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횡성 ‘치산치수지비(1941년)’

20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4]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횡성 ‘치산치수지비(1941년)’
수해구제대책으로 북선이주(北鮮移住)와 사방댐 건설이 성행하던 시절

이순우 특임연구원

일찍이 제15대 조선군사령관(재임 1929.8.1~1930.12.22)을 지냈고 육군대신,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 대사를 거쳐 제7대 조선총독(재임 1936.8.5~1942.5.29)의 자리에 오른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가 부산항에 당도한 때는 임명 이후 20여 일이 지난 1936년 8월 26일이었다. 그는 즉시 빗속을 뚫고 달리는 임시급행 제78열차에 올라 그날 오후 3시 10분 경성역에 도착하였고, 곧장 조선신궁부터 올라가 정식 참배한 이후 창덕궁, 이우공가(李鍝公家), 이건공가(李鍵公家)를 두루 들렀다가 왜성대 관저에 든 것이 오후 5시였다.

이로부터 딱 1주일이 지나고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강원도 횡성이었다. 그가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부랴부랴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의 부임 직전 태풍(颱風)과 호우(豪雨)에 동반하여 두 차례(제1차 수해 7월 31일~8월 15일, 제2차 수해 8월 27일~28일)나 조선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수해(水害) 현장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이 와중에 강원도 지역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고 민심을 살펴 위문(慰問)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던 까닭이었다.

『매일신보』 1936년 9월 4일자에 수록된 「횡성(橫城) 부근 수재지(水災地)를 총독(總督) 모우(冒雨)코 시찰(視察), 금조(今朝) 춘천발(春川發) 즉일 귀성(歸城)」 제하의 기사는 이때의 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춘천지국 전화] 강원도 재지(災地) 시찰중인 미나미 총독은 2일 오후 2시 일찍부터 강우(降雨)임에도 불구하고 춘천을 떠나 먼저 재해지로 향하여 동(同) 4시 횡성에 도착하였는데 이번 수해에 전천교(前川橋)가 파괴되어 기후(其後)는 내를 건너 왕래하던 것이 당일(當日)의 강우로 물이 갑자기 증수(增水)되어 내를 건널 수 없으므로 원주(原州) 방면 시찰을 중지하고 부근 일대 피해상황을 시찰하고 동 5시 40분 횡성을 떠나 9시 춘천에 도착하여 일박(一泊)하고 금(今) 3일 오전 9시 춘천고보(春川高普)를 시열(視閱)한 후 동 10시 춘천발 경성으로 향하였다.

이러한 긴급사태를 맞이하여 총독부 당국에서는 서둘러 다음과 같은 임시조치를 강구하였는데, 여기에 관련한 세부내용은 『조선』 1936년 10월호에 수록된 「재해대책위원회 신설(新設)」이라는 글(127~128쪽)에 담겨 있다.

임시재해대책조사위원회(臨時災害對策調査委員會)의 조직은 더할 나위 없이 참혹했던 이번 풍수해의 응급조치로서 신설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3일부로 훈령(訓令) 10호로써 위원회 규정의 발포를 보는 동시에 곧이어 위원(委員) 및 간사(幹事)의 임명을 보았으며, 동(同) 위원회는 이재자 구조(罹災者 救助), 재해부흥의 최고기관으로서 활약할 예정으로 크게 기대가 된다.
…… 경남북(慶南北) 강원(江原)의 3도(三道)를 중심으로 한 미증유의 풍수해에 대한 총독부 수뇌부(首腦部)의 현지답사(現地踏査)는 미나미 총독 및 토미나가(富永) 학무국장의 강원도, 오노(大野) 정무총감의 경남도, 야시마(矢島) 농림국장의 전남북, 오타케(大竹) 내무국장의 경북도 등 각기 대략 종료했으므로 임시재해대책위원회를 개최하여 응급대책을 결정하고 가급적 신속히 실시하기로 되었다. 또한 이것의 항구대책(恒久對策)에 대해서는 파견중인 조사대(調査隊)의 귀임(歸任)을 기다려 구체방법을 확립하기로 되었으며, 대체(大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一, 만주이민(滿洲移民)의 증식(增殖)
一, 북선(北鮮) 노동이민의 적극적 알선(斡旋)
一, 치산치수(治山治水)의 근본적 재검토
一, 토목사업(土木事業)의 실시에 따른 노은(勞銀, 노임)의 살포(撒布)
一, 부업(副業)의 대대적 장려

