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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4 하와이 교민사회의 갈등과 일본군함 ‘이즈모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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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점4 하와이 교민사회의 갈등과 일본군함 ‘이즈모호사건’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1918년 하와이 법정에서 이승만이 박용만에 대해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운 위험한 인물’이라고 밀고하는 증언을 한 적이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당시의 주요 사료인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사’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오십년사>(김원용)에도 나오는사실이다. 이후에도 이승만이 다른독립운동가를 공산주의자등으로 모함했다는 기록이나 증언, 연구도 있다.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국민회 재정문제를 둘러싼 이승만세력과 반이승만세력의 법정 분쟁이 계속되던 1918년 2월 27일, 이승만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백년전쟁>은 이러한 내용을 피해 당사자인 박용만의 1918년 3월 19일 ?시국소감?과 <신한민보>(1918.6.27)등 당시 사료에서 인용하여 적시했다. 정말 끔직한 발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 등은 1) 이승만은 법정 증인이 아니라 고발인 신분으로 출석하여 발언했으며, 2) 박용만의 국민군단이 해체된 것은 일본대사관의 항의와 그에 따른 미국정부의 압박에 따른 것이며, 3) 이승만을 반대하는 박용만, 김원용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1915~1936년간 하와이 법정자료? 또한 박용만과 김원용의 주장만을 반영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사료에 대한 일방적 폄하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어떠한 반증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과 활동했던 김현구는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라고 했다(<박용만 평전>). 서지학과 한국 관련 미국문서에 정통한 학자 방선주는 “FBI보고에는 또 1931년의 문서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박용만을 ‘일본 밀정’으로 중상 모략한 일이 있다”(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1989, 89쪽 참조)라고 했다.


1924년 가을, 안창호는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서재필에게 알려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교섭한 즉,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지도자가 안창호를 공산당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1923년 1월의 일본 정보문서 또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하였기에 안창호의 미국에서의 신용은 추락하였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조선총독부 경무국 ?상해정보(고경 제245호 : 1923.1.28)?, <일본외교사료관자료>) 이승만을 옹호하는 유영익조차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고 했다. 이러한 증언과 연구결과를 볼 때 ‘박용만에 대한 이승만의 모략’은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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