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어른] 역사학자 임종국

친일청산은 해방 8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다. 친일청산을 저지하는 힘은 그만큼 만만치 않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 친일청산을 추진하는 힘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해방 직후에 권력을 잡은 친일세력은 그 힘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도 80년 넘게 친일청산 요구를 잠재우지 못했다. 양쪽 다 만만치 않은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친일청산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의 토대를 놓은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이 바로 그다. 그가 얼마나 무섭게 친일청산을 추구했는지는 가족관계도 예외로 두지 않는 엄정한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1966년에 발간된 대표작인 <친일문학론> 서론에서 그는 총독부의 압력하에서 천도교인들이 친일에 가담한 일을 이렇게 기술했다.
“천도교청년당으로 하여금 우리는 시국에 감하여 ‘헌신보국 희생적 각오로써 시국에 당할 것’을 결의케 하여 1937년 9월 4일~27일 백중빈·임문호·김병제로써 초산·회령·함흥 외 35개 처를 순회 강연케 하는 한편, 천도교종리원으로 하여금 ‘비(非)타산적으로 내선일체의 정신을 발휘하고 거국일치의 백력(魄力)을 고양하자’는 등의 삐라를 발행(1937.8)케 했던 것이다.”
혼백의 힘을 거국일치로 고양시켜 헌신보국에 힘쓰자는 친일 캠페인이 천도교에서 진행될 때에 이 종교의 간부들인 백중빈·임문호·김병제 등이 친일 강연을 헸다. 임종국은 자신이 여덟 살 때 일어난 이 일을 기술하면서 아버지 임문호(1900~1972)를 거명했다. 친일파들을 고발하는 책의 서론에 아버지 이름을 넣었던 것이다.
임종국이 백중빈 다음에 임문호를 넣은 것은 아버지가 덜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의 표현은 아니다.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점은 중일전쟁 발발(1937.7.7.) 뒤에 발행된 1937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 2면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그해 9월 4일부터 평남북에서 강의할 제1대(隊) 강사는 백중빈이고 5일부터 함북에서 강의할 제2대 강사는 임문호였다.
아버지, 스승까지 엄격하게 비판한 사람
임종국뿐 아니라 그의 뜻을 계승해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사람들도 한 치의 인정을 두지 않았다. 이 사전 제3권 임문호 편은 임문호가 일제 침략전쟁을 앞장서서 지원한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1937년 이후에는 청년당 당두로서 천도교중앙종리원 관정(觀正)에 선출되어 천도교 공문 ‘도발(道發)’과 순회강연, 각종 기고문을 통해 천도교인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과 황민화정책을 적극 후원하고 지지할 것을 독려했다.”
‘적극’이나 ‘독려’ 등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자들이 선택한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굳이 넣지 않아도 문장 서술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여타의 주요 친일파들을 평할 때처럼 임문호에 대해서도 그런 표현을 공정하게 집어넣었다. 임종국은 물론이고 그의 뜻을 계승하는 사람들 역시 공정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임종국은 아버지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했다. 1929년 생이기 때문에 친일파가 될 시간적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학생 근로동원에 참여한 객관적 사실뿐 아니라 한때 일본을 동경했다는 주관적 사정까지 낱낱이 고백했다.
이 내용은 아버지 이야기보다 앞인 <친일문학론> 서문에 나온다. 이 글에서 그는 이쿠요라는 일본 소녀를 사귀고 “연정 비슷한 감정”을 느낀 일, 배낭에 총과 대검을 차고 군사훈련을 받는 상급생들이 “참 하늘만큼은 장해” 보인다고 느낀 일 등등을 털어놨다. 주변 사람들이 목격한 임종국의 학생 근로동원 참여뿐 아니라,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면의 감정들까지 다 털어놓은 것이다.
