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민족의 수난에 분노하는 신여성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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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대구에 살았던 성명 미상의 스무 살 여성 일기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대구에 살았던 스무 살 여성의 일기다. 여자고등보통학교 5년생 이상으로 추측되는 주인공의 일기에는 주로 하루의 일과나 감상, 독서에 대한 소감과 자신의 습작 시나 소설이 담겨 있어 일기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일기를 통해 토로한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어 모두 기뻐할 때도 그녀는 전국이 엄청난 수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시기에 같은 민족의 올림픽 1등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일장기를 가슴에 단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에 울분을 토한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일등을 했지만 수해로서 이재민이 막심한 이때 그렇게 떠들 것이 무엇이냐. 하지만 우리의 마라토너의 등 뒤에 일본기가 휘날린다 하니 망국 백성의 비애를 더욱 느끼게 하는구나. 일본의 식민지인 것을 세계 각국에 재인식시키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이무리들아! 하늘을 우러러 목이 터지도록 호소라도 하여 볼까. 전날의 영광이 이 날의 치욕이 되니 억울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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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8월 병자년 대홍수 기사. 동아일보 193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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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입상한 세 선수(왼쪽부터 남승룡, 손기정, 하버). <동아일보> 1936.8.25.

그리고 폭우로 생긴 수재로 고통 받는 조선인을 안타까워하며, “온갖 쓰라린 낙인을 약소민족의 가슴에 무수히 찍어놓고도 무엇이 부족하여 인제 통틀어 이무리들을 삼키려 하느냐”라며 무심한 하늘을 보며 비에다 호통을 친다. 이처럼 그녀의 민족적 감수성은 예리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올림픽 입상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훈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두 선수의 입상을 보도한 당시 조선중앙일보 호외 뒷장에 다음과 같은 시를 즉흥적으로 썼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새기고 달리기는 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저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으며 그들의 우승은 곧 심훈의 가슴에 맺혀 있는 울분을 터트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백림(伯林) 마라톤에 우승한 손(孫) 남(南), 양군에게

                   심 훈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장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의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손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데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이제도 이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 부를 터이냐!”

– 1936.8.10. 새벽 신문 호외 이면에 쓴 절필
<그날이 오면> 심훈 시가집 친필 영인본-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검열판. (맥, 2013)

식민지 조선이 해방을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이 가로막혀 분단국가로 이어온 지 약 70년이 되었다. 폐허의 땅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분단의 아픈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다행히 이번 올림픽에 극적으로 북한이 동참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계기로 하여 가슴에 ‘KOREA’를 새기고 남북이 하나 된 통일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떨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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