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진도 의신공립보통학교 국기게양탑 건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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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자료관 6]

진도 의신공립보통학교 국기게양탑 건립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축제일을 당하여 축의를 표하기 위하여 국기를 게양함은 신민 된 자의 본분이라. 그러하지마는 올봄에 소요가 있은 이후로부터 우리 조선사람 중 회사 혹은 은행을 제하고는 도무지 국기를 게양하지 아니하였도다.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이겠지마는 생각건대 이는 외부의 협박으로 말미암음이 가장 많도다. 이제는 소요도 진정되고 불령한 자들의 자취도 점점 없어져 가며 또는 저자들의 빙자하는 강화회의도 끝났도다. 그러하지마는 상금껏 축제일에 국기를 달지 아니하는 것은 신민 된 본분에 위배되었으며 동시에 국가의 큰 불상사일지라. 천장의 가절이 박두하였는 바 식자의 의견을 들을지어다. (이하 개별 의견 있음).

이것은 거족적인 삼일만세시위가 있던 바로 그해 가을, 『매일신보』 1919년 10월 30일자에 수록된 「국기게양문제(國旗揭揚問題), 천장가절이 목전에 박두해, 식자의 의견을 들을지어다」 제하의 기사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 당시에는 일장기에 대한 거부감이 확연히 강했던 탓인지 ─ 식민통치자들로서야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는 노릇이었을 테지만 ─ “조선사람들이 도무지 국기(일장기)를 게양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 9월 18일)의 국면이 되자 중대한 시국변화(時局變化)의 전개를 빌미 삼아 즉각적으로 국기 관념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동시에 이를 의무 게양하고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정책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점에서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1932년 1월 22일자로 이뤄진 정무총감의 통첩(通牒) 「국기게양방 여행에 관한 건(國旗揭揚方勵行ニ關スル件)」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에 있어서는 종래 왕왕 국기의 게양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필시 국기게양의 취지를 십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지적하고 우선 관공리들이 솔선수범하여 국기게양의 취지를 널리 보급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선지방 행정조직에서는 일장기 게양에 관한 관념을 크게 독려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방안들이 강요되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2년 2월 3일자에 수록된 「국기게양(國旗揭揚)에 대한 간담회(懇談會) 협의사항(協議事項)」 제하의 기사 관련보도를 보면, 경성부(京城府)와 같은 경우에는 국기게양 관련 정동총대(町洞總代) 대표자 간담회를 열어 다음과 같은 실천요강을 확정하기도 했다.

작보(昨報)한 바와 같이 경성부 주최로 국기게양에 대하여 2일 오전 11시부터 정동총대대표(町洞總代代表)가 간담회를 부청 회의실에서 열었었는데 협의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 미증유(未曾有)의 국가적 중대한 시국(時局)에 감(鑑)하여 국민정신(國民精神)의 작흥(作興) 및 존황애국(尊皇愛國)의 관념(觀念)을 환기하기 위하여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을 기(期)하여 국기게양의 철저적 여행(勵行)을 실현할 일.
  • 정동총대는 먼저 이첩(移牒)한 국기게양에 관한 정무총감(政務總監)의 통첩(通牒)의 취지를 매호 (每戶)에 철저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아직 국기를 소유(所有)치 아니한 자를 조사하여 차제(此際) 기(其) 구입을 설득할 것.
  • 정동총대는 기 정동(其 町洞)에 재(在)한 국기구입 희망자를 모아 공동구입(共同購入)의 편익을 여(與)하도록 특(特)히 주선할 일.
  • 부(府)는 부내 황금정 3정목 오쿠보 기점(大久保旗店)에 교섭하여 좌표(左表)와 여(如)히 특가(特價)로 다시 특별 할인케 할 것.
  • 국기게양이 권설독려(勸說督勵)에 대하여 최기(最寄)의 경찰관파출소(警察官派出所)의 원조협력을 구할 일.
