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마당]
“학살자가 국가유공자 둔갑 웬말?” 분노의 ‘4·3버스’
한요나 후원회원, 시민기자
2026년 1월 14일, 제주에서 육지로 향하는 ‘육지로 가는 4·3 버스’가 운행을 시작했다. 참가한 100여 명의 시민은 왕복 1000km에 달하는 경로를 따라 역사정의를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번 답사는 제주 4·3 당시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박진경 대령이 지난해 11월, 국가보훈부에 의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추진되었다. 소리소문 없이 진행된 이번 지정은 제주 4·3의 역사적 성격과 제주도민들이 겪은 상처를 다시금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의 주도로 결성된 답사단에는 제주 4·3 유관 단체를 비롯해 역사학자, 4·3 유족회,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국가보안법 피해자와 세월호 활동가 등 다양한 시민단체와 문화예술인 100여 명이 가세하며, 여정은 왜곡된 성역으로 둔갑한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역사연대의 장으로 전개되었다.
뒤틀린 과거사 청산: 학살 주범이 유공자로 부활한 모순
이번 답사의 출발점은 ‘역사정의’의 회복에 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제주 4·3 당시 미군정에 의해 발탁되어 진압작전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부임 직후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위협에 그치지 않고 이후 전개된 혹독한 양민 학살 작전의 지침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박진경의 부임은 4·3의 전개 양상을 ‘치안 유지’에서 ‘양민 학살 작전’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지점이었다. 그는 부임 한 달 열흘 만에 약 6천여 명의 도민을 무차별 검거하며 초토화 작전을 자행했다. 검거된 이들 중 상당수는 정식 재판 절차 없이 육지 각지의 형무소로 압송되어 행방불명되거나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이러한 인물이 70여 년이 흐른 오늘날 ‘국가유공자’라는 명칭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국가 정체성과 과거사 청산의 원칙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국가권력의 구조적 폭력: 미군정과 초토화 작전의 실체
제주 4·3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고조된 제주도민의 저항이 1948년 4월 3일을 계기로 폭발한 사건이다. 당시 미군정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앞두고 제주를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아 유례없는 탄압을 전개했다. 박진경은 이 과정에서 미군정의 냉전 논리를 현장에서 가장 충실히 수행한 대리인이었다.
박진경의 진압 논리는 비인간적이고 극단적이었다. 섬 전체를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모든 이를 폭도로 간주해 사살하겠다는 ‘초토화’ 방식을 주장했다. 이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국민을 학살 대상으로 삼은 명백한 국가범죄다. 사료에 따르면 박진경은 어린이와 노인조차 폭도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형을 방조하거나 직접 명령했다. 특히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는 15세 소년을 보고도 “폭도의 자식”이라며 사살을 명한 사례는 당시 작전의 광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답사단이 찾은 여순 10‧19 역사관은 이러한 박진경식 초토화 작전에 대한 군 내부의 ‘양심적 저항’을 보여준다. 당시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동족을 학살하라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한다”며 봉기했다. 박진경의 ‘섬멸’과 14연대의 ‘학살 거부’는 동일한 시대에 국가폭력 앞에서 군인이 택할 수 있었던 상반된 두 길을 상징하며, 오늘날 우리 국가와 군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은폐된 진실: 남해의 왜곡된 동상과 대전 골령골의 기록
답사단이 경남 남해 앵강공원에서 마주한 박진경의 동상은 학살범 미화와 역사기만의 상징물이었다. 철모를 쓰고 망원경을 든 동상 뒷면에는 “공비 잔당 소탕 중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이와 다르다. 박진경은 한국전쟁 전사자가 아니며, 1948년 6월 18일 부당한 학살 명령에 항거한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처단당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미군정기에 사망한 그에게 1950년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된 과정 역시 석연치 않으며, 공적서 조작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어 방문한 대전 산내 골령골은 제주 4·3의 비극이 육지에서 어떻게 처참하게 마침표를 찍었는지 증언하는 현장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4·3 관련 수형인과 보도연맹원 수천 명이 이곳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거대한 공동묘지가 된 골짜기에서 ‘육지로 가는 4·3 버스’ 답사단은 켜켜이 쌓인 유골들의 한을 절감했다. 골령골 해설 전문가 임재근 박사는 유해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대신 행정 편의적으로 화장 처리하려는 국가의 행태를 “증거를 인멸하려는 수작”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천안 조병옥 생가 역시 학살 가해자가 어떻게 ‘건국영웅’으로만 기술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은 박진경과 함께 4·3 학살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받지만, 그의 생가 안내문에는 제주 4·3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누락되어 있었다. 답사단은 시민단체가 세운 ‘역사 바로잡기 안내판’을 확인하며 가해자 찬양 위주의 기념시설이 후대의 역사관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성토했다.
역설의 성역: 현충원에 잠든 가해자와 고양의 기록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답사단은 국가의 영웅들이 안장되어야 할 이곳에 자리한 박진경의 묘역을 찾아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현재 현충원에 안장된 가해자들에 대해 그들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세력들이 과거의 망령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김학규 소장은 최근 12‧3 내란 사태를 언급하며, 헌정질서 파괴자와 학살자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을 거쳐 어떻게 애국자로 둔갑해 국립묘지에 안착했는지를 조목조목 짚었다.
답사의 마지막은 박진경을 처단했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의 처형터(경기 고양 용두동)였다. 이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4·3 학살을 멈추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고, 정부 수립 후 첫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제주 작가회의 소속 김진숙 시인이 4·3 위령시를 낭송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희생된 이들의 명예회복이 진정한 역사 바로잡기의 일환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과제: 왜곡된 역사에 맞서는 ‘기억의 전쟁’
이번 1박 2일의 장정은 100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 국가폭력에 맞선 거대한 ‘역사 연대’를 형성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4·3과 여순 학살의 주범들이 여전히 성역에 누워 영웅 대접을 받고, 그들의 과오는 은폐된 채 조작된 공적만이 남겨져 있다. 학살범들이 국가유공자로 추대되는 현실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 정의가 처한 취약한 실상을 보여준다.
이번 답사에서 확인한 가장 큰 교훈은 잘못된 역사는 스스로 바로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기득권과 결탁한 일부 세력은 과오를 덮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강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가해자의 서사를 미화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오염시킨다.
따라서 ‘육지로 가는 4·3 버스’의 대장정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답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역사 왜곡 세력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져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왜곡된 역사를 방치하는 국가에는 정의가 설 자리가 없다. 우리는 가해자 미화를 중단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되찾는 그날까지 역사 정의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가해자의 서훈 취소와 동상 철거는 정의로운 역사를 세우기 위한 시대적 사명이며,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우리의 버스는 가열찬 투쟁과 연대를 이으며 멈추지 않고 달릴 것이다
• <시민언론 민들레> 202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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