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연천중앙공립심상소학교의 황국신민서사지주 건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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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자료관 4]

연천중앙공립심상소학교의 황국신민서사지주 건립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미나미 총독(南總督)의 반도시정 중 교육체제의 근간이 되는 ‘황국신민의 조성(造成)’에 관하여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시국극복과 함께 더욱 일본정신의 철저발양에 매진하기로 되어 반도 신민중으로 하여금 항상 “우리는 일본인민이다”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여 언제나 이를 잊지 않도록 전조선의 학교, 청년단, 소년단, 기타 각종 단체에서 적어도 다수인이 회합하는 때에는 일동이 합창하여 그 정신을 전지에 피력시키기 위해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라는 것을 작성하여 지난 2일 미나미 총독의 결재를 거쳐 곧 각 도지사에게 통첩을 띄웠다. 서사는 소년용과 청년 이상용의 2부에 나누어 자못 간단 명쾌한 글로써 작성하여 첫째 제국신민의 신념과 둘째로는 내선일체, 동포상애의 강조, 셋째로는 근로단련과 일본국가로서 세계에 대한 적극적 활동을 표증한 제국신민의 전수의 세 가지로 결정시킨 것인데, 초등학교에서는 매일 조회(朝會)에 이를 합창하고 일반단체도 모든 회합에 이를 합창하게 할 터이라는데 학무국에서는 곧 이를 인쇄하여 전조선에 배부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조선일보』 1937년 10월 5일자에 실린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전조선(全朝鮮)의 학교, 청년단, 소년단에서 사용토록, 학무국(學務局)에서 각도지사(各道知事)에 통첩(通牒)」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의 개시로 전시체제기가 본격 도래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나온 것으로, 이는 곧 일제패망기에 이르도록 이른바 ‘내선일체’와 ‘일시동인’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옥죄었던 바로 그 ‘황국신민서사’의 첫 등장을 알리는 기사였던 것이다.

황국신민의 서사 (구성 내용)

특히, 1939년에 이르러서는 남산 기슭 조선신궁 구내의 한쪽에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라는 거대 조형물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은 여러 학교나 일반단체들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필수참배코스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전국의 각 학교교정에도 조선교육령 개정(제3차, 1938년)을 기념한다거나 이른바 ‘황기(皇紀)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삼아 — 저마다 다른 모양이긴 하지만 — 황국신민서사와 관련한 기념물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더러 옛 학교터에 묻혀 있던 황국신민서사비의 흔적이 발견되어 옛 모습 그대로 잔존한 상황이 알려지기도 하고, 혹은 ‘해방기념비’나 ‘독립기념비’로 둔갑하여 재활용한 형태로 현장에 남아있다는 소식이 곧잘 들려오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 당시에 황국신민서사와 관련한 — 그것의 이름이 기념탑이건 기념비이건 주(柱, 기둥)이건 간에 — 기념물들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내선일체의 관념을 억지로 주입하려 했던 시도가 정말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학무국 산하단체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가 펴내는 기관지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 1939년 10월호에는 경기도 연천중앙공립심상소학교(京畿道 漣川中央公立尋常小學校) 명의로 작성된 「우리 학교 서사지주(誓詞の柱)」이라는 글(91~94쪽)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 학교에서 각 학년의 아동들을 총동원하여 만든 황국신민서사지주의 제작과정이 소상하게 채록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실제 사례가 자세히 소개된 적은 없었으므로 그 전문을 아래에 옮겨두기로 한다.

연천공립심상소학교의 주요 연혁중앙

여기에 나오는 ‘연천중앙공립심상소학교’는 원래 ‘연천공립보통학교(1911년 개교)’였다가 내선일체교육을 앞세운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1938년 이후 그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38선 이북지역에 속했다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수복되어 그 이후 1955년에 재건된 ‘연천초등학교’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939년에 제막된 이 학교의 ‘황국신민서사지주’는 원래 재질 자체가 콘크리트였던 탓에 실물이 지금껏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거라고는 거의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우리 학교 서사지주(我が校 誓詞の柱)」