  • 국기게양의 대운동(大運動)을 전부(全府)에 일으켜 각 단체의 협력응원을 구하고 일제히 활동을 개시할 일.
    (1) 부관계 각 학교를 통(通)하여 생도(아동)의 가정에 격려 권유할 것.
    (2) 정동총대, 방면위원(方面委員)을 통하여 격려할 것.
    (3) 경찰관을 통하여 독려할 것.
    (4) 동민회(同民會), 청년단(靑年團), 재향군인회(在鄕軍人會), 기타 교화단체(敎化團體)를 통하여 장려할 일.
  • 국기게양에 관한 제주의(諸注意)를 철저케 할 것
    (1) 국기게양의 방법 및 주의를 줄 것.
    (2) 국기의 보존법(保存法) : 국기를 보존함에는 간(竿)과 기(旗)를 따로 떼어 정녕(叮嚀)히 접고 타 물품과 혼효(混淆)치 말며 필(必)히 일정한 상자나 주머니에 넣어 청정(淸淨)한 곳에 치(置)할 일.

이를 계기로 서울 시내 각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걸쳐 관공서, 신사(神社) 등지와 각 마을 단위로 국기게양탑이 잇달아 만들어지는 등 그야말로 일장기의 광풍이 휘몰아치게 되었다. 조선신궁(朝鮮神宮) 영역에 속한 남산 정상에 대일본국기선양회 조선본부의 오쿠보 마사토시(大久保眞敏)가 헌납한 ─ 110척(尺) 높이의 쇠기둥에 가로 27척, 세로 18척 넓이의 일장기를 내건 ─ 거대한 국기게양탑(1932년 7월 11일 준공)이 솟아오른 것도,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의 육상경기장 귀빈석 정면에 타치바나철공장(立花鐵工場)에서 기부한 50척(尺) 높이의 국기게양탑(1932년 9월 1일 준공)이 등장한 것도, 모두 이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관한 흔적을 뒤지다 보니 경북도회의원과 중추원참의를 지냈고 국방헌금과 비행기 및 군함헌납을 주도하여 이른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칭호를 얻은 문명기(文明琦, 1878~1968)도 이러한 국기게양탑 기증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난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신문』 1933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문명기(文明琦) 씨 기부(寄附)의 국기게양대(國旗揭揚台), 18일 게양식(揭揚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영덕(盈德)] 영덕 관선 도회의원(官選 道會議員) 문명기 씨는 앞서 영덕군청(盈德郡廳) 청전(廳前)에 철골(鐵骨) 80척(尺), 경찰서(警察署)의 종루대(鍾樓台) 위에 30척(尺)의 국기게양대(國旗揭揚臺)를 기증(寄贈)했다. 이것의 게양식을 오는 18일 만주사변 기념일(滿洲事變 記念日)에 관민유지(官民有志)의 참렬을 구하여 거행할 예정이다. 또한 오는 23일의 추계황령제(秋季皇靈祭)에는 각 관청측과 더불어 지방공직자, 유지 일동을 초대하여 일대간친회(一大懇親會)를 연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기게양탑의 설치대상공간으로서 학교(學校) 역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32년 이후 각종 신문지상에는 소학교, 보통학교, 중학교 등을 가리지 않고 국기게양탑의 헌납, 기증, 기부와 관련한 미담기사(美談記事)가 곧잘 등장하곤 했다. 이 경우에 대개 철탑(鐵塔) 형태의 — 간혹 기존의 나무기둥 게양대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 국기게양대가 세워지며, 또한 도지사와 군수, 기타 관민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성대한 국기게양식을 벌이는 광경을 담은 보도사진도 함께 곁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 총독부 학무국의 관변단체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에서 펴낸 기관지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을 뒤적이다가 전남 진도군에 자리한 의신공립보통학교(義新公立普通學校; 1923년 5월 15일 설치인가, 1923년 12월 1일 개교) 교정에 국기게양탑이 들어서게 된 내력을 적은 이색적인 글 하나를 보게 되었기에 그 내용을 여기에 소개하여 두고자 한다. 