여기에 나와 있듯이 우선 응급조치로서 이재민 구제공사를 벌여 노임(勞賃)을 뿌리거나 식량과 의약(醫藥)의 배급을 실시하고 사상자(死傷者)에 대한 위문(慰問)을 펼쳤으며, 때마침 수해지 시찰에서 돌아온 미나미 총독은 총독부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치산치수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방침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 이듬해인 1937년에 강원도 횡성지역에는 사방공사사무소가 새로 설치되었고 이곳의 주도 아래 3년간 계속사업으로 — 횡성면(橫城面) 청룡리(靑龍里), 곡교리(曲橋里), 묵계리(墨溪里), 반곡리(盤谷里), 모평리(茅坪里), 갈풍리(葛豊里), 우천면(隅川面) 남산리(南山里), 생운리(生雲里), 오원리(烏原里) 등 9개리(里)에 걸쳐 — 재해림(災害林) 복구를 위한 대규모 사방공사가 시행되기에 이른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5일자에 수록된 「횡성군(橫城郡) 작년 수해지, 대사방공사(大砂防工事) 착수, 3년 계속, 공비(工費) 10만 원(圓)」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횡성(橫城)] 작년도의 횡성군내에 홍수(洪水)로 인하여 백만 원 이상의 피해가 있다 함은 누보(累報)하였거니와 그 중에 전답매몰유실(田畓埋沒流失)은 전혀 천산(淺山)이 무너져서 피해가 되고 우천면(隅川面), 횡성면(橫城面) 일대에 산(山)이라는 산은 전부 사태가 나서 무려(無慮) 180여 정보(町步)나 되므로 금반(今般) 강원도 산림과(江原道 山林課)에서는 3년간 계속사업으로 횡성군에 사방공사사무소(砂防工事事務所)를 설치하고 기술원(技術員) 마스자키 기수(益崎 技手) 외 10여 인(人)을 파견하여 목하(目下) 사방공사에 착수, 착착 진행중인데 총공비(總工費)는 10만 2천 원이라고 한다.

그 이후 3개년 계획이 마무리 되어가던 1939년에 이르러서는 사방댐의 축조가 본격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횡성 우천면 오원리 지역에는 그해 4월부터 여러 곳에 토사의 유출을 방지하는 사방댐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경성일보』 1939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독산퇴치(禿山退治)의 댐(ダム), 횡성군(橫城郡)에 자랑으로 여길 위관(偉觀)」 제하의 기사에는 그 과정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춘천(春川)] 조선통치(朝鮮統治)의 근본요체(根本要締)인 치산치수(治山治水)의 대방침(大方針)에 기초하여 본도(本道, 강원도)에서는 시정 이래 사방(砂防)과 녹화(綠化)의 철저를 기하여 시정(始政) 당시 도처에 독산(禿山, 민둥산)만 있던 본도가 이제는 구모(舊貌)를 일신(一新)하여 푸릇푸릇하게 풍치림(風致林)이 된 것은 물론 사변하(事變下)에 있어서 펄프섬유 원료와 더불어 군수자재(軍需資材)의 풍부한 산출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도명물(半島名物)인 여름철 홍수기에 이르는 때는 횡성군 우천면(隅川面)과 횡성면(橫城面) 일대는 원주군 치 악산(原州郡 雉岳山)에서 발원하는 남한강 지류 섬강(蟾江)이 범람(氾濫)하여 유역(流域)의 전전(田畑)은 해마다 휩쓸려 횡성신(橫城神)의 군치상(郡治上)에도 비상한 암(癌)으로 되어 있으므로, 본년 중에 도 산림과(道山林課)에서는 우천면 오원리(烏原里) 국유림 노척산(魯尺山), 어반산(御蟠山), 음춘산(蔭春山) 일대에 전장(全長) 120미(米, 미터)의 차단댐(遮斷ダム)을 설치, 70미, 80미의 동상(同上) 댐을 축조하여 토사의 흐름을 식지(喰止, 방지)토록 도비(道費)에서 총공비(總工費) 7만 원으로 4월부터 공사에 착수하고 있는데, 도(道)에서는 기술원 및 직원 5명을 파견하여 공사를 진척시키고 있다. 이러한 댐공사는 아직 조선사방공사(朝鮮砂防工事)에서는 그처럼 대규모의 댐설치를 했던 적이 없으므로, 일반(一般)은 다대(多大)한 기대로써 주목(注目)하고 있다. (사진=오원리의 댐축조공사상황)

