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쿠바로 간 화성인> 취재 후기: 산티아고의
바다에서 대한민국의 민낯을 마주하다
임상범 SBS 기자

광복 8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쿠바로 간 화성인>을 제작하며 접한 독립유공자 안순필 선생 가족의 역사는 저에게 국가의 존재 이유와 그 사회적 책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쿠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거대한 청새치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이야기,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가 바로 그곳, 쿠바에서 쓰였다는 사실이 제게는 결코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고전의 무대에서, 또 다른 산티아고를 만났습니다. 독립유공자 안순필 선생의 증손자인 알베르토였습니다. 그의 삶은 흡사 거대한 청새치와 홀로 싸우는 노인의 고뇌와 같았으며, 그의 일상은 백년을 이어온 망국의 설움이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던지는 끝나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안순필 가족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외면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우리는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0년 전, 그토록 많은 조선인이 왜 낯선 쿠바 땅까지 흘러가야 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명합니다.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국가적 폭력과 그로 인한 민중의 극한적 빈곤이 바로 그들을 등 떠밀었습니다. 안순필 선생의 가족도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 당도한 수백 명의 조선인 무리에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의 굴곡진 이민사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국가가 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국민의 삶이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집단적 비극의 증거입니다.
쿠바에서의 삶은 약속된 유토피아가 아니었습니다. ‘일확천금’을 미끼로 한 허위광고는 사탕수수밭의 혹독한 노동과 에네켄 가시의 고통으로 변질되었고, 쿠바혁명을 거치며 그간 일궈온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가난이라는 현실과 잊지 못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안순필 가족은 경이로운 선택을 합니다.

자신들의 월급 절반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한 군자금으로 쾌척하고, 안순필 선생의 자택을 독립운동의 거점인 ‘국민회관’으로 제공했습니다. 그의 아내 김원경 여사는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한글학교를 통해 후대에게 민족혼을 주입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안순필 일가의 헌신은 단순히 감상적인 애국심을 넘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조국의 미래에 투자한 숭고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산티아고 노인이 바다에서 거대한 청새치를 마주한 것처럼, 망국의 설움 속에서 조국 독립이라는 거대한 이상과 대면한 투쟁의 기록인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조국의 역사 속에서 잊혀 있었습니다. 백년의 세월이 흐른 뒤, 광복 80주년을 맞아 안순필 선생의 부인과 아들과 딸 등 가족 여섯 분이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일가족 8명 모두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반가운 소식을 접하며, 늦게나마 역사 정의가 실현된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 당연한 역사적 평가가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가, 만시지탄의 자성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 국가 시스템이 누군가의 희생을 바르게 기억하고, 남겨진 이들을 제대로 돌봐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알베르토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의 후손이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현실은 국가의 보훈 시스템이 얼마나 많은 허점과 사각지대를 안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그들에게 정당한 지원과 예우가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책무이자 도리입니다.
더 나아가, 죽어서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타국 땅에 묻혀 계신 안순필 선생의 유해 문제에 주목합니다. 평생을 조국을 그리워하며 독립을 염원했던 그분이, 해방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단지 독립유공자의 유해를 국내로 옮겨오는 행위를 넘어, 국가가 그들의 희생을 끝까지 기억하고 존중한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유해 봉환 업무는 국가보훈부, 행정안전부, 외교부 등으로 분산되어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진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우리 보훈 행정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해외 독립유공자 유해 봉환, 후손 발굴 및 지원, 그리고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제공하는 이 모든 복잡하고 중요한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분산된 체제로는 역부족입니다.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총괄하고 조정하며,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설 ‘컨트롤 타워’의 설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컨트롤 타워는 산재한 정보를 통합하고, 외교적 복잡성을 해소하며, 법적, 행정적 지원의 일관성을 확보하여 대한민국 보훈 행정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쿠바로 간 화성인>은 단순히 과거를 비추는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진단하는 냉철한 거울이자, 미래를 향한 명징한 질문들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속 산티아고는 홀로 거대한 청새치와 싸워 마침내 배 위로 끌어 올렸지만, 상어 떼의 습격으로 뼈만 남은 것을 보며 허탈하게 돌아옵니다.

안순필 선생과 그 가족들이 목숨 바쳐 끌어올린 ‘독립’이라는 열망은 지금 대한민국으로 당당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위해 온몸을 던졌던 분들과 후손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며, 그들의 유해는 산티아고의 빈 배처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후손들의 아픔을 보듬으며, 미흡한 제도를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현재 진행형의 노력만이 진정한 광복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번 다큐멘터리가 그러한 사회적 성찰과 변화의 시발점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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