또한 그 무렵에 우연찮게도 어느 경매사이트에 매물로 나온 어느 시골학교 교정에 일장기가 펄럭이는 사진 한 장도 입수하게 되었는데, 그 뒷면에 ‘의신교(義新校)’라는 메모글씨가 남아 있어서 여기에 포착되어 있는 국기게양탑이 위에 글에서 소개한 바로 그 게양탑이라는 사실도 퍼뜩 간파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국 곳곳에 속출했던 국기게양탑은 그 자체가 침략전쟁의 표상이자 결과적으로 끝 모를 고통을 가져다준 강제동원의 역사를 예고하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카도소노 히카리(門園光, 전남 의신공립보통학교장), 「향토애(鄕土愛)에 불타는 기특자(奇特者) 강상률씨(姜相律氏)」, 『문교의 조선』 1936년 3월호, 148~149쪽
진도군 의신공립보통학교(珍島郡 義新公立普通學校)에서는 일작년(一昨年, 재작년) 12월에 개교 1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스키마루타(杉丸太, 삼나무 통나무)로 높이 15미(米, 미터)의 국기게양탑(國旗揭揚塔)을 건설했었는데, 금회(今回) 교하출신(校下出身)으로 현재 목포부 사쿠라마치(木浦府 櫻町) 아사히철공소(朝日鐵工所) 경영주 강상률 씨(姜相律氏)가 당교(當校)에 자신의 손으로 제작한 견뢰(堅牢)한 철골(鐵骨) 국기게양탑(사다리 부착, 높이 15미터), 평가(評價) 150원짜리를 기증(寄贈)하여 당교에서는 현재 건설공사중이다.
강상률 씨는 지난 10월 요용(要用, 볼일) 때문에 귀향(歸鄕)하던 기회에 2, 3인(人)의 벗과 더불어 카도소노 교장댁(門園 校長宅)을 방문하여 이르기를, “나는 현재 목포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가끔 귀향할 때마다 매번 상기(想起)한 것이 있습니다만, 이번 학교의 정문(正門)에 철비(鐵扉, 철문)를 제가 제작하여 달아 드리려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교장은 만면(滿面)에 기쁨을 머금고 천천히 말하길, “철문도 필요한 물건입니다만, 아시는 바와 같이 근일중(近日中)에 구교사(舊校舍)의 개축공사(改築工事)가 실현될 것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준공의 날에는 당연 현재의 국기게양탑 위치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신 바와 같이 썩기 쉬운 통나무라서 … 약간 무리인가도 생각합니다만 시국(時局)에 맞게 반영구적(半永久的)인 철골 국기게양탑을 바라고 싶습니다. 이것이 본교 현재의 사정으로 추구(追究)하여 가장 적절하며, 게다가 귀방(貴方)으로서도 썩지 않는 유의의(有意義)한 기념사업이라고 사료됩니다. 어떻겠습니까?” 이와 같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4, 5인이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결정되었다. 모교(母校)도 아닌 당교(當校)에 이러한 진정(眞情)은 즉, 애향심(愛鄕心)의 현현(顯現) 바로 그것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 사치췌택(奢侈贅澤)으로 흐르기 쉬워 조선(祖先)에게서 물려받은 금만가(金滿家, 큰 부자)마저도 사회공공방면의 물적기부(物的寄附)는 혐염(嫌厭)하는 이러한 세상(世相)에 자발적 기부를 자청한 그의 기특한 행위가 일반에 일대충동(一大衝動)을 주고 있다.
금차(今次)에 그의 경력(經歷)을 적어보면, 본인(本人)은 명치 34년(1901년) 3월 5일에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全羅南道 珍島郡 義新面 玉垈里) 강국삼(姜國三) 씨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지금이야말로 연령 35세의 장년실업가(壯年實業家)로서 2만 원(圓) 이상의 자산을 가진 다행자(多幸者)로 일컫겠는데, 그 옛날 무기력했던 유소년시대(幼少年時代)부터 지금에 이르는 과거의 도정(途程)은 역경(逆境)에 더하여 불운(不運)하여, 참으로 눈물겹도록 비참한 생활을 겪어왔다.