다시 해를 넘겨 1940년 4월 8일에는 ‘제1호 언제공사(第一號 堰堤工事)’라고 명명된 저수지 조성공사가 새롭게 착공되었으며, 1년 6개월가량의 공사기간을 거쳐 최종 마무리를 본 것은 1941년 10월말의 일이었다. 이에 관한 소식은 『매일신보』 1941년 11월 30일자에 수록된 「오원리 재해림지(烏原里 災害林地) 복구사방공사(復舊砂防工事) 준공(竣工)」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강원지사발(江原支社發)] 횡성군 우천면 오원리(橫城郡 隅川面 烏原里)의 재해림지 복구사방공사[제1호 언제공(第一號 堰堤工)]는 소화 15년(1940년) 4월 8일에 기공(起工)한 이래 만(滿) 1년 6개월만인 지난 10월 30일에 준공을 보게 되어 지난 26일 오전 11시 반부터 현지에서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고 한다. 준공식에는 당지(當地)의 관민 다수가 출석한 외에 도(道)로부터 마츠모토 산업부장(松本 産業部長)을 비롯하여 회계과장 대리, 산림과장, 사토 사방기사(佐藤 砂防技師) 외 계원 10명이 임석(臨席)하였는데, 동(同) 공사는 공비총액(工費總額)이 3만 3,055원(圓; 국고보조 8할, 도비 2할)으로 사역 연인원(使役 延人員)이 3만 5,525명(名)에 달하였다 하며, 언제공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다.
一, 집수구역(集水區域): 450백(陌; 헥타르)
一, 퇴적토사량(堆積土砂量): 7% 구배(句配)로 160,000입방미(立方米)
一, 언제 전입적(堰堤 全立積): 2,245입방미(立方米)
一, 언제(堰堤)의 촌법(寸法): 전장(全長) 69미(米, 미터), 유효고(有效高) 11.1미(米), 수표법(水表法; 댐 안쪽 경사) 1분(分; 퍼센트), 전고(全高) 13미(米), 수리법(水裏法; 댐 바깥쪽 경사) 3분(分).

