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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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9.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손기정 우승과 <마라손 제패가>

마라손은 마라톤이고, 마라톤은 또 마라손이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20세기 전반에는 마라손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 해방 전 조선 마라톤의 최대 경사를 꼽자면, 아무래도 1936년 베를린(Berlin) 올림픽에서 손기정(孫基禎)이 우승한 일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손기정이 1위를 기록한 것에 더해 남승룡(南昇龍)도 3위 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실로 조선 건각(健脚)이 온 세상을 호령한 시절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 9일에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은 당시 세계 최고기록인 2시간 29분 19초로 우승했고, 남승룡은 2분 남짓 뒤져 3위가 되었다. 광복을 이루기 전이었기에 두 선수는 일본 대표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일본은 금, 은, 동메달을 각각 6, 4, 10개 획득해 종합 8위에 올랐다고 한다. 유럽이나 북미 지역을 제외한 베를린 올림픽 참가국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4년 뒤 1940년에는 도쿄(東京)에서 하계 올림픽, 삿포로(札幌)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베를린 올림픽의 성적, 특히 마라톤의 우승은 다음 대회 개최국 일본의 체면을 세우는 데 나름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紀元) 2600년’ 행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었던 1940년 올림픽은 중일전쟁 여파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조선인이었지만 일본 대표로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가슴팍에 일장기 선명한 운동복을 입고 시상식에 서야만 했다. 일본 국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상을 받는 것이 그저 기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손기정은 부상으로 받은 묘목을 들어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지만, 손에 든 것이 없었던 남승룡은 그럴 수도 없었다. 며칠 뒤 두 선수의 시상식 사진을 게재한 『조선중앙일보』(8월 13일자)와 『동아일보』(지방판 8월 13일자, 서울판 8월 25일자)는 운동복 일장기를 가리거나 문질러서 제대로 보이지 않게 했는데, 이것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커지기도 했다.

사건의 결과로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부터 휴간, 『동아일보』는 8월 29일부터 무기 정간을 당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라톤 우승 기념 노래를 만들고자 했던 『동아일보』의 계획도 허사가 되었다. <스포츠 조선 세계 제패가> 제목으로 9월 10일 까지 가사를 공모해 노래를 만들고, 이어서 음반 제작까지 추진할 참이었으나, 정간으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갔던 것이다.

『동아일보』의 계획은 그렇게 좌초하고 말았지만, 다른 경로로 진행된 작업에 의해 10월에는 마라톤 우승 기념 노래가 실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우선 월초에 태평(太平)레코드에서 <마라손 왕>을 발표했고, 이어 10월 25일에는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마라손 제패가> 음반이 나왔다. 당대 최고 인기 가수였던 채규엽(蔡奎燁)이 부른 <마라손 제패가> 음반 앞면에는 손기정이 직접 녹음한 소감 <우승의 감격>이 실려 기념 의미를 한층 더했다. 물론 그렇게 음반 제작이 이루어진 뒤에는 일본육상경기연맹 같은 ‘관계 당국’의 의도가 있기도 했다.

<마라손 제패가>
문예부 작사, 고세키 유지(古関裕而) 작곡, 채규엽 노래, 1936년 콜럼비아 40733

반도가 낳은 마라손의 두 용사 우승 빛나는 / 즐거웁다 이 날이여 기쁨으로 맞이하자 /
그 공적 크도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 찬양의 높은 소리 온 세상을 떨치누나
세계서 뽑힌 수십 맹장 하나둘 다 물리치니 / 즐거웁다 이 날이여 지은 기록 장하도다 /
월계관 차지한 손기정과 남승룡은 / 찬양의 높은 소리 온 세상을 떨치누나
하늘이 주신 팔다리의 굳세인 의지의 결정 / 즐거웁다 이 날이여 노래 맞춰 춤을 추자 /
그 영예 길도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 찬양의 높은 소리 온 세상을 떨치누나

<마라손 왕>은 가수의 지명도가 낮았기 때문인지 큰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마라손 제패가>는 당대에 그런대로 알려졌던 것은 물론, 수십 년 뒤 다시 음반에 실리기도 했다. 1976년 올림픽 레슬링에서 대한민국 최초 금메달이 나왔을 때 만들어진 기념 음반 <몬트리올의 금메달>에는 최희준(崔喜準)이 새로 녹음한 <베를린 마라톤 제패의 노래>로 실렸고, 1992년 올림픽에서 56년 만에 한국인의 마라톤 우승이 재연되었을 때 만들어진 기념 음반 <어머니 나는 해냈습니다>에는 채규엽의 노래가 그대로 수록되었다.