그의 가정은 당시 적빈(赤貧)하기 짝이 없어서 실로 참혹한 생활이 지속되어 본면(本面) 안에서는 물론 인면(隣面, 옆면) 또는 인군(隣郡, 해남군)까지도 유랑의 이사를 계속한 것이 수년(數年), 그는 가까스로 8세 때 여로(旅路)의 해남군에서 아버지와 사별하였다. 그로부터는 일층 빈고(貧苦)와 다른 것에 비할 도리가 없이 어머니 한 사람의 힘으로 그날 그날을 어머니에 이끌려 걸식(乞⻝)과 같은 생활을 꾸렸으나 그는 나이가 어리고 힘도 약하여 어떠한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어머니에 매달려 형제(兄弟) 두 사람은 겨우 목숨을 보존해 왔다. 그는 날 때부터 온후(溫厚) 착실(着實) 근면(勤勉)하여 효심(孝心)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점차 철이 들어감에 따라 하루라도 안여(晏如)하게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겨우 13, 4세 무렵, 지우(知友)는 모두 서당(書堂)이랑 학교(學校)로 수학(修學)에 여념이 없었지만 타인(他人)의 집에 고용되어 일가(一家) 세 사람의 생계(生計)를 지탱하여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계속한 것이 6년간으로, 20세의 봄[대정 9년(1920년) 3월]을 맞이하여 그는 드디어 목포(木浦)로 출가(出稼, 타지로 나가 벌이를 하는 것)를 결의하여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겨우 12원의 여은(旅銀, 여비)을 만들어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목포로 건너와 목포부내 모(某) 철공장(鐵工場)에 일고인(日雇人, 날품팔이)으로서 일급(日給) 80전(錢)에 고용되어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한 것이 2년, 그 다음해부터는 동생(당시 14세)과 함께 동(同) 공장에서 일하는 상태가 되면서 점차 저축(貯蓄)도 가능해져 5년째에 약 2천 원의 저금(貯金)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이가 24세, 그리하여 향리(鄕里, 진도군 의신면)로 돌아와 결혼(結婚)을 하였는데 처(妻)는 그대로 친정에 맡겨두고 또 단신(單身)으로 목포로 건너와서 동 철공장에서 약 3년간을 일하여 상당한 자본(資本)이 출래(出來), 자기독립의 영업을 마음먹고 동 공장을 나왔으며, 향리로부터 처를 불러들이고 전직(轉職)한 것이 두 차례, 소화 6년(1931년, 31세 때) 목포부 사쿠라마치 모(某)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경영의 철공소(鐵工所)를 연부불(年賦拂, 몇 해로 나눠 해마다 갚는 것) 계약으로 양수하여 동생과 더불어 경영하는 상황이 되었다.
형은 훌륭하게 동생을 이끌고 역시 동생은 능히 형을 공경하며 참으로 형제 관계도 친밀한데,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던 그는 야간(夜間)의 짬을 이용한 것 치고는 독학(獨學)에 여념이 없었고, 국어(國語, 일본어)도 상당히 알아들으며 각고면려(刻苦勉勵)를 계속한 결과, 금일에는 각 방면에 신용을 넓혀 기계기구(機械器具)의 제작수선(製作修繕)의 주문이 쇄도하여 여러 명의 직공(職工)과 더불어 땀을 흘리게 되었고 1년 중에 거의 휴양일(休養日)조차도 없이 바삐 움직이며 일하고 있다. 현재는 향리에 답(畓, 논) 100두락(斗落, 마지기), 전(田, 밭) 50두락가량을 사들여 연년세세(年年歲歲) 그 자산은 증가되어 일가(一家) 단란한 행복으로의 일로(一路)를 걸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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