1. 머리말
성전(聖戰)은 이에 만(滿) 3주년, 황국(皇國)의 대이상(大理想)인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大精神)은, 흥아건설(興亞建設)의 예봉은 더욱더 날카롭게 사해(四海)를 광피(光被)하려 한다. 대이상(大理想)의 실현 아래에는 대시련(大試鍊)을 요한다. 황군의 초열지옥(焦熱地獄) 아래에서 분투하고, 총후국민(銃後國民)의 흐트러짐없는 동일보조(同一步調), 곧 일억일심(一億一心)의 보국(報國)이야말로 바로 현대신민에 부하(負荷)되어진 일
대책무이며 영예이기도 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는 성전하 성직(聖職)에 신명(身命)을 두고, 황국 제2의 신민을 육성하는 소임이야말로실로 중차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사 이래 공전(空前)의 사변 하에서 삶을 누리고, 게다가 몸을 사직(斯職)에 바치는 것은 얼마나 감격이냐.
생생발랄한 아동(兒童)도 무언가를 느낀다. 일찍이 동도(東都, 도쿄)에 있는 소학교에서 국사교수(國史敎授)를참관했던 일이 있었는데, 교재는 「명치천황(明治天皇)의 붕어(崩御)」이었다. 교수법의 교졸(巧拙)은 제쳐두고, 교수자(敎授者)의 경건한 태도, 긴긴(緊緊)하게 아동의 심금을 흔드는 교조(敎調)가 실로 주객 공히 열루(熱淚)아래의 정경이었다. 최후에 “여러분은 그 당시, 이중교(二重橋) 밖의 성역에, 혹은 신사 불각(神社 佛閣)에, 어평유기원(御平癒祈願)에 혼(魂)을 바쳤던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 여러분은 그 피를 나눠받았다. 그 혼을 전승한 사람들이다“라고 끝을 맺었다. 좌석에서 옷깃을 여미지 않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꼈던 것이다. 이 잠언(箴言)에 의해 아동은 조금이라도
1) 황국신민으로서의 생존가치와 감사
2) 혼(魂)의 전통적 존재
가 유발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건대 미증유(未曾有)의 금차(今次) 사변은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의 건설이며, 팔굉일우(八紘一宇) 사해지도(四海指導)의 실현이고, 현대신민에 부여된 일대시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올바른 인식과 확고불발(確固不拔)의 각오와 견인지구(堅忍持久), 인고단련(忍苦鍛鍊)의 실천행(實踐行)을 쌓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차대(次代) 황국신민을 육성하는 초등교육(初等敎育)에 있어서는 모든 각도에서 검토하고 시설을 강구하며, 둘도 없는 이러한 기회에 혼의 교육에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반도(半島)에 있었으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 서사(誓詞)의 주(柱, 기둥)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사변하에 있어서 작년(昨年)의 획기적 2대제도(二大制度)의 실시가 반도(半島)로 하여금 얼마나 감격의 감과(坩堝, 도가니) 속에 녹아들었는가는 생생한 인상(印象)으로 남아있다. 이어서 3대강령(三大綱領)이 드러나고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가 발포되면서, 이에 국가교학(國家敎學)의 근본적 방침이 일층 역연(歷然)하게되고 학교경영의 진의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반도 전체에 선풍적인 절찬(絶讚)과 의기(意氣), 그리고 희망(希望)은 굉장한 것이었다. “목구멍을 지나가면 뜨거움을 잊는다”라고 예로부터 말해지고 있지만, 1개년을 경과한 오늘날, 너무나도 무관심한 것에 질리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인간(人間)이라고 할까, 동양인(東洋人)이라고 할까, 어쨌든 요구할 때는 가만히 배길 수 없을 만큼 분망한데, 막상 주는 것이라고 하면 그 결과, 감사도 노력도 없고, 따라서 미과(美果, 좋은 결실)의 거양(擧揚)에 평연(平然)한 태도인 것은 실로 개탄스럽다. 마땅히 맹성(猛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가 2대제도의 환발(渙發)은 황공하옵게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려(聖慮)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결코 권리나 의무랄까 욕구랄까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로지 황은(皇恩)의 홍대무변(洪大無邊)한 어인덕(御仁德)에 공구감격(恐懼感激)하며, 관민협력일치로써 황국신민된 자각의 철저, 동포일체관(同胞一體觀)의 신념 확립 아래 예의(銳意) 획책경영(劃策經營), 지성일관(至誠一貫) 성려를 따라 받들 뇌고(牢固)한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교직에 있는 자는 무엇으로든가 봉공해야 한다. 일의전심전폭(一意專心全幅)의 노력을 바쳐 교화제일선(敎化第一線)에서 분투할 결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교육령 개정(敎育令 改正)의 진의(眞意)를 체득하고, 금시(今時) 사변의 국가적 중대성에 비춰 교육자 자신이 먼저 신념을 견지하여 모든 각도에서 고찰연구(考察硏究)하며, 교육령 개정 취지 아래 성전하 제2국민의 육성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교(本校)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여러 가지의 고찰을 궁리하여 더 나은 시설경영(施設經營)에 부심(腐心)하고 있는데, 그 일단(一端)으로서 각 교실의 정면(正面)에 이를 훈련면(訓練面)으로 삼아 궁성어사진(宮城御寫眞)을 정면 흑판(黑板) 위쪽에 걸고, 그 아래쪽에 국가휘호(國歌揮毫)의 소축(小軸, 작은 두루마리)을 두며, 좌우에 황국신민의 서사와 교훈(校訓)과 학년훈(學年訓)을 적은 액자를 게시하고, 또한 그 좌우에 대일본제국전도(大日本帝國全圖)와 세계지도(世界地圖)를 배치하는 등 황국신민서사의 기둥도 동양(同樣)의 취지 아래 교정환경정리(校庭環境整理)의 일단으로 삼았다.