그런데, 1976년과 1992년 음반에 실린 <마라손 제패가>에는 작자 표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몰라서 못 한 것일 수도 있고 알면서 안 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만약 후자라면 아마도 작곡자 고세키 유지의 이름이 걸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의 올림픽 우승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음반에 일본인 작곡자 이름을 그대로 쓰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을 일이다.

1936년 <마라손 제패가> 음반에 고세키 유지의 이름이 적혀 있기는 했지만, 그가 손기정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곡을 썼던 것은 사실 아니다. 고세키 유지가 작곡해 1936년 7월 하순에 이미 발매된 <綠の大地(푸르른 대지)>라는 노래 곡조에 가사만 새로 붙인 것이 <마라손 제패가>이기 때문이다. 새로 곡을 만들지 않고 그렇게 기존 곡조를 가져다 쓴 이유 중 하나는 음반 제작 일정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계속 유럽에 체류하다가 한 달 넘게 걸린 배편으로 돌아온 손기정이 도쿄 콜럼비아레코드 스튜디오에서 채규엽과 함께 녹음을 진행했던 때는, 음반 발매를 불과 보름 정도 앞둔 10월 10일쯤이었다. 녹음부터 발매까지 유례없는 속도전이 다급하게 펼쳐졌던 셈이다.

음반이나 가사지에 적힌 <마라손 제패가>의 작사자는 문예부, 즉 콜럼비아레코드 경성 지점 문예부다. 하지만 실제 작사자는 문예부장을 맡고 있었던 시인 이하윤(異河潤)이었고, 이는 콜럼비아레코드 경성 지점에서 본사 공장으로 보낸 사내 문건을 통해 알 수 있다. <마라손 제패가>의 작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나, 일각에서는 설의식(薛義植)이 작사하고 구자명이 작곡했다는 엉뚱한 주장이 근거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다른 곳도 아닌 손기정기념재단에서 유독 그러고 있으니, 어쩌면 시대에 맞지 않는 무슨 콤플렉스라도 있는 것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손기정 녹음 <우승의 감격>과 <마라손 제패가>를 수록한 음반 발매를 알리는 <매일신보> 1936년 10월 21일자 광고.

10. 중일전쟁 발발과 <종군간호부의 노래>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北京) 시내 서남쪽에 있는 다리 노구교(盧溝橋)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병사 실종(이 아니라고 곧 판명되었지만) 사건이 또 발생했고, 사소한 그 불똥이 번져 8일 새벽부터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군대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났다. 1945년 8월까지 이어지며 양측에 막대한 피해를 남긴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사소한 불똥이라고는 했으나 전쟁 발발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충분히 예견된 바였다. 그때 그곳이 꼭 아니었더라도 언제든 불이 붙을 수 있었고, 일본군 입장에서는 없는 불똥을 부러 만들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6년 전인 1931년 9월 18일에 남만주철도 폭발 사건을 일으켜 다섯 달 만에 만주를 점령해 버렸던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의 전력(前歷)을 생각해 보면, 중일 간 전면전의 발발 또한 전개 방식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7월 8일자 신문 호외를 통해 당초 ‘노구교사건’으로 보도되었던 전투는 곧 ‘북지(北支)사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심상치 않은 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만주사변 때와는 사뭇 다른 전시 분위기가 날로 짙어졌고, 전쟁의 수렁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여러 변화가 조선 대중의 일상에도 생겨났다. 조선이라 해서 전쟁 수행에 열외가 될 수 없음을 알려준 노래, 군국가요가 그중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만주사변 이후 군국가요가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대중의 호응도 컸다. 예컨대, 1932년 1월에 일본군이 중국 상하이(上海)를 공격한 ‘제1차 상해사변’ 당시 순국했다는 ‘육탄 3용사’ 관련 노래는 1932년 상반기에 스무 곡 가까이나 발표되었다. 또, 중일전쟁 발발 뒤 가사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露營の歌(노영의 노래)>는 1937년 10월 발매 이후 반년간 음반 판매량이 60만 장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 대중에게는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이 어쨌든 ‘우리의 전쟁’이었으니, 식민지 조선과는 상황이 다르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일본과 달리 군국가요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일본 군국가요에 대한 반응도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뒤 1937년 8월 말부터는 형세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앞서 5월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선으로 조직된 조선문예회에서 전시 작품 창작에 나서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조선문예회는 원래 건전한 문예 진흥과 문화 수준 앙양을 내건 관변단체였지만, 중일전쟁 발발에 따라 군국가요 제작소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군간호부의 노래>가 처음 발표된 애국가요대회 <경성일보> 1937년 9월 30일자 광고.