이는 임종국 개인의 솔직함을 넘어 한국 친일청산 운동가들의 정신자세를 보여준다. 한국 친일청산운동의 생명력이 이런 데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경남 창녕 출신인 임종국은 한국전쟁(6·25전쟁) 중인 1952년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린 2005년 11월 11일 자 <미디어오늘> 기사 등에 따르면, 그 뒤 그는 이 대학 총장이자 문인인 법학자 유진오와 사제관계를 맺었다. 바로 이 유진오의 친일을 비평하는 ‘유진오론’도 <친일문학론>에 수록돼 있다.
31세 때인 1960년에 임종국은 출판사 동료인 이선숙과 결혼했다. 이때 주례를 봐준 사람은 고려대 영문과의 조용만 교수다. <친일문학론>에는 ‘조용만론’도 있다. 임종국이 얼마나 엄격하게 친일 비평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기타리스트가 될 뻔했던 친일문제 역사학자

임종국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지만, 그것은 판검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예술이나 문학 방면의 소질을 갖고 있었다.
동생 임경화의 2016년 8월 23일 자 <오마이뉴스> 인터뷰에 따르면, 임종국은 해방 2년 뒤인 1947년에 열여덟 살 나이로 서울음악전문학원 첼로과에 입학했다. 또 방송국이 주최하는 클래식 기타 경연대회에서 2등상을 받았다. 동생은 “아코디언과 첼로와 기타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었어요”라며 “오빠는 브람스와 쇼팽, 랄로(프랑스 작곡가)의 첼로협주곡과 차이콥스키의 비창교황곡 2악장을 좋아했어요”라고 회고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음악을 접고 정외과에 들어간 임종국은 이번에는 ‘부모님이 생각하는 공부’와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를 절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학술적이면서도 예술성이 가미된 문학평론의 길로 그는 나아갔다. 첼로나 기타뿐 아니라 이 방면에서도 그의 재능이 확인됐다. 27세 때인 1956년에는 <이상전집> 전 3권을 발간해 문학평론가의 기반을 닦고, 1959년에는 <문화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동생 임경화는 “오빠는 격정적인 곡보다 마음이 잔잔해지는 곡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불같은 성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어요”라고 말했다. 자기보다 앞선 시대의 문학인들을 연구하고 비평하는 과정에서 그의 “불같은 성품”은 끝내 폭발했다.
임종국이 연구한 문인들의 상당수는 친일파들이다. 그 문인들은 아버지 임문호가 친일 강연을 하던 시절에 일본을 찬양하는 시나 소설 혹은 희곡이나 기행문을 썼다. 그들은 자신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임종국의 불같은 심장을 건드렸다.
음악가의 길을 막은 쪽은 부모님이지만, 문학가의 길을 막은 쪽은 친일 문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동생은 “1959년 <문화예술>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문학가가 될 수 있었지만, 그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라며 “친일파들의 추악한 행적을 발견하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임종국이 읽은 문학서적의 저자들은 단순히 일본이라는 나라의 좋은 점을 찬양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옹호한 것은 인간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이고, 그들이 찬미한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동아시아 침략이었다. ‘친일’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다 담아내기 힘든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이었다.
친일문인들은 동료 인류를 해하는 그런 일을 저지르면서도 인간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학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고 평론을 쓰자니, 잔잔한 음악을 들어서라도 격정을 달래야 했던 임종국의 심장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임종국의 심경과 투쟁이 담긴 결과물이 <친일문학론>을 비롯해 <정신대 실록>,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친일논설선집>,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전 2권이다. 이 결과물들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자극하고 한국의 친일청산 작업을 북돋우는 기능을 했다.
동시에, 그것은 임종국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전기와 전화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고, 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폐기종을 앓았다. 1929년 10월 26일에 출생한 그는 그런 환경 속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89년 11월 12일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한국의 친일청산 작업은 그의 60년 인생에 상당부분 토대를 두고 있다.
김종성 기자
<2026-10-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버지 친일까지 알린 지독한 학자… 의외의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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