3. 건설공작(建設工作)
건설의 위치, 구조, 크기 등에 대해서는 교장(校長)이 적지 않게 머리를 괴롭혔다. 직원회(職員會)를 개최하여협의한 것이 수회(數回), 건설설계가 용이치 않음을 절실하게 체험하며 알았다. 위치는 청정(淸淨)하면서도 일상아동(日常兒童)의 눈에 보이며, 마음에 울리는 장소가 아니면 안 되었고, 재료(材料)는 2, 3년으로 부후(腐朽)하는 형태의 것은 안 되며, 되도록 영구적(永久的)으로 조선교육령 개정을 기념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직원, 아동의 손으로 조각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면 안 되었다. 목재(木材)로 할까, 석재(石材)로 할까, 가액(價額)이 싸지도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크기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삼각주(三角柱)로 할까, 사각주(四角柱)로 할까, 높이는 어떠한가, 기둥의 폭은 얼마쯤으로 할까, 선단(先端, 꼭지 끝)은 어떻게 할까 등 숙려협의(熟慮協議)를 모은 결과, 다음과 같이 결정했던 것이다.
一, 위치(位置) : 현관(玄關)을 향하여 좌측[교문(校門)에서 약 33미(米, 미터) 진정면(眞正面)]
一, 구조(構造) : 세멘트 공작(セメント工作)
一, 크기(大きさ) : 사각주(四角柱)
1. 기초(基礎) : 깊이 1.2미(米), 폭(幅) 1.2미 사방(四方), 지상고(地上高) 0.3미
2. 주(柱, 사각기둥) : 높이 2미 약(弱, 조금 모자람), 각면(各面) 폭 0.7미 약(弱)
3. 선단(先端) : 사각추(四角錘, 사각뿔)
一, 재료(材料)
1. 세멘트(セメント) 8포대
2. 율석(栗石, 밤톨돌) 반 평(坪)
3. 모래 24상자
4. 자갈(バラス) 48상자
5. 홍백에나멜(紅白エナメル) 각 3통(작은 것)
6. 화판(枠板, 틀판자)
7. 정(釘, 못)
공정(工程)은 ‘직원, 아동의 손에 의해서’라는 견지(見地)에서, 먼저 아동 일반에 서사의 기둥 건설에 대해 훈화(訓話)를 행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학년상응(學年相應)의 봉사(奉仕)를 명(命)하였다.
一, 세멘트 공작(6학년 남자)
一, 율석 운반(5학년 남자)
一, 자갈 운반(3, 4학년 남자)
一, 모래 운반(1, 2학년 남녀 전부)
다행히 세멘트, 화(枠, 와쿠), 못을 제외하고 다른 재료는 천혜(天惠)의 차탄천(車灘川, 학교 옆을 흐르고 있다)에 의해 주어졌다. 6월 6일 이른 아침 마음뿐인 지진제(地鎭祭)를 행하고, 드디어 6월 7일부터 착수하였다. 강바닥에 내려서서 율석을 모아 운반하는 상급아동(上級兒童)은, 혹은 손수레로, 혹은 지게로, 중학년(中學年) 아동은 자갈 수집에, 하학년(下學年) 아동 및 여아(女兒)는 모래를 파내며, 용감하게도 그럴 듯하였고, 그러한 바지런함은 실로 존귀한 것이었다. 6학년 아동은 각자 구덩이파기에, 틀 공작에 형(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작업에 의해, 일면(一面)으로는 전체적인 훈련이 가능했던 것이다. 공작은 착착 진척되어, 6월 13일에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콘크리트로의 조각(彫刻)은 우에누리(上塗り, 마무리칠)가 건조되지 않는 도중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직원 총출동하여 조각에 종사했다. 직원 12명을 각면(各面)에 3명씩 배치하고, 혹은 메스(メス)로써, 혹은 침(針)으로써 각자 독특한 장기를 발휘하며 땀투성이의 행동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휘호(揮毫)는 학교장(學校長)의 손에 의해, 정면에는 국기(國旗, 일장기) 아래에 ‘국체명징(國體明澄)’과 서사의 일(一)을 배치하였고, 양측면에도 같은 모양의 국기 아래에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에 각각 서사의 이(二)와 삼(三)을 배치하였으며, 이면(裏面)에는 ‘소화 13년 4월 1일 조선교육령 개정(昭和十三年四月一日 朝鮮敎育令改正)’이라고 새겼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이며, 마칠 때는 열기(ホット)에 차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은 충혈(充血)되어 홍조(紅潮)를 띠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직원 아동은 모두 만세(萬歲)를 연호(連呼)했다. 그러한 무아(無我)의 3시간, 삼매(三昧)의 경지, 이러이러 시성(詩聖)의 심경이며 악성(樂聖)의 경지가 아닐까. 수일(數日)을 경과하고 조각의 응고건조(凝固乾燥)를 기다려, 6학년 여아동(女兒童)의 손으로 에나멜로써 조각이 칠해졌고, 이어서 기둥의 주위에는 희황양(????黃楊, 좀회양목)을 심어서 테두리가 둘러졌는데, 이로써 단호하게 반도교육의 근본방침이 명시(明示)되며, 아동의 수학지침(修學指針)이 인각(印刻)된 서사지주가 건설되었다. 비용은 세멘트, 틀판자, 에나멜, 못 등으로 35원(圓) 30전(錢)이 필요했는데, 이 비용은 매월 애국일(愛國日) 아동절미헌금(兒童節米獻金)의 일부분을 지출하였다.