조선문예회에는 이광수(李光洙)와 현제명(玄濟明)을 비롯해 조선 문단과 악단의 명사들이 다수 참여했고, 그들은 ‘시국 인식의 철저는 노래로부터’라는 표어 아래 1937년 9월부터 군국가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조선문예회의 작품은 우선 방송으로 몇몇 곡이 전파되었고, 9월 30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애국가요대회를 통해 전모가 공개되었다. 조선인 작가와 재조(在朝) 일본인 작가가 두루 참여한 발표작들 가운데 가사와 곡 모두를 조선인 작가가 만든 노래는 <종군간호부의 노래>, <김 소좌(少佐)를 생각함>, <정의의 개가>, <총후의용(銃後義勇)>, <방호단가(防護團歌)>, <정의의 사(師)여>, <장성의 파수> 등이 있었다. 그중 <종군간호부의 노래>를 비롯한 세 곡은 1937년 11월 이후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종군간호부의 노래>
김억(金億) 작사, 이면상(李冕相) 작곡, 김안라(金安羅)‧콜럼비아여성합창단 노래, 1938년 콜럼비아 40794

대포는 쾅 우레로 튀고 총알은 땅 빗발로 난다 / 흰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 전화에 흐트러진 엉성한 들꽃 / 바람에 햇듯햇듯 넘노는 벌판 / 야전병원 천막에 해가 넘으면 / 삭북 천리 낯선 곳 벌레가 우네
대포는 쾅 우레로 튀고 총알은 땅 빗발로 난다 / 흰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 쓸쓸한 갈바람은 천막을 돌고 / 신음하던 용사들도 소리 없을 제 / 하늘에는 반갑다 예전 보던 달 / 둥그러이 이 한밤 밝혀를 주네

1938년 1월 신보로 발매된 <종군간호부의 노래>는 조선 문단의 중진이었던 시인 김억이 작사했고, 대중가요를 주로 작곡하면서도 조선문예회에 참여한 이면상이 작곡했다. <진주라 천리 길>, <울산 큰애기> 등으로 유명한 이면상은 1945년 8월 서울에서 해방을 맞은 뒤 곧 삼팔선 너머 북으로 가서 이후 북한 음악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일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대중가요 가수로도 활동한 김안라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金貞九)의 누나이기도 하다. 대체로 한 번 발매에 그쳤던 여타 군국가요 음반과 달리 <종군간호부의 노래>는 1942년 3월에 음반번호를 달리해 다시 발매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콜럼비아 40889).

초기 군국가요에서 조선문예회의 역할이 크기는 했지만, 대중가요 작가와 가수들의 참여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 5대 음반회사에서는 마치 할당이라도 받은 듯 1937년 말부터 1938년 초까지 모두 소량의 군국가요 음반을 발매했는데, 콜럼비아레코드 작품은 <종군간호부의 노래> 외 세 곡, 빅타(Victor)레코드는 조선문예회 작품인 <정의의 사여>, <총후의용> 두 곡, 오케(Okeh)레코드는 <동방의 용사> 한 곡, 태평레코드도 <제국 결사대> 한 곡, 포리돌(Polydor)레코드는 <남아의 의기>, <반도의용대가> 두 곡이었다. 조선문예회 작품 세 곡 외에는 조선문예회 작가와 대중가요 작가의 합작이거나 대중가요 작가들이 작사와 작곡을 모두 맡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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