이 당시에 조성된 ‘오원저수지’는 영동고속도로 새말인터체인지에서 안흥 쪽으로 넘어가는 42번 국도변의 골짜기에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 계곡 옆 밭둑을 이룬 곳에는 그 시절 재해림지복구 사방공사의 흔적 하나가 완연히 남아 있는데, 삼각형 시멘트 기단 위에 세모꼴 돌기둥을 올려놓은 ‘치산치수비(治山治水碑,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오원리 322번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길 보면 서쪽을 향한 비면에는 “治山治水之碑(치산치수지비)”라는 큼직한 글자와 함께 “江原道知事 高尾甚造 書(강원도지사 타카오 진조 씀)”라는 표시가 또렷하다. 하지만 나머지 두 방향의 비면에는 아쉽게도 자연풍화가 상당한 상태인데다 표면 전체에 이끼가 심하게 덮여 있고 군데군데 총탄 자국이 있어서 — 몇 가지 글자와 여러 가지 숫자를 새겨놓은 흔적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뿐 — 지금으로서는 전혀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림과(山林課)”, “소화(昭和) 16년(1941년) 10월” 등과 같은 몇 군데 글자만으로 짐작컨대 이것은 위의 기사에 나오듯이 1941년 11월 26일 현지에서 거행된 사방공사 준공식에 맞춰 건립된 기념물로 보이며, 그 내용은 대략 사방공사 및 언제(堰堤; 둑)축조와 관련한 세부내역 등이 적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바라건대 앞으로 누군가 비석 표면을 깨끗하게 세척하고 탁본작업을 하게 된다면, 이 비석에 정확히 어떤 구절이 새겨져 있는지가 드러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횡성 지역의 수해복구 및 구제대책에 관한 흔적을 얘기하다 보면, 이 시기에 크게 성행했던 수해이재민(水害罹災民)의 북선이주정책(北鮮移住政策)에 관한 내용도 결코 빠트릴 수 없다. 이것보다 앞선 시기에 발생한 수해재난 때마다 이미 몇 차례 시도된 방법이긴 했지만,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임시재해대책조사위원회’에서 우선 검토사항에 “만주이민(滿洲移民)의 증식(增殖)”과 “북선(北鮮) 노동이민의 적극적 알선(斡旋)” 등이 포함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재민들을 북부조선으로 보내 자원개발 등의 노동력으로 활용하려던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에서는 인구(人口)가 조밀(稠密)하나 궁핍한 영세농이 많으며 또한 번번이 한해(旱害)와 수해(水害)가 극심하여 도탄에 빠진 남부조선지역에서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방책의 하나로 인구는 적고 자원이 풍부한 북부조선지역으로의 이주를 추진하는 사업에 매진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러한 이주정책은 (1) 남선궁민(南鮮窮民)의 구제, (2) 노력(勞力, 노동력)의 수급조절, (3) 부고(富庫)의 개발촉진, (4) 인구분포의 완화조절, (5) 내지(內地, 일본) 도항노동자(渡航勞動者)의 감소 등 5대 목표를 바탕에 두고 실시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령(制令) 제7호 「선만척식주식회사령(鮮滿拓殖株式會社令)」(1936년 6월 18일 시행)이 제정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는데, 이 조직은 실로 “서북선(西北鮮)에 있어서 조선인 이주자를 위해 필요한 척식사업(拓殖事業)의 경영 및 만주국(滿洲國)에 있어서 조선인 이주자를 위해 필요한 척식사업에 대한 자금의 공급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다. 또한 ‘선만일여(鮮滿一如)’라든가 ‘북선개척사업(北鮮開拓事業)’이라든가 하는 용어가 빈번하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것 역시 동일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에 따라 제1차 수해가 발생하던 시점부터 이미 구제대책의 하나로 수해이재민을 북선지역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공공연하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6년 8월 28일자에 수록된 「강원도 수재민(江原道 水災民)들을 북선(北鮮) 일터로 이민(移民), 상당(相當)한 임금(賃金), 주택(住宅)까지 제공(提供), 총독부(總督府)서 여비지불(旅費支拂)」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춘천(春川)] 이번 수해로 인하여 참화(慘禍)를 당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 영월 지방에서는 현재 이재호수(罹災戶數)가 약 6천여 호에 달하고 있어 금후 그들의 살아나갈 길이 막연(漠然)하므로 도(道)에서는 여러 가지로 구제대책을 강구중 기보와 같이 토목공사(土木工事)를 실시하여 구제하는 일방 본부(本府)의 알선(斡旋)으로 나진(羅津) 토목공사, 회령(會寧) 유선탄광(遊仙炭鑛), 고무산(古茂山) 오노다(小野田)세멘트공장 등으로 보내어 금추의 생활안정을 시키고자 북선지방(北鮮地方)으로 대량이민(大量移民)을 시키기로 결정이 되었으므로 도(道)에서는 이재지 각군(各郡)에다가 조회하여 모집(募集)을 하는 중인데 임금(賃金)도 비교적 비싸고 가족(家族)을 인솔(引率)하고 가는 사람에게는 주택(住宅)까지 제공하는 등 여러 가지로 조건이 유리하므로 응모자(應募者)가 많을 것이라는 바 여비(旅費)는 고주(雇主)와 협의하여 본부(本府)에서 지불할 터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과로 강원도 수해지역에서는 수해이재민들의 북선이주행렬이 잇달았으며, 가령 영월 지역 같은 곳에서는 이재민 550여 명이 대거 북선이민열차에 올랐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함께 원주군과 횡성군 쪽의 이재민도 이 대열에 포함되었는데, 『매일신보』 1936년 9월 13일자에 수록된 「생활(生活)의 길을 찾아 고향(故鄕) 떠나는 이민(移民), 강원도 수해지(江原道 水害地) 160가족(家族), 북선(北鮮) 각 공사지(各工事地)로」 제하의 기사는 북쪽을 향한 이들의 출발상황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춘천(春川)] 저반(這般) 제1차 대수해(第一次 大水害)로 참화(慘禍)를 당하고 기아선상(饑餓線上)에 방황하고 있는 이재민(罹災民)을 본부(本府)와 도(道)의 알선(斡旋)으로 북선토목공사(北鮮土木工事)에 보내기 위하여 그간 도에서는 이재지 각군(各郡)에서 극력모집중(極力募集中)이던 바 응모자(應募者)가 많아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으므로 정(情)든 고향(故鄕)을 이별하고 북선으로 생활의 길 찾아 좌기(左記)와 여(如)히 떠나가게 되었다.
一, 영월군(寧越郡, 충북에서 출발) 120가족(12일부터 20일까지 6일간, 매일 20가족씩, 오후 4시 15분 충주발 열차로 출발)
一, 원주군(原州郡, 청량리발) 30가족(21일 10가족, 22일 20가족; 여주 이천을 경유하여 청량리에서 출발)
一, 횡성군(橫城郡) 10가족(양평 경유 21일 청량리역 출발)

이 당시 횡성지역에서는 최초 10가족으로 제1진이 구성되었고, 그 이후 장년(壯年) 노동자를 따로 선발하여 제2차에 64명, 제3차에 43명, 제4차에 31명을 추가로 이주대열에 합류시켰다. 이리하여 결국 이들은 곧이어 발생하는 중일전쟁과 더불어 전시체제기가 본격 도래하면서 — 이른바 ‘ 대륙전진 병참기지(大陸前進 兵站基地)로서 조선반도의 대사명(大使命)’을 원활히 수행하도록 — 군수공업을 강화하고 전시총력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데에 일조할 노동력 동원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