 단기간으로. 그래서 그분들이 잘 아시듯이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싸움. 이런데 일본 대군을 상대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신흥무관학교에서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1부 ‘친일후손 1177′

2015년 8월 7일 1568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1부 ‘친일 후손 1177’ 뉴스타파는 해방 70주년을 맞아,1948년 반민특위의 좌절 이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친일청산의 문제 등을 집중 조명하는 6편의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 편성 방송합니다. ‘친일과 망각’ 4부작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을 추적해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고 직업은 무엇인지, 특히 친일문제와 친일파로 공인된 선대에 대한 의식은 어떤지 조사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추정해왔던 친일파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인구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기사 보기   ※ 함께보기 – 상식과 정의를 향한 기록,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간의 대장정  

충북 음성지역 “1급 친일 작가 이무영 생가터.작품비 철거” 여론 확산

2015년 8월 7일 874

충북 음성군이 관리하고 있는 음성읍 석인리 1급 친일작가 이무영(1908년~1960년) 생가터 및 작품비, 유품 등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역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 생가터는 지난 2006년 음성군이 매입해 문화관광시설로 관리했다. 군은 다양하게 이무영 기념사업(무영제)을 지원하다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1급 친일 작가로 그의 적나라한 친일행적이 공개된 이후 2012년부터 예산지원을 중단하고 그의 이름을 붙였던 도로(무영로) 이름을 바꿨다. 이무영은 대표적 농민문학가로만 널리 알려져 음성지역 문학인들의 지지를 받아 1985년 이무영 작품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또 1994년부터 2012년까지 군의 예산 지원을 받아 충북의 일간지 A사와 음성예총이 해마다 무영제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2006년 생가터에 이무영 흉상이 세웠졌고 2007년엔 이무영 작품비가 건립됐으며 2010년에는 음성읍의 지원으로 음성읍 석인2리 생가마을(오리골) 입구에 ‘농민문학가 이무영선생 생가마을’ 표지석이 들어섰다. 지난 2012년 이후 군에서 예산 지원을 받지 못한 무영제는 이무영의 유족들이 수년째 자비를 들여 해마다 A언론사와 농민 문학인들이 생가터에서 개최하고 있고 무영문학상도 16회 동안 시상하고 있다. 당시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민족진영 작가였지만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서 친일로 변절한 것이 아니라 이무영은 성장과정부터 ‘철저한 친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꾸준한 문학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정책을 선전하면서 일제에 적극 협조.가담했다. 특히 이무영은 조선에서 최초로 일본어로 쓴 소설 ‘청기와집’을 발표해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했다. 이무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 전까지 추앙받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성군 출신 농민문학가였다. 이상정 음성군의원은 “대표적인 친일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1부 ‘친일후손 1177′

2015년 8월 7일 642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1부 ‘친일 후손 1177’ 뉴스타파는 해방 70주년을 맞아,1948년 반민특위의 좌절 이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친일청산의 문제 등을 집중 조명하는 6편의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 편성 방송합니다. ‘친일과 망각’ 4부작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을 추적해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고 직업은 무엇인지, 특히 친일문제와 친일파로 공인된 선대에 대한 의식은 어떤지 조사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추정해왔던 친일파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인구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기사 보기   ※ 함께보기 –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의 역사

분단 70년 극복과 새로운 동아시아를 위하여

2015년 8월 6일 656

[알림] ‘광복 70돌,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 토론회 개최 광복 70돌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남북을 둘러싼 한반도는 갈등과 대립의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여기에 2차대전 패전국이자 한국을 식민지배했던 일본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틈타 ‘전쟁범죄국가’라는 꼬리표를 떼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의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복 70년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들 방안을 모색하고자 ‘광복 70돌, 6.15공동선언 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에서는 오는 10일(월)부터 12일(수)까지 총 세 차례에 걸친 연속 토론회를 마련했습니다. 첫날인 10일 오후 3시에는 ‘남북관계 언론보도 이대로 좋은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언론학 박사인 김춘효 언론노조 정책위원과 정치학 박사인 이용마 MBC 해직기자가 대표 발표를 맡았습니다. 이외에 심영섭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강사, 김정환 KBS 기자, 장용훈 <연합뉴스> 북한전문기자,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추혜선 언론연대 정책위원장 등이 토론자로 참석합니다. 둘째 날인 11일 오후 2시에는 ‘일본의 역사 왜곡, 군국주의 부활과 대응 방안’을 주제로 한국노총, 민주노총, 민족문제연구소, (사)평화디딤돌이 함께하는 광복 70돌 기념 합동토론회를 가집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일본역사왜곡과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점’을, 장완익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한일협정 50년 체제의 반성과 새로운 관계설정’을,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소장이 ‘정부 대일정책 평가와 과제’를 주제로 각각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후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강제노동 배상에 대한 ILO 권고안과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윤명숙 충남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 전임연구원이 ‘일본군 위안부

광복절 앞두고 ‘천황폐하’…박근령, 망언 잔치 (8.5)

2015년 8월 6일 551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가 일본 영상매체 ‘니코니코’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관련 각종 망언을 쏟아냈습니다. 박근령 씨는 과거사와 관련해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발언하고, 일왕을 “천황폐하”라고 지칭했습니다. 한일 간의 민감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친일파의 딸 대통령에 이어 친일파 아들이 대권 주자라니

2015년 8월 6일 845

[김종철 칼럼] 친일파 후손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오는 8월15일은 광복(光復)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은 길고도 긴 세월이다. 그 기간에 겨레는 ‘광복’이라는 문자의 뜻 그대로 빛을 되찾고 살았는가? 일제의 무자비한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70년 동안, 1960년의 4월혁명 이후 한 해 남짓,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빼면 60년 가까운 세월의 대부분은 독재와 쿠데타, 지배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로 얼룩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강점당한 민중이 가장 열망한 것은 진정한 독립과 자주였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되는 현재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미군정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친나치행위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미군정은 오히려 친일분자들을 비호하고 중용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은 친일파나 그 후손이 득세해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대통령 박근혜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 ▲ 2013년 3월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장 입구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 초상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는 2005년에 나온 <나의 삶 나의 아버지>(동아일보사 펴냄)라는 책에 실린 글(‘아버지의 딸로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부모님을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