4. 제막식(除幕式)
6월 19일 오전 8시 반 조례(朝禮)를 마치고 곧장 제막식이 행해졌다. 서사의 기둥 앞에 숙연(肅然)한 아동은 왠지 모르게 긴장의 빛이 넘쳐 있었다. 군주재(郡駐在) 시게야마 시학(繁山視學)의 임석(臨席)이 있었다. 먼저 국기의 게양이 있고 궁성을 요배(遙拜)하였으며, 이어서 제1학년 여아동(女兒童) 2명에 의해 막이 내려지고 황국신민의 서사는 원기발랄(元氣潑剌), 음토낭랑(音吐朗朗)하게 제송(齊誦)되었다. 계속하여 학교장의 회고(誨告)가 있었고, 시게야마 시학의 알기 쉽게 설명하는 듯한 은근(慇懃)한 축사(祝辭)가 있었다. 끝으로 아동대표의 선서가 있었으며, 최후로 「우미유카바(海行かば; 바다에 가면)」를 합창하고 식을 종료하였다.
이래(爾來) 교문을 출입하는 천 명의 아동은 아침저녁으로 이 기둥을 한눈으로 바라보며, 눈동자는 번득이며 빛난다. 동시에 굳센 심금(心琴)을 울리는 것이다. 어느 때랄 것은 없이 아동은 등교하자마자 기둥 앞에서 일례(一禮)를 하면서, 금일(今日)을 맹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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