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중음신(中陰身)으로 묶여있는 동안 ‘친일인명사전’ 편찬 모금운동은 범국민적인 지지를 얻고있다. 민족반역자를 역사적으로 심판하려는 보통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여의도의 두꺼운 돌집을 뚫고 철심장을 가진 비보통 ‘선량’들을 감동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 급한 것은 구속 동료 의원의 석방, 미국의 파병 요구에 냉큼 응낙하기, 자신의 섬지기 검은 돈은 원천 봉쇄하면서 다른 당의 됫박 돈이 구리다고 추궁하려는 청문회, 개혁 정책을 물 타서 식은 죽 만들기, 그리고 가장 간절한 오, 17대 국회에 개선장군처럼 ‘선량’으로 복귀하려는 야망이 아니던가.
우리 보통사람들, 이만큼 속아줬으면 됐다. 이제 불과 두 달 앞이다. 아마 다다음 주면 우리 앞에 고개 숙이고 온갖 감언이설, 조삼모사로 등장할 터이다. 제발 더는 속지 말자.
대체 누가 일제잔재 청산을 반대하는가. 어떤 개혁이든 강력한 반대자는 그로 인하여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인 게 세상의 기본 이치인지라 이 쟁점도 예외는 아니다. 이해 관계가 명백한 상대는 어떤 정당성이나 논리와 대의명분과 설득에도 움쩍 않는다. 친일반민족 행위자인 국민 전체의 0.0001%쯤이 이에 해당될까.
이 극소수의 반민 세력이 독립운동가, 강제 징용, 입대, 정신대, 부역, 공출 등등 일제의 직간접적인 희생자인 절대다수를 누르고 큰소리 칠 수 있었던 도깨비 방망이는 외세 의존과 분단과 독재와 군부통치라는 일제와 다를 바 없었던 강압체제였다.
이제 민주화 시대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던 질서를 바꿔야 한다. 그러자니 얼마나 억지스런 말들이 많겠는가.
그들은 떳떳하게 정면으로 나서지 않고 뒷켠에서 친일파라는 명칭이 틀렸다, 이미 흘러간 역사다, 전국민이 다 친일했다, 선각자의 비극이다, 강제에 의한 행위라 동정이 간다, 후손들에게 연좌제적 인권 침해다, 행위자의 사망으로 진실 밝히기가 어렵다, 정치적인 이용물이 되기 쉽다, 죄에 못지 않게 공로도 크기에 상쇄시켜야 한다, 국론 분열을 가져온다, 세계화 시대의 역행이다 등등 화려한 수사학을 동원하여 청산작업에 시비를 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법률안은 위에 든 온갖 방패막이 논리들 중 단 한가지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란 능동적으로 민족 다수에게 지대한 해악을 끼친 지도급 극소수의 인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립이 두려워 국민 모두가, 그때 살았던 우리 조상 누구나 다 친일행위를 했다고 머리 꼬투리라도 끌고 들어가려는 물귀신 작전을 전개한다. 이어 친일파 청산을 낡은 이데올로기의 무딘 칼로 ‘빨갱이’라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일제 침략자들과 합세한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했던 수법 그대로다.
안타까운 건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모르는 젊은 세대의 일부가 무의식적으로 천진하게 친일파 옹호론의 논리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청산하는 건 좋으나 다만’이라고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논리 뒤에는 어김없이 위에 든 여러 조건들을 거론하면서 슬그머니 제어장치를 밟아대는 게 방해의 단초다.
일제 잔재 청산은 논쟁거리도, 다수 의결 사항도 아닌,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제대로 된 독립국가라면 당장 실현했어야될 절대절명의 과업이다. 어떤 이유나 명분과 변명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이제까지 못 한 걸 통회하는 게 순국선열에 대한 살아남은 국민의 도리다.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반드시 국가 차원의 법률적 대응과 민간차원의 연구가 결합되어야 하는데 그게 국회 계류 중인 법률안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다. 두 과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국민적 지지가 다져지기를 기대한다.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402/h200402171805442406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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