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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연극 ‘짐’-악몽같은 과거…내릴 수 없는 짐-경향신문(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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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연극 ‘짐’-악몽같은 과거…내릴 수 없는 짐



짐이 온다. 보낸 사람도 받은 사람도 ‘당신의 것’이라 우기는 짐이다. 풀어헤쳐 내용물을 확인하든지 어디로든 버리면 될 것을 그들은 굳이 승강이를 하며 짐을 주고 받는다. 사람들이 질긴 고집을 부리는 사이, 짐은 주인 따위는 누구라도 상관 없다는 듯 무대 한가운데 흉물스럽게 앉아 있다.

6년 전 연극 ‘배장화 배홍련’으로 호흡을 맞췄던 작가 정복근과 연출가 한태숙이 연극 ‘짐’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풀어본 짐 안에는 과거에서 현대로 던져진 짐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절필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6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았던 정 작가는 1945년 8월24일 부산항으로 향하던 일본 배가 갑자기 폭발한 ‘우키시마호 사건’을 소재로 들고 나왔다.

당시 우키시마호에는 일본에 강제징용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던 조선인들이 타고 있었다. ‘고의적 폭발’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으나 원인은 아직까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사망자가 524명이라고 공식 발표했지만 유가족들은 당시 승선자 수만 70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어둡고 끔찍한 과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극은 관객의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다. 그래서 덜 불편하지만 더 섬뜩하다. 70분 동안 흐르는 긴장감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극은 과거와 현재, 이중구조로 나뉜다. 일본인 요시코와 한국인 김윤식은 짐과 함께 주고 받은 편지를 읽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관객과 눈높이를 맞춘다. 우키시마호 사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과거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관객들도 극에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의 존재 때문이다.

선거를 앞둔 지역 정치인 윤식은 이미지 관리를 위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할머니는 요양원도 마다하고 “너한테 딱 달라붙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내는 할머니를 모시는 걸 거부하며 집을 나갔다.

한편 어릴 적 바다에서 주워온 짐 때문에 할아버지가 환영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것을 보아온 요시코는 과거와 단절하고자 몸부림친다. 태어나기도 전의 일 때문에 대를 이어 고통 받는 일이 억울하기 때문이다. 윤식에겐 현실에서 짊어져야 할 짐이 더 무겁고, 요시코에겐 되풀이되는 악몽 같은 과거가 짐스럽다. 건조하고 차가운 대사가 가진 힘이 극중극(劇中劇)의 형식 속에서도 긴장감을 유지해 준다.

역사적 아픔을 보여주는 건 주변 인물들이다. 요시코의 할아버지는 배가 폭발할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도 조선인들을 말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안고 있다. 윤식의 할머니는 남편 대신 일본으로 징용 떠난 시누이의 편지를 몰래 감췄다. 그들에게 짐은 살아있는 과거이자, 도려낼 수 없는 기억으로 똬리를 틀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키시마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표현하는 유령들의 몸짓과 울음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몸에 짐처럼 엉키고 매달리다가 거칠게 내팽개쳐지기를 되풀이한다. 물속에 수장되는 장면과 혼백이 되어 절규하는 장면은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군무다.

유령 역의 배우들은 “7000명의 희생자를 6명이 대표한다는 부담감과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기 위해 에너지의 밀도를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높은 무대에서 뛰어내리고 구르는 탓에 배우들은 파스를 달고 살았다.

배에서 살아남지만 결국 자살하는 정화 역의 배우 하지혜는 어미새가 새끼새를 부르듯 비틀린 고음을 낸다. 그는 “정말 슬프면 토해내는 게 아니라 숨을 들이마시게 되지 않냐”며 “절규로 호소하는 것을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가 한태숙은 “극본을 읽고 나서 준엄하게 꾸짖는다든지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각자 생각하도록 하는 점이 좋았다”며 “꼭 한·일 문제가 아니더라도 익명의 시대의 책임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26일, 남산드라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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